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15. 성 금요일과 부활절 사이
설교자
본문 사11:6-9
설교일시 200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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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금요일과 부활절 사이
이사야 11:6-9
(2001/4/15, 부활절)


논개와 예수

이 부활절 아침에 저는 엉뚱하게도 임진왜란 때 죽은 기생 논개(論介)를 떠올립니다. 진주성이 함락되자 관기(官妓)였던 논개는 진주 남강의 촉석루에서 깍지 낀 손으로 적장의 목을 껴안고 물로 뛰어들었습니다. 논개의 그 죽음은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던 사람들의 가슴 속에 희망과 용기의 불을 질렀습니다. 그래서 수주 변영로 선생은 논개를 기려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불붙는 정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 [논개] 부분

저는 이 대목을 읽으면서 예수님을 생각합니다. 인류의 영원한 질곡인 '죄'의 목을 껴안고 '죽음'의 강물에 뛰어든 예수님 말입니다. 죄의 물결 위에 뿌려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흐르고 흘러 우리 가슴 속에서 '구원의 꽃'으로 피어나고 있습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속삭이십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다.(요14:13)


하늘을 떠받치는 기둥

죄의 목을 껴안고 죽음에 뛰어드신 예수님을 하나님이 다시 살리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생명이 결코 죽을 수 없음을, 십자가의 길이야말로 생명으로 통하는 문임을 보여줍니다. 긴 겨울이 지나고 봄 바람이 불어오면 움추러들었던 생명은 깨어납니다. 깨어나 가장 아름다운 생명의 노래를 부릅니다. 시인 정현종은 봄 풀잎을 보면서 생명의 강함을 깨닫습니다.

파랗게, 땅 전체를 들어올리는
봄 풀잎,
하늘 무너지지 않게
떠받치고 있는 기둥
봄 풀잎
-정현종, [파랗게, 땅 전체를] 부분

시인은 그 여리디여린 봄 풀잎이 하늘을 든든하게 떠받치고 있다고 말합니다. 지각을 뚫고 나오는 새싹을 통해 시인은 땅을 들어올리는 거대한 힘을 봅니다. 그 풀들은 일어나 하늘을 떠받치는 기둥이 됩니다. 풀이 강해서가 아닙니다. 풀을 깨어나게 한 봄 바람, 곧 하나님의 은총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경험한 이들에게 죽음은 없습니다. 육신의 죽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육신의 생명이 다해도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 안에서 계속됩니다. 부활을 믿는 이들은 더 이상 비겁한 사람일 수 없습니다. 무책임한 사람일 수도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겨주신 책임을 기꺼이 짊어지려고 합니다.


부활의 꿈

주님이 우리에게 맡겨주신 책임은 무엇일까요? 이 세상이 부활의 꿈을 잃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참으로 복잡합니다. 그리고 어둡습니다. 밝고 화려한 문명의 뒤안길에는 어둡고 착잡한 현실이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 병든 사람들,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이들, 노숙자, 희망을 박탈당한 사람들, 따돌림받는 사람들, 무자비한 폭력에 유린당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신음소리 때문에 세상은 평화로울 수 없습니다. 이사야는 그런 세상 한복판에서 꿈을 꾸었습니다.

이리가 어린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꿈입니다. 어찌보면 가장 어리석어 보이는 꿈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꿈이야말로 부활을 믿는 이들이 깨지 말아야 할 꿈입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는 모든 사람이 피부색이나 인종, 더 나아가 종교에 따라 차별받지 않는 세상을 꿈꿨습니다. 마더 테레사는 모든 사람들이 서로를 아름답게 섬기는 세상을 꿈꿨고, 그 꿈을 온 몸으로 살다가 하나님 곁으로 가셨습니다. 그들은 다 여리디여린 풀잎들입니다. 하지만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기둥들입니다. 우리들의 가슴 속에 잉걸불처럼 타오르는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꿈이 있다면, 그리고 그 꿈이 우리의 삶을 통해 조금씩 구현된다면 하나님은 영광받으실 것입니다.


성 금요일과 부활절 사이

지금 우리의 현실은 성 금요일과 부활절 사이에 있습니다. 예수님을 가뒀던 무덤이 새 생명을 잉태한 자궁이었던 것처럼, 우리는 지금 새로운 세상을 잉태한 사람들로 하나님 앞에 있습니다. 물론 평화를 원하는 절대 다수의 꿈이 힘있는 나라와 사람들에 의해 짓밟히고 있습니다. 자국의 이익을 내세우면서 힘으로 세상을 뒤흔들려는 미국, 군국주의의 망령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역사의 수레바퀴를 뒤로 돌리려는 일본을 우리는 염려스럽게 바라봅니다. 하지만 우리는 부활의 첫 열매이신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생명은 죽을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열어놓으신 길을 따라 나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생명과 평화를 위해 일하다가 쓰러진다 해도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이 벌떡 일어나 그 일을 계속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결코 중단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가장 약한 풀잎이 하늘을 받치는 기둥인 것처럼, 우리는 약할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세상을 아름답게 바꾸기 원하십니다. 성 금요일과 부활절 사이에서 살면서 끊임없이 부활의 꿈을 일깨우는 참 멋진 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등 록 날 짜 1970년 01월 01일 09시 33분 21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