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27. 내게로 오너라
설교자 이범석
본문 마11:16-19,25-30
설교일시 2014/07/06
오디오파일 s20140706.mp3 [6476 KBy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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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로 오너라>
마11:16-19,25-30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길까? 마치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서, 다른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다. '우리가 너희에게 피리를 불어도 너희는 춤을 추지 않았고, 우리가 곡을 해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는 귀신이 들렸다' 하고, 인자는 와서,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니, 그들이 말하기를 '보아라, 저 사람은 마구 먹어대는 자요, 포도주를 마시는 자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다' 한다. 그러나 지혜는 그 한 일로 옳다는 것이 입증되었다."그 때에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아버지, 이 일을 지혜 있고 똑똑한 사람들에게는 감추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드러내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이것이 아버지의 은혜로운 뜻입니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맡겨주셨습니다. 아버지 밖에는 아들을 아는 이가 없으며, 아들과 또 아들이 계시하여 주려고 하는 사람 밖에는 아버지를 아는 이가 없습니다.""수고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모두 내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한테 배워라. 그리하면 너희는 마음에 쉼을 얻을 것이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 호응하지 않음 ; 이 세대의 거부와 불신
좋으신 하나님의 은총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2014년의 절반이 지나갔고, 새로운 절반이 시작되는 7월의 첫 주일입니다. 우리는 다시 한 번 출발점에 서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어느 방향을 향해, 누구를 따라 나서야 하겠습니까? 찬송가 449장, “예수 따라 가며 복음 순종하면 우리 행할 길 환하겠네” 이 마음이 여러분과 저의 마음이기를 소망합니다.

저는 오늘 본문 가운데 한 말씀을 참 좋아합니다.
“인자는 와서,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니,” (마11:19)
제 안에 예수님 닮은 구석이 별로 없는데, 이것 하나는 닮은 것 같습니다. 여러분도 부디 예수님 닮아서, 잘 드시고 잘 마시면서, 무더운 여름을 잘 지내실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런데, 실상 이 구절은,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하고 배척하는 사람들에 의해 떠도는 모함입니다. 당시 사람들이, 세례 요한에 대해서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는다고, 배척하고, 반대로 예수님에 대해서는, 먹고 마신다고 배척했습니다.
한 마디로, ‘세례 요한과 예수, 당신들은 이래도 싫고, 저래도 싫어!’ 이겁니다.

이들의 거부와 불신에 대해, 예수님은 비유 하나를 들려주십니다.
놀이 비유인데요. 놀이 방식은 이렇습니다. 한 녀석이 피리를 신명나게 불면, 마치 결혼잔치에 온 것처럼, 다른 친구들이 다 같이 춤을 춥니다. 그러다가 또 한 녀석이 가슴 절절하게 곡을 하면, 마치 장례식장에 온 것처럼, 나머지 친구들이 다 같이 우는 겁니다. 간단한 규칙입니다. 한 사람이 보낸 신호에 따라, 모두 함께 충분한 분위기를 만들면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당시 사람들이 춤을 추지도 않고, 울지도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세례 요한과 예수님께 전혀 호응하지 않았습니다.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회개하여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외쳐도, 그들은 시큰둥했고, 예수님이 동네 동네에서 ‘회개하여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외쳐도, 그들은 콧방귀도 뀌지 않았습니다.

왜 그들은 호응하지 않았을까요?
이에 대한 그들의 대답은 아마, ‘우린 우리 방식대로 살래요, 세례 요한이나 예수의 방식이 싫어요’ 일 것입니다.
이천 년 전 유대 사람들을 꽉 붙잡고 있던, 삶의 방식은, 율법 중심의 삶이었습니다. 당시는 종교와 정치, 삶이 하나였던 시대였습니다. 그 중앙에도 율법이 있었고, 경계로 정해진 최대치도 율법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복잡한 궤변을 포함한 613가지 계명을 말합니다. 복잡하고 까다롭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방식을 고수하며, 그 안에 머무르는 자만이 생존할 수 있다고 모두들 굳게 믿고 살아가던 시대였습니다. 율법을 통해서만,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이라는 보상을 얻을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보상을 받으려면, 힘이 들더라도 어쨌든 그 한계 안에 있어야만 한다고 여겼습니다. 허덕거리며 억눌려 있어도 꼼짝할 수 없게 하는 거대한 체제의 힘 앞에서, 한 명의 인간은 미약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말씀, “회개하여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이 세대에게 어이없는 말이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이라는 정교한 체계를 잘 갖추고 있었고, 도대체 돌이켜 회개하고 응답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그들을 선택하셨고 율법을 주셨기 때문에, 자신들은 천국행이 보장된 민족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회개는 내가 내 힘으로는 할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는데, 그들은 율법으로 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율법과 성전 체제 중심의 굳은 신념 체계에 의존하고 있는 ‘이 세대’를 향해, 예수는 외치십다. “그렇지 않아!”

우리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우리에게도 율법과 성전 체제와 같이 딱딱하게 굳어진, 정교하게 쌓아올려 무너지지 않을 철옹성 같은, 신념 체계들이 있습니다. 나와 내 자녀들을 안전하고 행복하게 만들어줄 것이라고 믿고 있는 틀 말입니다. 시대가 변하며 그 내용은 변해도, 이런 시류의 힘은 여전히 강력합니다. 2014년 한국에서 살려면, 이러저러해야만 한다고 여겨지는 규정, 혹은 한계와 범위가 있습니다. 주류 이데올로기 안에 거해야만 하구요, 황금 만능의 현실을 인정하고 따라 나서야 합니다. 사는 동네, 학교, 직장까지 계속 이어지는 인생길에서, 일류, 이류, 삼류의 순위를 매기고,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올라가려고 해야 합니다. 퇴직 전까지 얼마를 모아야만 합니다. ... 우리에겐 수없는 생존 규칙들이 있습니다. 그 규칙 밖으로 나가는 순간, 2014년 한국에서 레드 카드를 받고 퇴장당할 것 같은 불안감이 우리를 짓누릅니다.
끊임없는 경쟁심과 질투, 시기가 판을 치는 막장 드라마가 바로 냉혹한 현실입니다. 그래서인지 ‘이 세대’의 우리는 ‘너’와 함께 피리를 불고 춤추지 않습니다. ‘너’와 같이 곡을 하고 울지 않습니다.
우리는, 주님께 호응하지도 않을뿐더러, 당연히 웃는 사람과 함께 웃고, 우는 사람과 함께 우는 삶에, 너무나 인색해져 버렸습니다.
‘그럴 시간 있으면, 하나라도 더 벌고 더 모으고 더 올라가시오. 안 그러면 영원히 낙오할 것이오.’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진정 오늘 여기서는 어쩔 수 없단 말입니까?
혹시 이 불안함은 현재의 세상 틀을 쥐고 이득을 취하고 있는 사람들이 거짓되이 조성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혹시 우리는 하나님이 들의 백합화를 입히시고 공중의 새를 먹이시는 분이라는 것을 망각한 것은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아버지라는 것을 신뢰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믿음 없다’고 하는 게 이런 것 아닙니까.
세상의 방식에 대해서는, 어렵더라도 따라가기만 하면, 내 손에 잡히는 결과물들이 보장될 것이라고 굳게 믿지만, 그 규칙 밖에 서는 순간, 하나님조차도 나와 내 가족을 2014년 한국에서 책임지지 못하실 것이라는 마음이 우리 가운데 은연중 자리잡은 것은 아닙니까.

* 어린아이들에게 참지혜를 드러내심
그러나 주님은 “지혜는 그 한 일로 옳다는 것이 입증되었다”(마11:19b)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생존을 위해서는 당연하다고 여기는 율법의 한계 안에 머물지 않아도, 살 수 있고,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을, 몸으로 행하여 증명해보여 주셨습니다. 율법의 통제 밖에서, 예수를 신뢰하고 예수께 순종함으로써, “눈 먼 사람이 보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 환자가 깨끗하게 되며, 듣지 못하는 사람이 들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며,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는”(마11:5)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안식일을 깼지만, 예수를 따라나서는 사람들에게 생명의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주장한 율법의 틀 속에서는 죽었던 존재들이 예수의 방식 안에서 살아났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감사기도하십니다.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아버지, 이 일을 지혜 있고 똑똑한 사람들에게는 감추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드러내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마11:25)
지혜 있고 똑똑하다고 하는 자들은, 당장 멋들어진 왕국을 세울 수 있기를 원합니다. 자신들의 체제와 방식을 자만하면서, 단시간에 이룰 수 있다고 허풍떱니다. 즉각적인 결과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예수와 하나님 나라를 우습고 허황한 나라라고 비난합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하늘의 비밀에 닿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어린 아이 같은 마음은 다릅니다. 내가 받은 것들로 인해, 건방지지 않은 마음, 스스로 잘났다고 자랑하지 않는 마음, 더 나아가, 실제로도 가진 것이 없는 마음입니다. 꿍꿍이셈이 없어서, 치장하거나 위장할 필요가 없는 마음과 삶입니다. 세상이 매겨놓은 순위에 아랑곳하지 않으니, 마냥 순진무구하게, 예수를 따라나설 수 있는 사람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이런 어린아이들이야말로, 하늘 아버지의 비밀에 닿을 수 있습니다. 예수를 통해 우리에게 다가오신 하나님 아버지를 신뢰하고 그분의 뜻에 순종하는 작은 사람들이야말로, 하나님과 소통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구약 시대로부터 계속 드러나고 있는 하나님의 의지는 분명합니다. 당신께 겸손한 자와 함께 하십니다.
쿰란 문서 “주님, 당신이 찬양받으소서, ...... 당신은 가장 미미한 자를 업신여기지 아니하셨으며, 당신은 은혜의 가난한 자들을 위로 올리시기 위해서 불쌍한 자들과 함께 계십니다”(1QH 5:20-21)
마태복음에서도, 예수께서 함께 하시고,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은, 1.어린 아이들(18:3), 그리고 2. 가장 미미한 자, 즉 작은 자(10:42, 18:6), 그리고 3. 가난한 자와 억눌린 자, 불쌍한 자(5:3-4)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임마누엘의 주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의지를 가지고 그들을 선택하셨습니다. 이는 미래에나 이뤄질 약속이 아닙니다. 예수 안에서, 그를 따르는 자에게 바로 성취되고 있는 실재입니다. 예수 안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가오시며 자신의 속내와, 힘과 능력을 드러내십니다. 그분 앞에서, 인간은 현명할 필요도, 부유할 필요도 없습니다. 능력을 내세울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는 단지 그분께 전적으로 복종할 수 있고, 그분으로부터 모든 것을 기대할 수 있으며, 더 이상의 불안함 없이 살 수 있습니다.
이렇게 주님께 온전히 맡길 때, 삶은 어쩔 수 없이 지고 가야만 하는 부담이나, 굴레, 또는 무거운 짐이 아닙니다. 삶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선물이 됩니다! 내 삶의 하나하나, 속속들이 하나님의 선물임을 깨닫고 믿음으로 고백할 때, 우리는 자유롭게 될 수 있습니다. 시류와 체제에 굴종하는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그분의 샬롬에 머무를 수 있습니다.

* 내게로 오너라
하나님은 은혜롭지만 분명한 의지로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들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뜻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들에게 드러내셨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모두 내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마11:28)

세상의 틀 안에 갇혀, 그 인위적 한계 안에서 살아남으려고 발버둥치며,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헉헉대던 사람들 모두를 예수님께서 부르십니다.
우리를 헐떡이게 만드는 것이, 덥고 습한 여름 날씨입니까? 나의 개인적인 죄나 힘든 일, 생활고입니까? 물론 그렇기도 하지만, 정말 우리를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소위 세상의 지혜자들이 짜서 만들어준, 사방 콘크리트 벽 같은, 그 틀입니다.
어떻게 거기서 나갈 수 있습니까? 콘크리트 벽으로 둘러싸인 집에서 어떻게 밖으로 나가십니까? 벽을 보면 나갈 수 없지만, 문을 열면 나갈 수 있습니다. 당신 스스로를 “양의 문”(요10:7)이라고 하신 예수님을 통해 나갈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예수라는 문을 열라. 내게로 오너라.’
벽 밖의 세상이 어떨지 두려우십니까. 물론 화창한 날만 있지는 않습니다. 비바람도 치고, 눈보라도 입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우리는 주님께서 주시는 참된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참된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

* 내 멍에를 메고 나한테 배워라
그런데 주님은 단순하게 무거운 짐을 없애버리겠다고 하시지 않습니다.
“내 멍에를 메고 나한테 배워라.”(마11:29)
주님이 주시는 멍에를 지면, 주님의 멍에를 메는 법을 가르쳐주신다고 하십니다.

이천 년 전 이스라엘에서, 많이 볼 수 있는 멍에는 소 두 마리의 목에 가로 얹어 하나로 엮어 쟁기의 채를 끄는 형태였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멍에는, 농부이신 예수님이 이끄는 멍에가 될 수도 있겠지만, 예수님이 한쪽을 메고 내가 다른 한쪽을 메는 멍에일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자기 제자들을 부를 때, 가르침을 듣는 ‘학생’이라기보다, 관찰하고 배우는 ‘수습생’의 뜻을 갖는 아람어 단어를 택하셨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예수님과 예수님의 멍에를 멘 나는 한 팀이 됩니다. 나는 팀의 선배인 예수님께 바로 곁에서 보고 배웁니다. 수습생의 도제식 교육이라고나 할까요. 잘 보고 잘 관찰해서 배울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주님께서 초대하시는 말씀입니다. ‘얘야, 내 멍에의 짝이 되어주렴. 내 옆에서 나와 함께 일해주렴. 그러면 어떻게 인생의 멍에를 메고 짐을 끄는지 내가 가르쳐주마. 네가 나를 받아들인다면, 네 인생의 짐을 거뜬하게 옮길 수 있는 방법과 힘을 공급해주마. 네 인생의 짐은 정말 가벼워질거야.’
출애굽기 33장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출33:14,개)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모세와 함께 동행하시면서, 친히 인도해주시고, 쉼을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따르는 모든 사람에게 늘 같은 약속을 주셨습니다.

우리의 스승 예수님은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하십니다. (마11:29a)
우리는 온유하고 겸손한 선생님께, 그분의 온유함과 겸손함을 그대로 보고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 삶에서 그대로 흉내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세상을 일궈나가시는 방식을 신뢰하고, 끝까지 순종하며 따라갔던 주님처럼, 우리도 그렇게 살 수 있습니다.
믿음과 순종을, 하나님으로부터 보상이나 받기 위해, 멍에를 메는 것으로 여긴다면, 그건 또 하나의 율법처럼 피곤한 의무일 뿐입니다. 억압의 굴레와 뭐가 다르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미 나를 구출하셨음을 믿고, 그 감격과 감사로, 주님께 순종할 때, 그건 기꺼운 마음으로 넘치게 호응하는 잔치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율법 체제의 굴레를 극복하고자 하셨지만, 율법 자체를 부정하신 것은 아닙니다. 바로 이 점이 우리가 오늘 마지막으로 배워야 할 내용일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아는 바와 같이, 예수님은 여러 번 율법의 본뜻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여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본뜻이다."(마7:12)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 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하였으니, / 이것이 가장 중요하고 으뜸 가는 계명이다. / 둘째 계명도 이것과 같은데,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한 것이다. / 이 두 계명에 온 율법과 예언서의 본 뜻이 달려 있다."(마22:37~40)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면서, 정의와 자비와 신의와 같은 율법의 더 중요한 요소들은 버렸다. 그것들도 소홀히 하지 않아야 했지만, 이것들도 마땅히 행해야 했다.”(마23:23)
우리는 주님께서 강조하신 율법의 중심인, 공감하는 사랑으로 정의와 자비의 세상을 이루는 삶을, 주님으로부터 배워야 합니다.

혹시, 주님께서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고 말씀하셨다고 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제자의 길은 큰 노력이 필요하지 않은 길이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입니다. 지금까지 사방의 꽉 막힌 틀로 인해 옴짝달싹하지 못해, 고생하고 좌절한 사람들에게, 새 시대가 열렸음을 선포하시는 말씀입니다. 치열한 자기 부정과 삶의 헌신이 필요하지 않다는 말랑말랑한 말씀이 아닙니다. 세속의 논리에 생각과 동기까지 뼛속 깊이 붙잡혀있는 우리들에게, 그 내면 깊숙한 곳까지 완전히 뒤집어주시는 능력 있는 은혜의 빛이 이미 우리 가운데 비취었다고 선포하시는 말씀입니다. 이제 옛 틀로부터 구출되었습니다. 이제 새 시대가 열렸습니다.

이제는 세상이 규정한 굴레와 틀에서 벗어나서, 어린아이들의 마음으로, 주님께로 나아갑시다. 세속의 무거운 짐을 벗고, 주님도 함께 지시는 주님의 멍에를 메고, 주님을 따릅시다.
아마, 그 작은 시작은, 누군가 피리를 불 때, 함께 춤을 추고, 누군가 곡을 할 때, 함께 우는 것으로부터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공감하는 사랑으로 서로를 대접할 때, 갈라진 틈이 메워지고, 화해와 평화의 세상, 정의와 자비의 세상이 올 것이라 믿습니다. 작게는 가정과 일터, 교회 공동체 속에서, 넓게는 동북아의 군사 경쟁과 전쟁의 위협, 온 지구 생명의 눈물 가운데, 온유하고 겸손한 사랑으로 평화를 일구기 위해, 주님의 멍에를 메고 주님의 십자가 삶을 배워 그대로 살아내서, 주님의 몸이 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그리고 그 자리 자리마다 임마누엘의 주님께서 함께 하실 줄 믿습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14년 07월 06일 11시 58분 05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