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14. 예루살렘, 서울,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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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눅19:41-44
설교일시 200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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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서울·교회
눅19:41-44
(2001/4/8)


거룩한 땅

예루살렘은 해발 850미터 높이의 구릉 위에 세워진 도시입니다. 계룡산의 정상인 천황봉이 845미터이니까 이 도시가 얼마나 높은 곳에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산자락이나 물가에 집을 짓지 않고 산꼭대기에 집을 짓고 살았습니다. 배산임수(背山臨水)를 좋은 삶의 조건으로 생각하는 우리의 관념과는 많이 다릅니다. 왜일까요? 그것은 팔레스타인 땅이 대대로 강대국들이 세력을 다투는 분쟁의 땅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관측과 방어에 유리한 둔덕에 도시를 건설하고 성을 쌓았는데 그것은 생존을 위해 불가피한 선택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을 세계산(世界山)으로 받아들였고, 시온산의 한가운데 우주목(宇宙木)이 설 것이라는 환상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예언자 다니엘은 땅의 중앙에 큰 나무 하나가 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나무는 점점 크게 자라서 하늘에 닿았고, 나중에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늘까지 닿는 나무가 서 있는 땅의 중심, 그곳이 예루살렘이었습니다. 지금도 유대교도들과 기독교도들 그리고 이슬람교도들이 조금도 양보 없이 분쟁을 벌이는 것은 그곳을 가장 거룩한 땅으로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 땅에 간다는 것은 참 가슴 벅찬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갈릴리에서 활동하시던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올라가실 때 비장한 각오를 하셨던 것 같습니다. 누가복음 9장 51-52절은 이렇게 전합니다.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
하시고 사자들을 앞서 보내셨다.

예루살렘에 가는 데 왜 이처럼 굳은 결심이 필요한 것이지요? 여행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요? 좀처럼 시간을 내기가 어려워서 큰맘을 먹어야 했던 것일까요? 이 문제에 답하기 위해서는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시선을 먼저 살펴야 합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단순히 사람이 필요에 따라 세운 물리적인 실체로 보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마치 인격을 가진 존재인 양 부릅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눅13:34)


자기 배신의 땅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맹목적으로 찬양하지 않습니다. 그곳에 성전이 있다고 하여 무조건 거룩한 곳으로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 예루살렘은 오욕(汚辱; 남의 명예를 더럽히고 욕되게 함)의 땅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기 배신의 땅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파송을 받은 선지자들이 종교 권력가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순교의 땅이었던 것입니다. 민주화를 위해 몸을 바쳤던 이들에게 1980년의 광주가 그냥 도시일 수 없는 것처럼, 예수님께 예루살렘은 그냥 땅덩어리일 수 없었습니다. 그곳은 아픔의 땅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예루살렘에 들어오신 예수님은 성을 보시면서 비통한 눈물을 흘리고 계십니다. "평화의 성읍"이라는 뜻을 가진 예루살렘이 정작 평화에 관한 일에 눈이 감겨있음을 안타까이 여기신 것입니다. 이름(名)과 실제(實)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 참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도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으면서 성도답지 못한 것, 기독교인이라 하면서 그리스도와 무관하게 사는 것…. "∼답지 못한 삶"은 얼마나 안쓰럽습니까? 예수님은 지금도 여전히 분쟁이 끊이지 않는 예루살렘을 보시면서 울고 계실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아름다운 돌과 순례자들이 바친 헌물로 화려하게 장식된 성전을 가리키면서 경탄했을 때 예수님은 "날이 이르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눅21:5-6)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꼭 이렇게까지 심술궂게 말씀하셔야 했을까요? 예수님은 그 화려한 성전의 외양에 감탄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의 눈은 성전 체제의 속을 향하고 계십니다. 대체 예수님이 이처럼 예루살렘에 대해, 그리고 성전 체제에 대해 비관적이신 까닭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당시의 성전 체제가 너무 타락해 있었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습니다.


타락한 성전 체제

성전의 중심이 누구이지요? 대제사장이지요? 그들은 하나님을 향하여서는 백성들의 죄의 짐을 지고 서있고, 백성을 향하여서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들고 서있는 존재입니다. 하나님과 사람의 경계선이 그의 자리입니다. 그는 늘 깨어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당시의 대제사장을 임명하는 것은 로마의 총독이었습니다. 대제사장이 되고 싶은 사람들은 공공연히 총독에게 돈과 뇌물을 바쳤습니다. 가장 거룩한 성직을 돈을 주고 사려 한 것입니다. 저는 오늘 우리의 현실에 대해서는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말하지 않더라도 우리가 너무나 잘 알기 때문입니다. 돈을 주고 성직을 산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옳게 받들기 바란다면 그것은 푸른 나무에 가서 물고기를 구하는 것(緣木求魚)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런가 하면 백성들의 대의기관이라 할 수 있는 산헤드린은 부유한 사두개파 사람들이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가난하고 병들고 억압받는 사람들, 주변으로 내몰린 사람들을 위하기보다는 자기들의 경제적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 법을 집행했습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도 아니고, 역사의 흐름도 아니었습니다. 오직 자기 이익만이 중요했습니다. 이 대목도 오늘의 정치 현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성전은 어떻습니까? 앞에서 누가 성전의 위용을 보고 놀랐다고 말했는데, 헤롯이 재건한 그 성전은 참 아름답게 지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 아름다운 성전의 건축을 위해서 가뜩이나 가난했던 유대의 민중들이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뤘는지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과중한 세금을 바치고, 강제 노동에 동원되고…물론 성전이 세워진 다음에 예루살렘은 성전에서 받는 성전세와 순례객들이 떨궈놓고 가는 돈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가난한 이들에게로 돌아간 일은 없습니다. 오히려 성전은 가난한 이들을 더욱 가난하게 만들었습니다. 성전 관리자들은 가난한 이들에게 비싼 이자로 돈을 대부해주고 채무 기록을 보관하고 있다가 기한이 되어도 갚지 못하면 그들이 가지고 있던 토지를 몰수하기도 했습니다.

성전은 더 이상 백성들에게 안식을 주고 평안을 주고, 희망을 주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그곳은 어떤 의미에서 민중들의 고혈을 짜내는 착취의 본거지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채찍을 휘둘러 성전을 정화하신 것은 성전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행위를 금하신 것으로만 보면 안 됩니다. 예수님은 성전 체제 자체를 부정하고 계십니다. 성전을 보고 "너희는 만민이 기도하는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질타했던 예수님의 음성이 제 귀에 쟁쟁하게 들려옵니다.


채찍, 혹은 미소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을 기념하는 이 종려 주일 아침, 우리가 편안하게 그날을 기억하는 것은 그것이 '과거의 사건'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닌가요? 지금 주님이 이 서울에 오신다면 뭐라고 하실까요? 어느 교우는 예수님이 서울을 보고 우실 거라고 하시더군요. 서울의 밤하늘에 붉게 밝혀진 십자가가 예수님의 무덤처럼 보일 거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세워졌으나 주님의 혼을 잃어버린, 그리고 주님의 사랑을 잃어버린 교회 때문에 지금도 주님은 울고 계신지도 모릅니다.

이 숨막히는 서울 거리에서, 그리고 수많은 교회의 숲 속에서 주님은 머리 두실 곳을 찾고 계십니다. 삭개오에게 하셨던 것처럼 주님께서 우리에게 "내가 오늘 네 집에 머물러야겠다" 하시면 얼마나 좋을까요? 오늘 우리 교회에, 그리고 우리의 가정에 주님은 채찍을 들고 오실까요? 아니면 기쁨의 미소를 짓고 오실까요?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죽음을 무릅쓰고 하나님의 뜻을 세우려는 장한 각오가 빚어낸 사건이었습니다. 주님은 그 대열에 진심으로 동참할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우리 모두가 그 대열에 기쁜 마음으로 참여하기를 기원합니다.

등 록 날 짜 1970년 01월 01일 09시 33분 21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