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17. 피의 소리를 듣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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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롬5:6-11
설교일시 200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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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의 소리를 듣는가?
롬5:6-11
(2001/4/29)


식어버린 아궁이

어쩌다 어린 시절 내가 살던 시골집에 가면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변해버린 고향 산천이 낯설기 그지없고, 절친한 벗 하나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이 나의 쓸쓸함을 부채질합니다. 10명쯤 되는 식구들이 북적거리던 그 집에는 지금 아주머니 혼자 살고 계십니다. 집도 많이 개조했습니다.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비워두었던 사랑방을 개조해 원룸처럼 꾸몄습니다. 난방도 석유 보일러로 바꿨고, 집안에 수세식 화장실도 마련했습니다. 많은 식구들이 복닥거리던 안방은 텅 비어 고요만이 주인처럼 버티고 있습니다.

우리 형제자매들이 어머니, 아버지의 기일이 되어 시골에 가면 불현듯 그 집은 생기에 가득 찹니다. 우리가 제일 먼저 하는 일은 가마솥이 걸려있는 재래식 부엌에 들어가 불을 지피는 일입니다. 검게 그을려 있으면서도 불기 없이 차갑고 황량하기만 한 아궁이는 참 스산한 풍경입니다. 하지만 그 아궁이에 솔잎을 불쏘시개로 삼고, 나뭇가지를 잘라 넣어 불을 지피면 아궁이는 되살아납니다. 나무 타는 냄새가 그윽히 나고, 타닥타닥 나무 타는 소리가 나기 시작하면 어느 결에 그 부엌은 사람 사는 공간이 됩니다. 식구들은 다소 들뜬 표정으로 부엌으로 펌프장으로 들락거리면서 음식을 장만합니다. 말은 안 하지만 모처럼 우리가 가족임을 확인하는 순간입니다. 불을 지핀 아궁이는 우리가 일어버렸던 옛 정서를 되찾게 해주는 것입니다. 저는 때로 나 자신이 싸늘하게 식어버린 아궁이가 아닐까 싶어 안타까워합니다.


핏기 없는 얼굴

간혹 저를 보는 분들이 얼굴 색이 좋지 않다고 걱정들을 해주십니다. 제가 봐도 그다지 좋아 보이지는 않습니다. 이발소에 가도 저는 거울에 비친 이발사 아저씨와 저의 얼굴빛을 가만히 대조해 봅니다. 거울에 비친 핏기 없어 누런 제 얼굴이 참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그래서 화색이 도는 얼굴을 보면 참 부럽습니다. 아기들의 발그스레한 얼굴이 얼마나 예쁜지 몰라요. 화색이 도는 얼굴은 생명력이 넘쳐 보입니다. 하지만 화색이 없는 얼굴은 생명력이 부족해 보입니다. 가까이 하기 어렵습니다.

옛 사람들은 피 속에 생명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율법은 짐승을 먹더라도 피 채 먹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피는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만 바쳐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형제를 보고 '바보'라고 하는 자는 살인자라고 하셨습니다. 좀 극단적으로 들리기는 합니다만 이 말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모욕을 받거나 당황하면 얼굴에 핏기가 없어지지 않아요? 예수님은 누군가의 얼굴에서 핏기를 빼앗아가는 것을 간접 살인 행위로 보셨나 봅니다. 우리는 오늘 누군가의 삶에서 핏기를 빼앗으며 살지는 않는지요? 우리가 이웃들에게 희망이 되지 못하고, 즐거움이 되지 못하고, 생명력을 선사하지 못한다면 참 부끄러운 일입니다.


핏기 없는 신앙

핏기 없는 얼굴도 걱정이지만, 정작 우리가 걱정해야 하는 것은 핏기 없는 신앙입니다. 화색이 돌지 않는 신앙 말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귀중한 보혈이 우리를 구속한다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고백의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피를 거의 신화화합니다. 그 핏속에 뭔가 신비한 것이라도 있어서 우리의 죄를 다 닦아내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피는 얼룩이나 흔적을 지우는 화학약품처럼 마술적인 것이 아닙니다.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피는 곧 생명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피는 곧 예수님의 생명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피가 우리 죄를 구속한다는 말은 그분의 삶과 죽으심이, 또 그분의 가르침이 우리를 구원한다는 말입니다. 예수의 피를 그분의 삶과 분리시키면 안 됩니다.

히브리서는 말합니다.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9:22). 이 말은 깊은 역사적 통찰을 담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치 있는 것들은 누군가의 피흘림을 통해 왔습니다.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말이 있습니다만, 이 땅의 민주주의를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렸습니다. 억울하게 흘려진 피는 침묵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개입을 요구합니다. 하나님은 형제인 아벨을 살해한 가인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창4:10). 죽은 자는 말이 없지만, 흘려진 피는 무엇인가를 말합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께서 흘리신 피가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한다"(12:24)고 말합니다. 아벨의 피는 정의를 요구하지만, 예수님의 피는 화해와 용서를 탄원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피를 주소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뿌려진 예수님의 피는 뜨겁습니다. 그 뜨거운 피가 우리를 구속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인간이 처해 있는 상황을 세 가지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1) 무기력함(powerless, 6절)
2) 죄인(sinner, 8절)
3) 하나님의 원수(God's enemy, 10절)

죄와의 싸움에서 항상 맥없이 넘어지곤 하는 우리 자신을 생각해보면 이 말이 빈말이 아님을 알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우리의 그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스스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생명이 얼마나 역동적일 수 있는지를 보이시고, 죽어도 죽지 않는 생을 보이시고, 어떤 경우에도 포기할 수 없는 사랑을 가르치시고, 하나님과 화해한 생의 아름다움을 보이시기 위해서 사셨고, 또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삶과 죽으심은 우리에게 언제나 강력한 메시지가 되어 다가옵니다. 그 소리를 듣고 사시는지요?

예수님의 뜨거운 피가 우리를 살게 합니다. 그 피가 우리 속에 있는지요? 사람들은 환하게 피어나는 꽃을 보며 아름답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꽃들은 시들고 맙니다. 하지만 세월이 가도 시들지 않는 꽃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피 꽃입니다. 그 피 꽃이 우리 가슴에 피었습니까?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피를 수혈 받지 못했습니다. 예수의 피가 마음속에 흐르지 않는다면 우리는 여전히 외인(外人)입니다. 겉모습만 기독교인이라고 해서 다 기독교인인 것은 아닙니다. 예수의 피로 뜨거워진 기독교인이라야 진정한 기독교인입니다. 이용도 목사님은 피를 달라고 주님께 기도합니다.

"우리는 눈물도 말랐거니와 피는 더욱 말랐습니다. 그래서 무기력한 빈혈 병자가 되었습니다. 피가 없을 때는 기운이 없고, 맥 없고, 힘 없고, 담력 없고, 의분 없고, 화기 없고 생기가 없습니다. 그 대신 노랗고, 겁많고, 쓸쓸하고, 소망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피를 주사해 주소서. 그래서 우리는 새 기운을 얻고 화기와 생기 있고 기쁨이 있게 하옵소서. 우리는 죄에게 잡히어 죽어 가되, 그 죄와 더불어 싸울만한 피가 없습니다.
악마가 우리 인간을 유린하되, 그것을 분히 여기는 피가 없습니다. 주여, 우리에게 당신의 피를 주사해 주옵소서. 그래서 죄악과 더불어 싸우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영혼이 원수 마귀를 격파하게 하여 주옵소서. 피가 있게 하소서. 피가 없으면 죽은 사람―우리에게는 피가 없어요. 주여, 우리는 기어이 죽게 되었나이다.
당신의 십자가에 흘리신 피로써 우리에게 주사해 주옵소서."


투사 기독교인

피가 없으면 죽은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피가 우리 속에 없으면 우리는 죽은 기독교인입니다. 예수님의 피가 우리 속에 있으면 우리는 겁 많고 소심한 삶을 벗어나게 됩니다. 이용도 목사는 주님의 피를 주사해 달라고 기도합니다(예수님의 피는 o형인가 봅니다. 누구에게나 줄 수 있으니 말입니다). 주님의 피가 우리 속에 흐르면 생명의 화기가 감돌고, 그 생명의 기운이 우리를 내몰아 죄의 유혹과 싸우게 합니다. 화색이 도는 까닭은 용서함을 받은 이가 누리는 평온함 때문입니다. 주님을 영접한 이들은 자기 속에 있는 마음의 풍랑이 잠잠해졌음을 발견합니다. 그의 얼굴은 고요하고, 평온합니다. 그러나 그 평온함은 창백한 정적이 아니라 어떤 풍랑도 무너뜨릴 수 없는 태산같은 고요함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존재가 된 이들은 하나님의 뜻을 가로막고 있는 것들과 싸웁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기에게 나아오는 예수님을 보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1:29) 했습니다. 그런데 공동번역은 이 대목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 저기 오신다." 예수의 피는 우리의 죄를 씻어내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휘몰아 세상의 죄를 없애는 일에 역동적으로 참여하도록 합니다. 예수적인 삶을 살게 합니다. 성도는 어떤 경우에도 '좋지요, 좋지요' 하는 무골호인이 아닙니다. 좀처럼 분노할 줄 모르는 얼굴 노란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투사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세상과 맞서 싸웁니다. 세상의 불의와 싸우고, 우리를 지배하는 미움과 이기심과 비겁과 나약함과 싸우게 합니다. 예수님의 뜨거운 피는 우리를 사랑의 사람, 역사를 변혁시키는 사람이 되게 합니다.


하나되게 하는 삶

예수님의 뜨거운 피는 우리에게 말합니다. 모든 나누인 것들을 하나로 만들기 위해 목숨을 걸라고 말입니다. 분단을 사주하는 악마의 계교에 맞서라고 말입니다. 영어로 구속을 뜻하는 단어는 'atonement'입니다. 이것을 분해해보면 재미있습니다. 이 단어는 '∼을 향한다, 겨눈다는 뜻의 at'와 '하나를 뜻하는 one' 그리고 '동사에 붙어 결과를 나타내는 명사를 만드는 ment'가 결합된 것입니다. 하나되게 하는 것이 곧 구속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과 사람이 화해하고, 사람과 사람이 화해하고, 사람과 세상이 화해하는 세상, 바로 그런 세상을 열기 위해 예수님은 당신의 생명을 바치셨습니다. 그를 믿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담을 쌓는 사람이 아니라, 다리를 놓는 사람으로 사는 사람이라야 예수의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용도 목사님처럼 우리에게 '피를 주소서' 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 피가 있어야 우리가 삽니다. 교회가 삽니다. 우리 사회가 살아납니다. 여러분은 지금 그 피의 소리를 듣고 계십니까? 주님의 뜨거운 피가 우리 모두의 가슴속에 넘치기를 기원합니다.

등 록 날 짜 1970년 01월 01일 09시 33분 21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