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13. 젖 뗀 아이처럼
설교자 김기석
본문 시131:1-3
설교일시 200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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젖 뗀 아이처럼
시131:1-3
(2001/4/1)


낙타, 사자, 어린이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짜라투스트라는 살아있는 정신은 세 가지 변화 과정을 겪는다고 말합니다. 첫째는 정신이 낙타가 되는 과정입니다. 살아있는 정신은 묻습니다. "무엇이 무거운가?" 그는 자기의 삶에 가장 무거운 것이 실리기를 기다리면서 낙타처럼 무릎을 꿇습니다. 그런데 짜라투스트라가 말하는 가장 무거운 짐은 우리가 생각하는 인생의 짐과는 다릅니다. 그에게 가장 무거운 짐은 자기 스스로를 낮추는 것이고, 자기가 얼마나 어리석은 자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정신은 그런 무거운 짐을 지고 자기의 사막으로 갑니다. 그곳에서 두 번째의 변화가 나타납니다. 여기서 정신은 사자가 됩니다. 사자는 백수의 왕입니다. 사자는 스스로 주인이 되려는 정신입니다. 남의 눈치를 보거나, 남을 추종하지 않고 자기의 원리에 입각해 살아가는 자유한 정신입니다. 그는 새로운 삶을 위해 스스로 자유를 창조합니다. 그 후에 마지막 변화가 나타납니다. 정신이 어린아이가 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는 부드럽습니다. 부드럽기에 어디에든 적응할 수 있습니다. 그는 순수합니다. 그래서 신성합니다. 인류의 이상은 어린아이가 되는 것입니다. 물론 혼이 죽어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변화도 없을 겁니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어린아이를 제자들 가운데 세우시고 말씀하셨어요. "누구든지 어린아이같이 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이 말씀도 아마 같은 맥락일 겁니다. 이때의 어린아이는 육체적 연령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을 말하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다고 하셨을 때 니고데모는 그 말씀을 오해했습니다. 그러니 이런 반문을 하지요. "늙은 사람이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까? 어머니 뱃속에 들어갔다 나오란 말씀입니까?"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은 정신의 거듭남이었습니다. 혼의 거듭남 말입니다.


믿음에 들어간 이의 노래

거듭나셨습니까? 거듭난 존재의 특징은 평안입니다. 그 평안은 하나님의 품에 안긴 이가 맛보는 평안입니다. 군대에 간 한성건 군이 100일 휴가를 받아 나왔는데요, 나를 보자마자 군인답게 인사를 하더군요. '선봉'이라는 우렁찬 구호와 함께 말입니다. 저는 대견하게 변한 성건이의 어깨를 두드려주다가 어머니에게도 그렇게 인사를 했냐고 물었지요. 그랬더니 어머니를 보면 그렇게 인사해야지, 하고 굳게 마음먹었는데 어머니를 보는 순간 구호는 어디로 가고 '엄마' 하고 부르게 되더래요. 그렇지요. 그게 정상이지요. 어머니 앞에 서면 군인은 사라지고 아들만 남는 겁니다. 어머니이신 하나님의 품에 안기면 평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에서 겪었던 풍랑이 어떠하든 말입니다. 요즘 우리가 가끔 부르는 노래 가운데 [믿음에 들어간 이의 노래]가 있습니다.

나는 시름없고나 이제부터 시름없다
님이 나를 차지하사 나를 맞으셨네
님이 나를 가지셨네 몸도 낯도 다 버리네
내거라곤 다 버렸네 어음

진실한 믿음은 안식의 세계입니다. 진실한 믿음은 하나님이 나를 차지하시도록 하는 것입니다. 내 거라고 생각하던 것을 버리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때문에, 나에게 이로웠던 것은 무엇이든지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빌3:7)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시인은 하나님께로 돌아간 영혼의 평안함을 "젖뗀 아이가 어머니 품에 안겨 있듯이 내 영혼도 젖뗀 아이와 같습니다"(2) 하고 노래합니다. 어머니의 심장 박동 소리를 들으며 젖을 먹는 아기를 생각해 보십시오. 아기의 눈은 엄마의 눈을 응시합니다. 엄마도 호수같이 맑은 아기의 눈을 사랑스레 바라봅니다. 젖을 먹이면서도 텔레비전만 바라보는 철없는 엄마가 없지는 않지만 말입니다. 아기와 엄마 사이에 무언의 교감이 일어납니다. 아기는 한없이 자기를 사랑하는 엄마의 사랑을 온 몸으로 느낍니다. 그리고 어느 결에 살포시 잠에 빠집니다. 염려도 근심도 시름도 없습니다. 참 맛있는 잠일 겁니다.


아기는 있는 힘을 다하여 잔다

시인 김기택은 그런 아기의 잠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아기는 있는 힘을 다하여 잔다. 부드럽고 기름진 잠을 한순간도 흘리지 않는다. 젖처럼 깊이 빨아들인다." 참 부럽지요. 또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남김없이 잠을 비운 아기가 아침 햇빛을 받아 환하게 깨어난다. 밤사이 훌쩍 자란 풀잎같이 이불을 차고 일어난다. 밤새도록 잠에 씻기어 맑은 얼굴, 웃음말고는 다 잊어버린 얼굴이 한들거린다." 푹 자고 일어난 아기의 청신(淸新)한 얼굴은 생명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무엄하게도(?) 시편의 시인은 아기들의 그 거룩한 평안함을 자기가 누리고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 어머니의 품안에서 말입니다. 그 비결은 무엇일까요? 잠을 못 이뤄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거나, 얕은 잠 속에서 허우적대다가 미열 속에서 깨어나곤 하는 우리들로서는 그의 비결이 무척이나 궁금합니다. 시인에게 한번 배워볼까요?


교만을 버리라

첫 번째 비결은 교만한 마음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만한 길에서 돌아서는 것입니다. 우리를 괴롭히는 것이 안팎에 많이 있지만 무엇보다도 심각한 것은 교만과 오만입니다. 교만은 "잘난 체하여 뽐내고 버릇이 없음"을 뜻합니다. 오만은 "젠 체하며 남을 업신여기는 태도가 있음"을 뜻합니다. 이것보다 더 큰 영혼의 질병이 없습니다. 문제는 자기가 잘난 줄 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다른 이를 업신여기는 마음이 나옵니다. 이런 마음에서는 생명의 물이 조금도 흘러나오지 않습니다. 최근에 저는 이사야에 나오는 한 구절을 읽으면서 깊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망대가 무너질 때에 각 고산, 각 준령에 개울과 시냇물이 흐를 것이다.
(사30:25)

그 속에 담겨있는 정치적인, 역사적인 의미는 여기서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이 말속에 담겨있는 속뜻을 저는 헤아려보려는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대하면서 가슴을 쳤습니다. '오늘 내 속이 이처럼 메마른 것은 내 마음에 높이 솟은 망대가 무너지지 않아서이구나. 내 속에 있는 교만이, 그리고 오만이 무너지지 않아서 그렇구나.' 그러나 교만을 버리기란, 오만을 버리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때때로 우리는 교만의 독소를 깨닫고 교만을 버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교만은 아무리 떨쳐버리려 해도 떨쳐지지 않는 그림자와 같습니다. 이것은 죄의 문제와 싸웠던 바울의 경험과 일맥상통합니다. 바울은 자기를 깊이 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탄식합니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
는 것을 보는도다"(롬7:22-23)

이것이야말로 요즘 아이들 말로 '엽기'입니다. 나를 붙잡아 죄의 법 아래 내동댕이치고 거기에 복종하게 하는 그 은밀하고도 끈덕진 죄에 지쳐서 그는 절규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롬7:24)

내 힘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죄와의 싸움에서 한두 번은 이길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루터의 노래처럼 "내 힘만 의지하면 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에 오셔야 합니다.「믿음에 들어간 이의 노래」에서처럼 '님이 나를 차지하셔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를 대신해서 싸우시는 전능하신 주님의 손길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망루가 무너져야 물이 흐릅니다. 지금 우리 마음이 피폐하다면 혹시 높이 세워진 망루가 없는지 돌아볼 일입니다.


과도한 욕심을 버리라

시인은 두 번째 비결을 가르쳐줍니다. 그는 자신은 "너무 큰 것을 가지려고 나서지 않으며, 분에 넘치는 놀라운 일을 이루려고 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어떻게 보면 너무 소극적인 삶처럼 보입니다. 우리는 큰 소리에 익숙합니다. 꿈을 크게 가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지레 자기에 대해서 절망하고 풀이 죽은 채 지내서야 말이 되겠습니까? 하지만 그 큰 꿈이라는 것이 문제입니다. 남보다 앞서고, 성공의 사다리 꼭대기에 남보다 먼저 오르기 위해 자기 발 밑에 누가 밟히고 있는지도 돌아보지 않는다면 문제입니다. 그는 이긴 것처럼 보이지만 졌습니다. 그는 우리 모두 하나님 앞에 서야 할 존재임을 잊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설 때 우리는 세상에서 이룬 업적을 가지고 나갈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무엇을 했는지가 중요합니다.

정말로 소중한 것을 위해서는 불굴의 용기를 가지고 나아가야 합니다. 불의에 저항하고, 시정을 요구하고, 모두가 함께 잘 살 수 있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부름 받은 우리들이 쭈뼛거리기만 해서야 되겠습니까? 그러나 남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사람이 되기 전에, 먼저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겨야 합니다. 그게 기본입니다. 너무 큰 것을 가지려고 나서지 않고, 분에 넘치는 놀라운 일을 이루려고 하지 않는다는 말은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긴 사람의 말입니다. 포기할 것을 포기할 때 우리 삶은 단순해집니다. 그리고 단순해져야 힘이 생깁니다. 심원한 것으로 인생의 근본을 삼고 간소함을 생활의 법도로 삼아야 합니다. 레기네 슈나이더가 쓴『새로운 소박함에 대하여』라는 책에는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소비는 인격의 표현이다…포기할 줄 아는 사람은 그 자신에 좀더 가까워진
다. 보다 본질적인 것의 의미를 음미할 수 있게 된다. 정말 중요한 것이 무
엇인가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소박함이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도록 스
스로 선을 긋는 능력이다.

포기할 줄 아는 사람이 그 자신에 가까워진답니다. 인생의 근본을 잃게 만드는 과도한 욕망에 대해 '아니'라고 말할 때 우리 삶에는 힘이 생깁니다. 생수가 흐릅니다. 감사가 넘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그분의 길을 걷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알게 됩니다. 물론 지금 당장 말할 수 없이 큰 괴로움 속에 있는 이들에게 이 말씀은 공허하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마음을 비우면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서 일을 시작하십니다. 망루가 무너져야 합니다. 내가 문제임을 인정하십시오. 그리고 도전하십시오. 나를 새롭게 하기 위해 애쓰십시오. 그러면 영적인 도움을 얻게 됩니다. 주님만이 우리를 고치실 수 있습니다. 주님께로 돌이키면 주님은 우리 속에 힘이 되는 생각을 심어주십니다. 우리를 북돋워주는 일을 일으켜 주십니다. 그것을 맛볼 때 우리는 비로소 엄마의 품에 안겨있는 젖뗀 아기들처럼 주님 안에서 참 평안을 맛볼 수 있습니다.

등 록 날 짜 1970년 01월 01일 09시 33분 21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