2001-12. 아라우나의 타작 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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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삼하24:16-25
설교일시 200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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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우나의 타작 마당
삼하24:16-25
(2001/3/26)


우리가 진토임을 아시는 하나님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이 시간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습니다. 못 생긴 사람들은 얼굴만 봐도 흥겹다는 말이 있습니다만, 이 자리에 있는 이들 가운데 완벽한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 좋은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모두 허물이 많은 사람들입니다. 해서는 안 될 일도 더러 하고, 꼭 해야 할 일은 덮어두고 살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로라 할만한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것을 바울은 "의인은 없다. 한 사람도 없다"(롬3:10)고 했습니다. 사정이 이렇다고 해서 안심하고 죄를 짓는다든지, 지레 좋은 사람되기를 포기하면 안 되겠지요? 우리는 서로를 비추어주는 거울입니다. 잠언 27장 19절은 "사람의 얼굴이 물에 비치듯이, 사람의 마음도 사람을 드러내 보인다" 했습니다. 우리가 역사를 공부하는 것은 과거를 타산지석 삼아서 오늘을 아름답게 살기 위함이듯이, 우리가 성경을 보는 까닭은 성경에 비친 나 자신의 모습을 보기 위해서입니다.


회고와 전망

말이 좀 우습긴 합니다만 성경에 등장하는 사람들이 한결같이 허물과 실수가 많은 사람인 것이 우리에게는 고마운 일입니다. 하나님은 완벽한 사람을 찾으시는 것이 아님을 성서를 통해 우리는 깨닫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진토임을 알고 계십니다(시103:14). 하나님께 중요한 것은 우리의 '지식'이나 '힘'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것은 성실한 마음이고, 진리를 향해 열린 마음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여기는 경외심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사람은 경외의 대상을 발견하지 못한 채 사는 사람입니다.

이야기가 빗나갔습니다만 성경의 인물 중 다윗만큼 찬탄의 대상이 되는 사람은 흔치 않습니다. 뛰어난 연주자요 시인이었던 그는 위대한 군사 전략가요, 리더십이 뛰어난 정치가이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더럽혀지는 것을 참지 못하여 떨치고 일어설 줄 아는 의분의 사람이었습니다. 참으로 매력적인 인물입니다. 하지만 그도 완벽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충직한 장수인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취한 일이 그렇습니다. 한 순간 정욕에 사로잡혀 그는 큰 죄를 저질렀습니다. 간음죄에 살인죄까지 저질렀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하나님은 그를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회개하는 그에게 더 큰 섬김의 기회를 주셨고, 그는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사무엘하 마지막 부분은 다윗이 하나님께로 돌아갈 때가 된 것을 알고 자기의 살아온 날을 감사함으로 회고하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은총이 자기를 감싸안고 계셨음을 고백하면서 말합니다.

하나님이 나로 더불어 영원한 언약을 세우시고, 만사에 아쉬움 없이 잘 갖추
어 주시고 견고하게 하셨으니, 어찌 나의 구원을 이루지 않으시며, 어찌 나
의 모든 소원을 들어주지 않으시랴?(삼하23:5)

그는 내가 이런 업적을 남겼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다 하나님이 이루게 해주셨다고 고백합니다. 마음에도 없는 공허한 수사가 아니라 진정일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께 자기의 생명과 자기 후손들의 미래까지도 다 맡겼습니다. 그는 평안합니다.


'자기'가 살아날 때

그런데 느닷없는 허영심이 그를 사로잡습니다. 내가 얼마나 큰 일을 이루었나? 스스로 생각해도 장합니다. 영성(零星)했던 나라를 물려받은 후 40여 년 동안 나라가 참 많이 성장한 것입니다. 그는 확인해보고 싶었습니다. 갑자기 '자기'가 살아난 것입니다. 사무엘서 기자는 하나님이 그와 이스라엘 백성을 치시려고 그를 부추겼다고 전합니다. 하지만 역대기서 기자는 사탄이 그를 부추겼다고 말합니다(대상21:1). 어느 쪽이든 다윗은 부추김을 받아 해서는 안 될 일을 행합니다.

다윗은 요압 장군을 불러 백성들의 수를 파악해보라고 명령합니다. 이때의 인구조사는 전쟁이나 부역에 동원할 수 있는 사람들을 확인하려는 것도 아니고, 세금 징수를 목적으로 실시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그는 백성들의 수효가 늘어난 것을 확인함으로써 자기의 업적을 가늠해보고 싶은 것입니다. 사람들에게는 이런 충동이 있지 않던가요? 아파트 평수, 가격, 자동차의 배기량…이런 것들을 통해 우리는 스스로 중요한 사람으로 인정받으려 합니다. 교회조차도 그런 충동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교인 숫자와 경상비의 증감을 가지고 목회의 성공 실패를 가늠해보려는 풍토가 교회에도 있습니다. 150명 교인이 몇 년 새 8만 명이 되었다고 하면 '와, 대단한 양반인걸!' 하면서 우러러봅니다. 반면에 몇 십 년이 지나도 숫자에 변화가 없으면 겉으로는 안 그럴는지 몰라도 속으로는 '별볼일없는 사람이야!' 하면서 멸시합니다. 그런 숫자의 매혹이야말로 사탄의 계략인 때가 많습니다. 다윗은 숫자의 매혹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충직한 부하인 요압은 왕의 그런 마음을 꿰뚫어보고는 그 계획을 포기하도록 종용합니다. 그렇지만 한번 어긋난 마음을 되돌리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다윗은 역정을 내면서 그들을 내보냅니다.

요압을 비롯한 장군들이 인구조사를 하는 데 든 기간은 무려 아홉 달 스무하루였습니다. 그들이 파악한 숫자가 다윗의 마음을 흡족하게 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새로운 상황을 보여줍니다. 다윗은 인구 조사를 한 후에 양심의 가책을 받았습니다. 자기 마음에 숨어든 교만의 실체를 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시는 것 예닐곱 가지 중에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은 "교만"입니다(잠6:17). 그는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을 가로채려 했음을 자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깨달음이 항상 늦게 온다는 것이 인간의 비극입니다. 교만에 대한 벌이 없을 수 없습니다. 이튿날 아침 하나님은 선지자 갓을 보내셔서 다윗에게 선택을 하라고 하십니다. 일곱 해 동안의 흉년, 석 달 동안의 쫓김, 사흘 동안의 전염병이 그것입니다. 어느 것이 되든 백성들이 당하게 될 고통은 극심합니다. 지도자 한사람의 잘못이 백성 모두의 고통으로 바뀌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만 하면 됐다

그는 어느 것도 택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선택권을 하나님께 넘깁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땅에 전염병을 보내셨습니다. 전염병이 얼마 동안 계속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 기간이 얼마가 되었든 그 기간 동안 무려 7만 명이 죽었습니다. 보십시오. 다윗의 자부심의 근거인 백성들의 수가 하룻밤 사이에 이렇게 줄고 말았습니다. 인간의 업적이란, 풀에 핀 꽃과 같습니다. 동풍이 건듯 불면 시들어버리는 것입니다.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고전1:31)는 말씀이 떠오릅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아니고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는 우리입니다. 하나님을 거역함으로 얻는 세상의 영화는 모래 위에 지은 집과 같습니다. 7만 명의 죽음은 그것을 말해줍니다.

죽음을 가져오는 천사가 예루살렘 쪽으로 손을 뻗쳐서 그 도성을 치려는 순간 하나님의 명령이 내렸습니다. "그만하면 됐다. 이제 너의 손을 거두어라." 저는 오늘도 이 음성을 듣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진노하시다가도 뜻을 돌이켜 우리를 용서하십니다. 우리는 잘못된 선택으로 괴로움을 당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우리를 오래 참아주십니다. 때때로 매를 드시기도 하지만 언제나 "그만하면 됐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은총입니다. 뜻을 돌이키시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이지만 그래도 우리는 하나님께서 다윗을 어여삐 보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자기의 잘못된 행동이 낳은 이 비극적인 사태에 대해 진심으로 마음 아파합니다. 자기의 죄 때문에 백성들이 겪는 고통을 보면서 그는 하나님 앞에 엎드려 간구합니다.

바로 내가 죄를 지은 사람입니다. 바로 내가 이런 악을 저지른 사람입니다.
백성은 양 떼일 뿐입니다. 그들에게는 아무런 잘못도 없습니다. 나와 내 아
버지의 집안을 쳐 주십시오.(삼하24:17)


제단을 쌓으라

백성의 고통을 보면서 자기의 잘못을 시인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는 지도자, 어디 이런 지도자 없을까요? 분명 정치와 교육과 문화는 잘못되어가고 있는데도 제 탓입니다, 하면서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이들이 없습니다. 저들의 고통을 내게 대신 지워달라고 하는 지도자 말입니다. 하나님은 납작 엎드리는 이들에게는 약하십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긍휼히 보셔서 갓을 보내셔서 말씀하십니다.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 마당으로 올라가서, 거기에서 주께 제단을 쌓
으십시오.(24:18)

제단을 쌓으라는 말은 하나님이 용서하시기로 작정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아라우나의 타작 마당은 어디입니까? 하나님의 죽음의 천사를 가로막고 "그만하면 됐다, 이제 너의 손을 거두어라" 하신 곳입니다. 하나님의 용서의 은총이 내린 곳입니다. 자기의 잘못을 시인하고 회개하는 인간의 마음과 하나님의 자비가 만난 곳입니다. 아라우나의 타작 마당을 두고 학자들은 그곳이 여부스인들의 신당이 있던 곳이라고도 하고, 말 그대로 타작 마당이었다고도 합니다. 무엇이면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용서를 비는 인간의 진정과 인간을 긍휼히 여기는 하나님의 자비가 만나 평화가 이슬처럼 내린 곳입니다. 다윗은 아라우나로부터 타작 마당과 제물로 바칠 소를 사서 하나님께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예루살렘 성전은 바로 여기, 아라우나의 타작 마당 위에 세워졌다 합니다.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은 오늘 어디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제단을 쌓으라"고 하십니다. 지금 우리의 타작 마당은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과 인간의 화해를 위해 자기의 타작 마당을 기꺼이 내놓으려 한 아라우나는 어디에 있습니까? 바로 우리들이야말로 아라우나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가정, 학교, 교회, 일터야말로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교육이 무너지고 있고, 문화가 타락하고 있고, 국민들의 건강이 위협받고 있습니다. 이 땅을 휘몰아치고 있는 이 무질서와 책임전가와 부패의 전염병이 며칠 째 계속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간절히 하나님의 개입을 기다립니다. "그만하면 됐다" 하는 하나님의 음성이 듣고 싶습니다. 다윗과 같은 이가 필요합니다. 위대한 업적을 남긴 사람 말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자기 죄를 통회하는 겸손한 사람 말입니다. 오늘 주님은 우리가 바로 다윗과 아라우나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등 록 날 짜 1970년 01월 01일 09시 33분 21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