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28. 교회의 반석
설교자 신진식
본문 마16:13-20
설교일시 2014/07/13
오디오파일 s20140713.mp3 [4952 KBy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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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빌립보의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러서, 제자들에게 물으셨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고 하느냐?"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고, 엘리야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고, 예레미야나 예언자들 가운데에 한 분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셨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십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시몬 바요나야, 너는 복이 있다. 너에게 이것을 알려 주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시다.
나도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다. 나는 이 반석 위에다가 내 교회를 세우겠다. 죽음의 문들이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내가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그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엄명하시기를, 자기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셨다.〕


두렵고 떨리는 자리에 섰습니다. 오늘 이 예배의 자리에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이 저와 성도님들께 임하기를 기대합니다. 그리고 순례의 여정 중에 있는 담임 목사님과도 함께 하길 기도합니다.

▪이야기(narrative)의 신비
아동부 전도사인 저는 아동부 친구들에게 참된 예배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곤 합니다.
“예배의 자리는 하나님의 이야기와 나의 이야기가 만나는 자리이며, 참된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과 나의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된다.”
들리기에는 쉽고 간결한 설명이지만, 실제로 예배의 자리에 자신의 이야기를 갖고 나온다는 것은 많은 노력과 마음 씀이 필요한 일입니다. 저와 아동부 선생님들은 종종 그 어려움을 토로하곤 합니다. 여러분은 오늘 이 예배의 자리에 어떤 자신의 이야기를 갖고 오셨는지요?

이야기(narrative)는 하나님 계시의 중요한 매개체입니다. 폴 리쾨르(Paul Ricoeur)는 인간 삶의 진정한 의미는 단순히 흘러가는 시간에서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인생의 사건들을 이야기로 재통합하는 차원에서 실제로 드러난다고 했습니다.
예배의 자리에서 만나는 하나님의 말씀도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기 보다는 하나님 앞에 선 인간들의 적나라한 모습을 담은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서의 이야기를 나의 이야기로 체화(體化)할 때, 내가 성서를 읽는 것이 아니라 성서가 나를 읽을 때 비로소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느낍니다.


▪살아남은 자들의 이야기
이스라엘 백성의 각 지파와 계층을 통해 전해져 온 하나님의 이야기가 정경(canon)이 되어 하나님 백성의 삶의 나침반이 된 때는 바빌론 포로기입니다. 바빌론 포로기는 이스라엘 백성 스스로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민족이라는 정체성의 근거들이 상실된 시기였습니다.

기원전 587년 바빌론 제국의 느부갓네살 왕은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상징하는 언약궤를 모셔놓은 솔로몬 성전을 돌 위에 돌 하나도 남기지 않고 철저하게 파괴했습니다. 또한 이스라엘의 지도자, 기름부음 받은 시드기야 왕을 두 눈을 뽑은 채로 바빌론으로 끌고 가 치욕적으로 죽였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 예루살렘에서 바빌론 제국으로 강제 이주 시켰습니다(예레미야 52장; 열왕기하 25장).

거룩한 성전, 기름부음 받은 왕, 약속의 땅!
이스라엘은 두 눈으로 보고, 두 손으로 잡고, 두 발로 디딜 수 있었던 하나님의 은총과 섭리에 대한 모든 상징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다시 빼앗아 가신 겁니다. 잿더미에 앉은 욥처럼 바빌론 제국의 포로수용소에 갇힌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간섭하심과 보호하심과 인도하심의 어떤 근거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신앙의 근거들이 뿌리 뽑힌 삶의 자리에서 이스라엘의 살아남은 자들은 마음에 뱅뱅 울리는 질문을 토해내야 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이제 무엇에 근거해서 삶을 영위해야 합니까?"
“이제 우리의 정체성은 무엇입니까?”

▪토라의 정신
바빌론 제국의 거대한 문명과 위압적인 문화 속에서 이스라엘의 살아남은 자들은 슬픔에 잠겨있을 수만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바빌론으로 끌려온 지 몇 년이 지난 후에, 에스겔이라는 젊은 예언자에게 비전을 보여주십니다. “사람아, 내가 너에게 주는 이 두루마리를 먹고, 너의 배를 불리며, 너의 속을 그것으로 가득 채워라.” 에스겔이 포로 생활의 고통과 불행을 받아들이며 그 두루마리를 곱씹었을 때, 그는 ‘그것이 꿀과 같이 달다’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에스겔 3:1-3).

이스라엘은 무너져 내린 성전에 대한 애태움을 뒤로하고, 그들에게 전해져 온 하나님의 이야기들이 담긴 두루마리 속에서, 다시금 하나님 백성의 정체성은 무엇인지 성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그 두루마리를 곱씹으며 이해하려고 노력하며 자신들 내면의 일부로 만들었을 때, 그들은 어느 순간 하나님이 자신들과 함께하심을 느꼈습니다. 그 느낌이란 그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을 방문했을 때 느꼈던 것과 같은 경험이었습니다. 그들의 신앙은 이제 성전에서 말씀으로 터 잡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전에만 계신 것이 아니라, 말씀을 묵상할 때 자신들과 함께한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한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바빌론 제국의 정복과 번영의 정신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계시를 인류 역사에 남기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다섯 개의 경전으로 구성된 토라입니다. 토라는 히브리어로 율법이란 뜻입니다.

토라는 바빌론 제국의 한복판에서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말씀으로 창조하셨고, 말씀으로 섭리하신다.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대로 모든 사람을 지으셨다.
하나님은 히브리의 하나님이며, 억압받는 자의 자유를 위해 싸우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성품을 온전히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백성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
하나님의 백성은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돌봐야 한다.

정경비평의 권위자 샌더스 교수는 토라의 정신을 논할 때 토라가 왜 가나안 정복이 아닌(여호수아), 예루살렘 정복이 아닌(다윗) 출애굽 광야의 끝자락 요단강 앞에서 그 이야기를 끝맺고있는지 깊이 성찰해야 한다고 말합니다.(제임스 A. 샌더스, 박원일·유연희 역, 『토라와 정경』, 한국기독교연구소, 110)

▪토라(율법)의 완성자-예수 그리스도
고대 근동의 제국들이 정복과 약탈로 쌓은 문명과 특권층의 번영만을 찬양하는 문화를 추구하며 흥망성쇠를 거듭하는 가운데에서도, 제국들의 논리를 압도하는 토라의 정신은 말씀 속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찾고자 노력하는 공동체들에 의해 발견되고, 읽히고, 암송되고, 해석되면서 오랜 세월을 거쳐 전해져 내려왔습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자신들의 신앙의 근거를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고, 발로 디딜 수 있는 것에 두려는 욕망들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제국의 포로에서 풀리자 이스라엘은 다시금 성전을 짓고 성전을 자신들의 종교의 상징적 심장으로 만듭니다. 다시 하나님이 임재하는 곳은 성전이라고 선포하고, 희생제사를 통해 죄를 용서받는 곳도 성전이라고 가르칩니다. 결과적으로 성전은 다시 이스라엘의 정치생활의 중심이 되었고, 제2 성전 시대의 유대교를 헤롯 왕가와 더불어 다스렸던 제사장 계층의 권력기반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제2 성전 시대에 공생애를 사셨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삶과 들려주는 이야기를 통해 가르치신 것은 가난한 자, 포로 된 자, 눈먼 자들에게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내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것이,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길임을 사람들에게 일깨워주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는 성전체제를 통해서 오는 것이 아니라, 새로워진 마음을 통해 거듭난 사람들의 모임 가운데 이미 와있다고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진리를 에클레시아(Ecclessia)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 교회에 맡기셨습니다.


▪교회의 본질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통해 마음을 새롭게 하고 변화된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부르심을 받은 사람의 삶을 구원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여러 교회에 보내는 편지들을 통해 부르심을 받은 사람, 구원 받은 사람의 삶의 길을 제시합니다.

"우리의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은 것은, 죄의 몸을 멸하여서, 우리가 다시는 죄의 노예가 되지 않게 하려는 것임을 우리는 압니다." (로마서 6장 6절)
"여러분은 옛 사람을 그 행실과 함께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십시오. 이 새 사람은 자기를 창조하신 분의 형상을 따라 끊임없이 새로워져서, 참 지식에 이르게 됩니다." (골로새서 3장 9-10절)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일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고, 온전한 사람이 되어서,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경지에까지 다다르게 됩니다." (에베소서 4장 13절)

부르심을 받은 자의 삶이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구원을 이루어가는 삶입니다. 교회는 바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구원을 이루어가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교회에 십자가의 진리를 맡기셨습니다. 그렇다면 교회를 든든히 받치는 반석은 무엇일까요?

▪교회의 반석
오늘 본문에 로마 황제를 기념하기 위한 화려한 도시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당차게 예수님을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갈릴리 출신의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이 사람의 이름은 시몬이고 베드로라고도 불립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반석 삼아 그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고 선언하십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교회의 반석이 되기까지는 어둠의 밤들을 통과해야 했습니다. 베드로의 저 당찬 신앙 고백 후에 시간이 흐르고,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밤에 베드로의 신앙 고백은 성전이 무너져 내리듯 철저하게 무너지고 맙니다.

요한복음 21장 기록에 의하면 그 후에 베드로는 디베랴 바닷가로 낙향합니다. 디베랴는 헤롯 왕이 갈릴리 호수를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를 기념하기 위해 개명한 명칭입니다. 디베랴 바닷가, 그곳엔 로마 황제의 도시 가이사랴 빌립보의 당찬 베드로는 없고, 로마 황제의 바다 디베랴에서 예수님의 죽음을 자책하면서 생존의 부끄러움, 그 수치심을 잊기 위해 고된 바다일에 열중하는 시몬만이 있었습니다.

그 시몬 앞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은 밤새 고된 바다일에 지친 시몬을 위해 따뜻한 아침상을 차려주십니다. 그리고 세 번 물으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시몬에게 이 질문은 이렇게 들렸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아느냐,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은 이제 자기가 예수님을 정말 아는 것인지 모르는 것인지, 사랑하는 것인지 사랑하지 않는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시몬은 “근심”합니다. 그는 이제 예수님에 대한 자신의 신앙 고백에 자신이 없습니다. 그리고 시몬은 근심 끝에 이런 고백을 합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지 주님께서 아십니다.” 이 고백의 이면에는 “나는 언제 예수님을 다시 배반할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주님은 내 마음 깊은 곳에 나도 모르는 그곳에 있는 주님에 대한 나의 작은 사랑을 발견하시고 그것을 인정하십니다.”
이 근심이 시몬을 베드로되게 만들었습니다. 이제 베드로의 신앙 고백은 예수님에 대한 “나의” 믿음이나 “나의” 앎이나 “나의” 사랑에 대한 확신이 아니라, 나를 향하신 “예수님의” 앎과, 나를 향하신 “예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입니다. (송성진,『예수 그리스도』, CLC, 254-257.)

교회의 반석은 무엇입니까? 교회의 반석은 바로 베드로의 “거룩한 근심”입니다. 그리고 그 근심을 부드럽게 감싸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입니다. 저는 청파교회에서 신학생으로 3년 수련목회자로 1년 반을 섬기면서 청파교회의 반석을 종종 발견했습니다.
젊은 시절부터 몸과 맘을 드려 교회를 위해 봉사하셨지만, 그 공로를 뒤로하고 여전히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아름다운 삶의 마무리를 간구하시는 원로 권사님들의 모습 속에서,
빠르게 변하고 돌아가는 사회 속에서 그리스도의 신앙은 구두 속 돌맹이처럼 삶의 발걸음을 더디게 만든다는 집사님들의 익살스러운 푸념 속에서,
매번 아이들 앞에 서는 것이 마치 양심을 비추는 거울에 서는 것 같다고 고백하는 교회학교의 선생님들의 모습 속에서,
말씀의 쟁기를 끄는 멍에를 늘 어깨 위에 얹고 낮은 호흡으로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목회실 식구들의 뒷모습 속에서 저는 청파교회를 든든히 받치고 있는 반석을 보았습니다.

▪진정성을 향하여
사회학자 김홍중은 살아남음, 생존이 부끄러움이 되는 감수성이 하나의 가치로서 삶의 옳은 기준이 되는 시대를 ‘진정성’의 시대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현재 한국 사회의 '진정성'이 와해된 자리에 새롭게 들어선 삶의 태도는 도구화된 성찰성을 바탕으로 성공과 치부를 반성없이 추구하고 자기계발과 경제적 투기에 몰두하는 신자유주의적 동물성이라고 비판합니다. (김홍중, 「진정성의 기원과 구조」, “한국사회학회 제43집 5호”, 5-6.)

진정성이 사라지고 정글로 변해버린 한국 사회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부르심을 받은 우리들이 뿌리고 비추어야 할 소금과 빛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성서 속 삶의 자리로 돌아가서, "살아남은 자의 겸허한 태도"와 "거룩한 근심"을 가지고 우리의 삶의 자리로 돌아와 이 질문의 답을 구해야겠습니다. 우리의 간절한 간구에 신실하게 응답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임하길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14년 07월 13일 11시 53분 24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