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26. 잔치 속 장례식
설교자 김재흥
본문 마 26:6-13
설교일시 2014/06/29
오디오파일 s20140629.mp3 [7431 KBytes]
목록

마태 26:6-13
그런데 예수께서 베다니에서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는, 음식을 잡수시고 계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었다. 그런데 제자들이 이것을 보고 분개하여 말하였다. “왜 이렇게 낭비하는 거요? 이 향유를 비싼 값에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줄 수 있었을 텐데요!” 예수께서 이것을 보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왜 이 여자를 괴롭히느냐? 그는 내게 아름다운 일을 하였다. 가난한 사람들은 늘 너희와 함께 있지만, 나는 늘 너희와 함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여자가 내 몸에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치르려고 한 것이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온 세상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한 일도 전해져서, 그를 기억하게 될 것이다.”


주일 아침, 새로운 삶을 꿈꾸며 주님의 전을 찾아 나온 여러분 모두에게 좋으신 주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소망과 기운이 가득하시길 바랍니다.

• 외면당한 고통
지난 주 21일(토)에 강원도 고성의 GOP(일반전초)에서 총기난사사고가 있었습니다. 그로인해 5명의 젊은이들이 귀한 목숨을 잃었습니다. 한 젊은이가 같은 부대원들을 향해 총을 쏘았습니다. 이후 도주하던 그는 끝내 자신을 향해서도 총을 쏘았습니다. 총알은 가슴과 어깨 사이를 관통했고 그는 병원으로 후송되어 치료 중에 있습니다. 왜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이 땅에서 끝없이 반복되어야 하는 것일까요.
어떤 이는 그 젊은이는 애초부터 군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했고 그래서 부대원들에게 따돌림을 당하다 일어난 일이라고 말합니다. 또 어떤 이는 이 사고를 단지 개인적인 차원의 문제로만 보면 안 되고 군의 구조적인 문제로 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사고를 일으킨 젊은이는 병상 진술에서 부대원들이 자신을 비하한 것에 격분해서 총을 쏘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우발적인 원인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평소 사람들이 자신을 선임으로 대우해주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누구라도 자신의 상황이라면 힘들었을 것이라고, 그들도 잘못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의 행동은 결코 정당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무리 힘들었어도 그 누군가를 향해 방아쇠를 당겨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타인을 향해서든 자신을 향해서든. 그러나 그가 느꼈을 고통과 외로움에는 공감이 갑니다. 누군가에게 외면당한다는 것, 그것도 같이 생활하는 사람들에게 지속적으로 외면당한다는 것은 그 누구에게든 견디기 힘든 고통이니까요.

유월절은 이스라엘 최대의 명절입니다. 애굽에서의 탈출과 구원을 경축하는 절기로 온 이스라엘 민족이 7일간 큰 축제를 벌입니다. 예수님께서 3년의 공생애를 보내시고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시던 유월절은 그 어느 유월절보다 분위기가 들떠있었습니다. 이미 민중들 사이에서는 예수님이 메시아로 소문이 나 있었고, 예수님의 제자들도 이번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성에 들어가시면 높은 자리에 오르실 것이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중 가장 가까운 제자들이라고 할 수 있는 야고보와 요한은 예루살렘 입성을 앞두고 예수님께 찾아와 청탁을 합니다. “선생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 하나는 선생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선생님의 왼쪽에 앉게 해 주십시오.”(막10:37) 이에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고,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내 오른쪽과 내 왼쪽에 앉는 그 일은, 내가 허락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정해 놓으신 사람들에게 돌아갈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을 하실 때의 예수님의 표정을 생각해봅니다. 많이 어둡고 착잡하셨을 것 같습니다. 야고보와 요한, 그들은 예수님께 어쩌면 제자 그 이상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더불어 야고보와 요한을 특별하게 생각하시고 가까이 대하신 장면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중요한 장소에 가실 때면 다른 제자들은 그대로 놓아두시고 이 세 사람과만 동행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친구처럼 생각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만의 착각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친구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가까움’을 청탁을 위해 이용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혼신의 힘을 다해 이루신 제자들과의 동거동락은 제자들에 의해 동상이몽이 되어버렸습니다. 같은 길을 가는 줄 알았던 제자들은 다른 꿈을 꾸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이런저런 자리에서 제자들을 향해 세 번이나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셔서 당하게 될 고통과 아픔을 이야기하셨습니다. “보아라, 우리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넘어갈 것이다. 그들은 인자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이방 사람들에게 넘겨줄 것이다.”(막10:33) 불평즉명(不平則鳴), 마음에 불편함과 불안이 쌓이면 말하게 되어 있는 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고통과 아픔을 제자들에게 반복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런 예수님의 아픔은 제자들에게 외면당했습니다. 제자들이 보았을 때 스승은 어려움과 힘듦을 느끼면 안 되는 존재며, 행여 힘들고 어렵더라도 스승은 그것을 제자들에게 말하면 안 되는 것이라고 상정해 놓았기에 제자들은 예수님의 고통과 아픔을 어느 정도 알면서도 애써 외면하고 자기들의 욕망에만 집중했는지도 모릅니다.

• 복음의 핵심
드디어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시게 됩니다. 예상했던 바와 같이 온 민중은 환호했습니다. 새끼 나귀를 타고 오시는 메시아를 위해 자기들의 겉옷을 깔아드렸고 나뭇가지를 흔들며 ‘구하여 주십시오! 호산나!’ 외쳤습니다. 온 성이 들썩거렸습니다. 그 기세가 얼마나 대단했던지 평소 예수님을 적대하며 이번 유월절을 이용해 예수님을 해코지하려던 바리새인들 마저, “이제 다 틀렸소. 보시오. 온 세상이 그를 따라갔소.”(요12:19)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유월절 축제가 한창이던 중 예수님께서는 베다니에 있는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머무셨습니다. 그 집의 분위기는 어땠을까요? 아마도 그 집에 있던 사람들 대부분이 예루살렘에 퍼져있던 유월절 축제의 분위기, 자신들의 스승 예수님을 중심으로 일어난 축제의 분위기를 타고 있었을 것입니다. 다들 조금씩 들떠 있고 얼굴은 앞으로 일어날 놀라운 일들에 대한 기대감으로 밝게 빛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독 그런 밝은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 이제 곧 유다가 자신을 배신할 것과 가장 신뢰했던 베드로마저도 자신을 버리고 도망갈 것을 아셨던 예수님의 표정은 결코 밝지 않았을 것입니다. 잔칫집에서 혼자 초상집에 온 사람의 표정을 짓고 계신 예수님, 그 예수님의 외로움과 아픔은 그 어떤 제자에게도 공감 받지 못했습니다.
바로 그 때, 한 여인이 매우 값진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님의 머리에 붓습니다. 마가복음에 따르면 그 향유는 삼백 데나리온, 오늘의 시세로 약 3천만원이나 하는 값진 것이었습니다. 이 당황스러운 상황을 잠시 멍하니 지켜보던 사람들이 화를 내며 말합니다. “왜 이렇게 낭비하는거요? 이 향유를 비싼 값에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줄 수 있었을텐데.” 이에 예수님께서 한 말씀하십니다. “왜 이 여자를 괴롭히느냐? 그는 내게 아름다운 일을 했다. 가난한 사람들은 늘 너희와 함께 있지만, 나는 늘 너희와 함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여자가 내 몸에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치르려고 한 것이다.” 제자들이 보기에 뭔가 묘한 분위기가 흐릅니다. 혼자 어둡고 무거운 표정으로 계시던 예수님께서 입을 여시어 장례를 운운하시더니 이상한 행동을 한 여인은 칭찬하시고 바른 소리를 한 자신들은 꾸짖으신 겁니다. 더 나아가 이런 말씀까지 하십니다. “온 세상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서 이 여자가 한 일도 전해져서 그를 기념하게 될 것이다.” 아마 이 칭찬은 예수님께서 사람에게 하셨던 칭찬 중 최고의 칭찬이 아닐까합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도 이 여인의 행동을 칭찬하신 것일까요?
이 여인은 아무도 몰라주었던 예수님의 마음, 외로움과 고통을 알아주었습니다. 그리곤 어떻게 해서든 그것을 함께 나누고파 자신이 가진 가장 귀한 것을 내어놓았습니다. 이 여인이 보여준 행동, 그것은 사실 예수님 사역의 철학이요 핵심이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소외당하고 외면당한 이들 곁에 찾아가 그들의 아픔과 고통에 공감하며 그들의 회복을 위해 자신이 가진 가장 신성한 것을 나누어주는 것,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행하셨던 복음 사역의 핵심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예수님의 복음이 따로 있고 이 여인의 행동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여인의 행동이 예수님의 복음이었던 것입니다.
이 본문 말씀을 통해 새삼 깨닫게 되는 것이 세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의 삶과 사회체제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아들마저도 외롭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들이 비록 미약하고 부족하지만 하나님의 아픔에 공감하며 그 아픔을 함께할 수 있다는 것이며, 또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서 진정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바로 그 일이라는 것입니다.

• 잔치 속 장례식
안타깝지만 우리 사회의 여러 부분이 어느 한쪽을 향해 ‘희생을 강요하는 시스템’ 이라는 것은 부인하기 어려운 사실입니다. 특히 생태와 생명의 차원에서 이 사회를 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모든 것이 인간중심입니다. 그것도 부유한 인간중심. 소수의 부유한 사람들을 위해 돌아가는 시스템은 지구를 파괴하고 수많은 생명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밀양은 지금 10년 째 송전탑 건설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한국전력은 신고리 핵발전소 3호기에서 발생될 전기를 창녕에 있는 변전소까지 송전하려고 밀양 구간에 67개의 송전탑을 세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밀양의 많은 어르신들과 활동가들은 그 송전탑 건설에 반대합니다. 왜냐하면 그 공사는 사전에 주민들과 정상적인 합의를 거치지 않은 것이며, 765,000 볼트 송전탑은 가까이 사는 사람들에게 많은 질병을 유발하며, 한국전력이 주민들에게 약속한 보상이 너무 미흡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국전력과 정부는 많은 반대를 무시하며 공사를 강행하고 있으며 계속해서 주민들과 활동가들을 압박하고 있습니다. 오랜 시간 동안 70, 80세의 어르신들이 산 위에 올라 풍찬노숙하며 반대 운동을 벌이셨고 지난 2012년 1월에는 이치우 어르신이 분신하셨고 2013년 12월에는 유한숙 어르신이 음독자결하셨습니다.
그저 조금이라도 그 어르신들의 외로움과 고통을 나누고자 지난겨울에 교회 청년들과 밀양을 방문했습니다. 분향소에서 유한숙 어르신의 조문을 마치고 동화전이라는 마을에 갔습니다. 중산간에 쳐 있던 비닐 움막에 들어갔습니다. 여러 마을분들이 저희를 따뜻하게 맞아주셨습니다. 소박하고 푸근한 인상의 마을분들은 그간의 밀양 이야기를 웃음과 눈물을 섞어가며 들려주셨습니다. 늦은 시간까지 한참 이야기 나누다 잠이 들었고 다음 날 아침 일어나 보니 어젯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던 비닐움막의 구석구석이 잘 보였습니다. 움막 이곳저곳에는 여러 지지자들이 방문해서 남긴 글들이 붙어 있었고 한 쪽에는 어젯밤에 자신을 ‘손총각’이라고 소개하셨던 마을분의 시가 한 편 붙어있었습니다.
‘제목 : 서울의 밤. 서울의 밤은 없다. 그 전기 어디서 오는지 아는가. 바다를 메워 갯지렁이, 바지락 다 사라지고 산을 깎아 고라니, 날다람쥐 다 죽이며 평생을 일궈 온 삶터 송두리째 빼앗겨 죽음으로나마 지키려는 농부의 고된 투쟁. 전기는 피눈물을 타고 흐른다는 것을 서울의 밤은 아는가. 기름 한 방울 아끼려 어르신들의 방은 입김으로 가득하고 시골의 밤은 너무 어두운데. 서울의 밤은 무슨 짓을 하고 있는가?’
손총각이라는 분의 시는 우리 사회의 전기 시스템이 얼마나 희생을 강요하는 시스템인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느 한 쪽은 밤마다 잔치하듯 번쩍거리지만 어느 한 쪽은 그 잔치를 위해 어둠 속에서 죽어가고 있습니다. 손총각의 시는 드고아의 목자 예언자 아모스를 연상시킵니다.
“너희는 망한다! 상아 침상에 누우며 안락의자에서 기지개 켜며 양 떼에서 골라잡은 어린 양 요리를 먹고, 우리에서 송아지를 골라 잡아먹는 자들, 거문고 소리에 맞추어서 헛된 노래를 흥얼대며, 다윗이나 된 것처럼 악기들을 만들어 내는 자들, 대접으로 포도주를 퍼마시며, 가장 좋은 향유를 몸에 바르면서도 요셉의 집이 망하는 것은 걱정도 하지 않는 자들, 이제는 그들이 그 맨 먼저 사로잡혀서 끌려갈 것이다. 마음껏 흥청대던 잔치는 끝장나고 말 것이다.”(아모스 6:4-7)
밀양의 어르신들에게 그 땅은 그냥 땅이 아닙니다.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땅이요, 어머니 아버지가 묻혀계신 곳이며, 당신 자신이 묻히실 곳이며,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물려줄 땅입니다. 한 뼘 한 뼘 피땀 흘리며 일궈온 삶의 터전입니다. 지금 우리가 쓰는 전기는 그런 귀한 삶의 터전을 피눈물로 물들이고 흘러온 것입니다. 어린 시절 이 방 저 방 불이 켜있는 것을 보시면 부모님께서, “아니 왜 온 집안을 잔칫집처럼 밝혀놓았어. 잔치해? 어여 불꺼”라고 하셨습니다. 밀양을 다녀오기 전까진 몰랐습니다. 우리의 잔치하는 밤의 문제는 전기세의 문제가 아니라 수많은 생명의 생존의 문제라는 것을.
지금 브라질에서는 월드컵이 진행 중입니다. 월드컵은 세계인의 축제입니다. 그러나 이번 브라질 월드컵은 그 준비 기간부터 브라질 자국민들의 반대를 많이 받았으며 경기가 진행되는 지금도 반대자들의 시위가 거셉니다. 브라질 정부는 이번 월드컵을 위해 14조원이 넘는 돈을 경기장 건설과 대회 운영을 위해 투자했습니다. 시위에 참여한 브라질 국민들은 그런 비싼 경기장보다는 당장의 의료시설과 주거공간과 교육시설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이번 월드컵 경기장 건설을 위해 철거 위협을 당한 이들이 25만 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100만 명이 넘는 이들이 거리에 나와 시위를 하고 있습니다. 격렬하게 경찰들과 충돌하며 시위도하지만 벽에 그림을 그려 월드컵 반대의 메시지를 전하기도 합니다. 여러 벽화 중 인상적인 그림이 하나 있었습니다. 나무로 지은 낡은 집에 한 아이가 식탁에 앉아 있습니다. 벽은 구멍이 숭숭 뚫려있고 의자와 식탁도 낡았습니다. 아이는 한 손에 포크를 다른 한 손에 나이프를 들고 엉엉 울면서 접시를 바라봅니다. 아이 앞에 놓인 접시는 빈 접시가 아닙니다. 큰 것이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먹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축구공입니다.
어느 한쪽의 잔치를 위해 다른 한쪽에서 장례를 치러야하는 상황이라면 그 잔치는 멈추어야 하는 잔치가 아닐까요? 그렇지 않다면 아모스의 예언처럼 그 잔치는 곧 끝장나고 말 것입니다.

• 신을 구하다
애니메이션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보면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사람들이 사는 마을과 동떨어진 곳, 비밀의 터널 같은 곳을 지나가면 신비한 장소가 나오는데 그곳에는 온갖 신들이 와서 피로를 푸는 온천장이 있습니다. 어느 저녁 한 신이 그 온천장을 찾아옵니다. 그 신은 체구가 크고 엄청나게 고약한 냄새를 풍기며 끈적끈적하고 더러운 액체를 흘리며 온천장을 향해 다가옵니다. 그곳에서 일하던 이들은 그를 ‘오물의 신’이라고 부르며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합니다. 모두 그 오물의 신 근처에도 가려 하지 않습니다. ‘센’이라고 불리는 주인공 여자 아이가 그 오물의 신 수발을 담당하게 됩니다. 센은 씩씩하게 그 일을 감당합니다. 수영장만한 욕조에 오물의 신을 모시고는 최고급 약수를 데운 온천수를 붓습니다. 오물의 신에게서 더러운 액체들이 떨어져 나갑니다. 센은 그 오물의 신의 옆구리에 큰 쇠가 가시같이 박힌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그것을 빼내려 합니다. 혼자 힘으로 되지 않아 그 쇠붙이에 줄을 묶어 여럿이서 줄다리기하듯 줄을 당깁니다. 여럿이 함께 힘을 주어 당기자 그 쇠붙이는 빠져나옵니다. 그 쇠붙이는 놀랍게도 자전거 손잡이였습니다. 자전거가 나오고, 녹슨 자전거 따라 냉장고가 나오고, 냉장고 따라 드럼통이 나오고 드럼통 따라 온갖 쓰레기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모두 넋을 놓고 이게 무슨 상황인가 하며 욕조 안을 쳐다볼 때 인상 좋게 생긴 할아버지 얼굴을 한 용 한 마리가 욕조에서 나와 속이 시원하다는 듯 맑고 쾌활한 웃음을 지으며 하늘로 날아갑니다. 그는 오물의 신이 아니라 이름 있는 강의 신이었던 것입니다.
진정 우리의 시스템과 우리 삶의 방식은 맑은 강의 신마저도 오물의 신으로 만들어버릴 수 있는 시스템입니다. 힘없고 연약한 자들의 희생을 강요하는 시스템 속에서 하나님도 고통당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그 누군가가 다가와 당신의 고통을 알아봐주길 원하십니다. 하나님 가슴에 박힌 큰 가시를 빼주길 원하십니다. 들뜬 분위기의 잔치자리에서 홀로 외로워하고 괴로워하는 당신의 아픔을 알아주시길 원하십니다. 어느 한쪽의 잔치를 위해 어느 한쪽은 장례를 치르는 세상이 아니라 온 세상이 함께 소박하나 행복하게 살아가는 세상을 원하십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나와 있는 최후의 심판 장면은 다음과 같습니다. 주님께서는 영광의 보좌에 앉으셔서 모든 민족을 당신 앞에 불러모으십니다. 그리고는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오른쪽 구원의 자리에 설 자들과 왼쪽 멸망의 자리에 설 자들을 갈라놓으십니다. 양쪽에 선 사람들 모두 자신들이 왜 그 자리에 서게 됐는지 주님께 묻습니다. 그들에게 주님께서 대답하십니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 배고픈 사람, 목마른 사람, 헐벗은 사람, 병든 사람, 옥에 갇힌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며, 그에게 하지 않은 것이 내게 하지 않은 것이다.”
우리는 이제 멈추어 서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여러 가지 일상과 그 시스템 유지를 위해 그 누군가가 배고프고 목마르고 헐벗고 병들고 때로는 옥에 갇히는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잘 살펴야 합니다. 그 누군가에게 일방적으로 희생을 강요하며 이루어지는 풍요와 안정은 결코 정의롭지 못합니다. 우리 주님은 그런 정의롭지 못한 풍요와 안정에 대해 최후 심판의 날 영광의 보좌에 앉아 심판하겠다, 말씀하셨습니다.
다들 한껏 풍요를 지향하는 잔치하는 세상 속에서 외롭고 고통당하는 이들의 아픔을 당신의 것으로 삼으시고 그들 곁에서 함께 아파하시는 주님이 계십니다. 우리 안에 있는 귀한 것, 향유옥합처럼 귀한 것을 가지고 그 주님께로 나아갑시다. 일상을 장례처럼 지내고 있는 이 땅의 수많은 주님을 찾아가 그 주님들께 우리의 마음과 물질을 나누어 드립시다. 그런 행동은 어떤 이들에게 어리석고 낭비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유월절 베다니 시몬 집에서 당신에게 다가와 향유를 부은 여인에게 말씀하셨듯이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해주실 것입니다. “네가 내게 아름다운 일을 하였다.”
한 해의 절반이 지나가고 새로운 절반이 곧 시작됩니다.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새로운 목표를 주셨습니다. 아름다운 꿈을 주셨습니다. 마음을 새롭게 하여 그런 아름다운 일을 힘써 감당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14년 06월 29일 12시 01분 13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