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18. 사랑의 나무에 물을 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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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요13:34-35
설교일시 200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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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나무에 물을 주라
요13:34-35
(2001/5/6)


로즈마리

제 사무실에는 로즈마리라는 허브 화분 하나가 있습니다. 일전에 나오미 선교회가 화분을 사오실 때 하나 가져다주신 것인데요, 저는 매일 아침 사무실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로즈마리를 쓰다듬어 줍니다. 그때마다 로즈마리는 자기 속에 있는 그 청량한 초록빛 향기를 마음껏 드러냅니다. 저는 코를 가까이 대고 그 향기를 깊이 들이마십니다. 머릿속까지 시원해지는 느낌입니다. 가끔씩 로즈마리가 누렇게 변색되지 않았나 살펴보기도 합니다. 시들한 것 같으면 화분의 흙을 만져봅니다. 물기가 있나 보는 것이지요. 그리고는 시원한 물을 부어줍니다. 물을 마시고, 그 물을 시원한 향내로 바꾸는 솜씨를 조금은 부러워하기도 합니다.

어느 날 로즈마리 화분에 물을 주다가 '내 속에 있는 사랑 나무에도 이렇게 물을 주어야 하는 데' 하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나무와 같습니다. 날마다 물을 주고, 정성을 다해야 점점 자라고 꽃이 피도록 되어있습니다. 돌보지 않으면 꽃을 볼 수 없습니다. 교회 마당가에 심겨있는 모란을 보셨는지요? 꽃봉오리를 많이 맺고 있길래 소담한 모란을 넉넉히 즐길 수 있겠구나 했는데, 겨우 세 송이를 피우고는 시들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지력이 약해 꽃을 피울만한 양분을 얻지 못했던 것입니다. 채 피어나지도 못하고 시들어버린 꽃봉오리들을 보면서 마음이 많이 불편했습니다.


사랑의 나무

우리는 사랑에 관해 참 많은 이야기를 합니다. 바울은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고전13:13)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라야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그런데 사랑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과 훈련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속에는 사랑의 나무만 자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에 대한 미움과 분노의 나무도 함께 자라고 있기 때문입니다. 미움과 분노의 나무에 비하면 사랑의 나무는 약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우리는 화내고 불평하고 투덜거리는 일에는 능숙하지만, 사랑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사랑이 담긴 말을 건네고, 사랑의 마음으로 세상을 대하는 일에는 미숙합니다. 그러다보니 우리 속에 있는 사랑의 나무는 점점 시들고 있습니다. 사랑의 능력이 점점 위축되고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미움이나 분노가 가져오는 부정적인 결과를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미워함으로써 세상이 아름다워질 수 있다면 세상은 벌써 살만한 곳이 되었을 것입니다. 누군가에 대한 분노를 키워나감으로써 내가 행복할 수 있다면 우리는 이미 행복한 사람일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압니다. 우리가 행복을 느끼는 것은 미움과 분노의 마음을 몰아내고 사랑의 마음을 우리 속에 끌어들일 때임을 말입니다. 예수님은 미움의 세상에 사랑을 끌어들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사랑의 사람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믿음이란 결국 서로를 깊이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기에 말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人格·品格·會格

우리 교회가 설립된 지 72년이 되었습니다. 일흔 두 해째 우리가 이곳에 있다는 것은 우리를 통해 하나님이 하시려는 일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뜻일 겁니다. 바울은 교회를 가리켜 그리스도의 몸이라 했습니다. 이 말은 우리의 몸이 머리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것처럼, 교회는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뜻을 받들어 행하는 것으로 존재 이유를 삼는다는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뜻을 제대로 알고 사느냐 입니다. 사람이 마땅히 갖추어야 할 마음의 통일성을 가리켜 人格이라 합니다. '사람 人'과 '이르다, 오르다 格'이 결합된 말입니다. 인격은 어쩌면 사람이 마땅히 이르러야 할 지점, 혹은 올라가야 할 곳을 가리키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에게 인격이 있다면 물건에는 '品格'이 있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교회도 마땅히 이르러야 할 목표가 있습니다. 그것을 억지로 '會格'이라고 해 볼까요? 만일 그런 것이 있다면 '회격'은 그리스도를 얼마나 닮았느냐 일 것입니다. 교회 크기, 예산, 프로그램이 문제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과연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만남과 예배와 실천의 중심이신가 입니다.


교회로 부름을 받은 까닭

그리스도가 계신 곳은 어디나 미움과 분노는 줄어들고, 사랑은 늘어났습니다. 오늘 우리 속에 그리스도가 오시면 우리는 사랑의 사람으로 변화할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청파교회라는 사랑의 나무를 키우는 이들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할 일이 뭐가 있겠느냐고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모두 나눌 수 있는 소중한 선물들을 가지고 이곳에 오셨습니다. 그것을 바치십시오.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덩이로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배불리 먹은 기적은 한 아이의 '연민'(compassion)에서 시작되었음을 아시지요? 그 아이는 굶주린 사람들의 처지를 자기의 아픔으로 여겼고, 그 아픔에 감응했기에 홀로 그 음식을 먹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굶주린 이들을 기억하며 홀로 배부르기를 포기한 그 마음이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물론 그 아이가 바친 것은 수많은 군중의 배를 채워주기에는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 아이의 '마음'을 받으셨고, 그 마음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여 기적을 낳았던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큰 일을 하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작은 일에 충성하라고 하십니다. 우리의 말 한 마디가, 우리의 몸짓 하나 하나가 사랑에서 비롯된 것일 때 그것은 교회라는 사랑의 나무를 키우는 아름다운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과거에 우리가 무엇을 해왔는가도 물론 중요합니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오늘입니다. 갈수록 분주해지고, 각박해지는 세상에서 우리가 교회로 부름을 받은 것은 '사랑'은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것을 삶으로 증언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섬김과 돌봄과 사랑을 통해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워질 수 있는지를 경험하고, 또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교회 안에서 먼저 사랑의 기적을 체험해야 합니다.

봄이면 둥치 큰 나무에 가녀린 새순이 돋아납니다. 저는 그것을 볼 때마다 생명의 기적을 보는 듯해 가슴이 찡해집니다. 그 새순은 어미 나무의 양분을 먹고 돋아나고, 어미 나무는 그 돋아난 새 순 때문에 성장합니다. 교회는 나무를 닮아야 합니다. 어른들과 아이들이 조화를 이루고, 오래 믿은 이들과 처음 믿은 이들이 사랑 가운데 협력하고, 교회의 오랜 역사가 우리를 지탱해주고 새로운 요청에 응답하려는 오늘의 열정이 우리를 밀어 올릴 때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성장할 것입니다. 오늘 장로로 취임하는 구성실 장로님, 그리고 그리스도의 지체들인 여러분, 우리 모두 서로에게 속해 있는 생명임을 깊이 명심하면서, 청파교회라는 사랑의 나무에 물을 주기 위해 최선을 다하십시오.

등 록 날 짜 1970년 01월 01일 09시 33분 21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