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19. 존경과 존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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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잠23:22-26
설교일시 200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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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과 존중
잠23:22-26
(2001/5/13, 어버이주일)


행복한 사람, 불행한 사람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돈이 많거나, 유명한 사람요? 아닐 겁니다. 어버이 주일에 맞게 제가 말해 볼께요. 저는 "자식에게 존경받는 부모"만큼 행복한 이가 없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여기에는 전제 조건이 있어요. 살아서 존경받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저는 꽤 여러 사람으로부터 자기 부모님을 가장 존경한다는 말을 들었어요. 그렇게 말할 때 대개 그들은 눈물을 글썽거려요. 그런데 한 가지 공통점이 있더군요. 그런 이들의 부모님은 대개 이 세상 분이 아니에요. 살아서 자식들에게 존경받는 부모님은 우리 모두에게 한 턱 내야해요.

그런데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답이 뻔하지요? 아버지, 어머니를 보면서 "나는 죽어도 저렇게는 안 살아", 이런 다짐을 하게 하는 부모는 참 불쌍한 사람이에요. 자식도 안 됐구요. 온 가족이 교회를 열심히 다니는 가정이 있었대요. 그런데 자식이 온갖 개망나니짓을 다하고 다녀요. 참다 못한 아버지가 야단을 쳤겠지요? 그러자 아들이 뭐라고 그런 줄 아세요. "저는 성서적으로 사는 거예요."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바짝 성이 나서 말했어요. "뭐 임마? 성경 어디에 그렇게 살라 하던?" 그러자 아들이 말하더래요. "요한복음 5장 19절을 보세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보세요. 내가 얼마나 성경적인지?" 아버지는 할 말을 잊었대요. 결국 아들은 자기를 닮았던 것이지요.

세상에 부모 자식 관계처럼 어려운 것이 없는 것 같아요. 카를로 콜로디(Carlo Collodi)의 {피노키오의 모험}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피노키오 이야기는 대개 아는 이야기인데 그 이야기가 담고 있는 의미는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에요.

세공 기술자인 제페토라는 노인은 목수인 친구에게서 얻은 나무토막으로 꼭두각시 인형을 만들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게 마음먹은 대로 쉽게 되질 않습니다. 제페토는 아주 어렵게 피노키오라고 이름 붙인 인형을 만듭니다. 하지만 피노키오는 곧 집 밖으로 뛰쳐나가 말썽을 부립니다. 피노키오는 때로는 자기를 만들어준 제페토 노인에게 기쁨을 주기도 하지만, 고통을 줄 때가 더 많습니다. 실수하고, 후회하기를 거듭합니다. 우여곡절 끝에 피노키오는 거대한 상어에 통째로 삼켜지게 됩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아버지 격인 제페토를 만나고, 그와 함께 탈출에 성공합니다. 육지로 돌아온 후 피노키오는 철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다운' 행동을 하게 되고, 그 보답으로 진짜 사람이 됩니다.

제페토와 피노키오의 관계가 부모와 자식의 전형적인 관계가 아닌가 싶어요. 자식은 부모의 고민거리일 때가 많습니다. 물론 그를 통해 기쁨을 맛보는 것도 사실이지만요. 때로는 속썩이는 자식이 고통을 당하면 '그거 당해 싸다' 하고 생각할 때도 있지만, 곧 연민의 정을 느끼고 그의 문제를 풀어주기 위해 마음을 씁니다. 결국 피노키오가 사람이 되는 것은 고통을 통해서입니다. 그 고통속에 들어와 함께 문제를 헤쳐나가는 사랑의 아버지를 발견했을 때 그는 새로운 존재가 되는 것이지요. 그러면 아름다운 부모는 어떤 분들이고, 아름다운 자식은 어떤 이인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책망할 줄 아는 부모

자녀가 원하는 것은 뭐든지 들어주는 부모는 좋은 부모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인간의 원죄를 말합니다. 원죄라고 하면 괜히 불쾌하게 생각하는 분들이 많아요. 아담과 하와가 죄만 짓지 않았더라면…않았더라면 뭐 어쨌다는 거지요? 죄 짓지 않을 자신 있으세요? 기독교가 말하는 원죄는 인류의 조상들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임을 알아야 해요. 우리들 속에는 하나님을 뜻을 거역하려는 그런 뿌리깊은 병폐가 있어요. 조금 어려운 말로는 '죄에로의 경향'이 있다는 거지요. 그래서 자연 상태 속의 사람은 선보다는 악으로 기울어질 가능성이 많아요. 그렇기 때문에 훈련이 필요합니다. 하기 싫은 것도 해야 하고, 하고 싶은 것도 참을 줄 알아야 해요. 욕망을 절제할 줄 알아야 사람이 되지요.

우리는 엘리 대제사장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를 기억합니다. 그들은 대제사장의 아들로서 가업을 이어 제사장이 되었습니다만, 성경은 그들을 가리켜 한 마디로 "불량자"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주님을 무시하고, 불경스러운 말로 모독했어요. 그들은 백성들이 하나님께 바치려고 가져온 제물을 탐욕스런 눈으로 바라보다가 그것을 제사장의 직권으로 가로채곤 했습니다. 하나님을 섬긴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배를 섬긴 것이지요. 심지어는 회막 어귀에서 일하는 여인들하고 동침하는 일까지 서슴치 않았습니다. 엘리가 그런 사실을 알았을 때 그들을 심하게 나무랐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습니다. 세상의 욕망과 쾌락을 추구하는 그들의 마음은 더 이상 바른 소리가 들어갈 수 없었던 것입니다. 비극입니다. 성경은 도처에서 자녀를 엄히 가르치라고 말합니다.

"아이 꾸짖는 것을 삼가지 말아라. 매질을 한다고 하여서 죽지는 않는다. 그에게 매질을 하는 것이, 오히려 그의 목숨을 스올에서 구하는 것이다."(잠23:13)

"매를 아끼는 것은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자식을 사랑하는 사람은 훈계를 게을리하지 않는다."(잠13:24)

하지만 야단만 친다고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야단만 맞고 자란 아이는 사람들 눈치나 보는 겁쟁이가 되거나, 도리어 더 어긋난 길로 가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사랑의 훈도(薰陶; 덕으로써 사람을 감화함)입니다.


이해와 사랑 가운데 존중하는 부모

아이를 꾸짖기 전에 먼저 가져야 할 것이 따뜻함입니다. 정의가 전제되지 않은 맹목적인 사랑이 자식을 망치는 것이라면, 사랑이 밑받침되지 않는 정의는 아름다운 결과를 빚어낼 수 없습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야단을 맞아도 그 속에 담겨있는 진정(眞情)과 따뜻함을 이해하면 마음에 감화가 일어나지 않던가요? 하지만 감정을 앞세운 훈계나 꾸지람은 반발심만 불러일으킵니다. 자녀를 노엽게 하지 않는 부모가 되어야 합니다. 권위주의적으로 자식들 위에 군림하면서 복종만을 강요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은 저마다 다 생각이 다를 수밖에 없는데, 자식에게 자기 생각이나 가치관을 강요할 때 반드시 갈등이 생깁니다.

자식이 방황할 수 있는 여지를 주면서 기다릴 줄 아는 부모가 되어야 합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아버지를 생각해 보세요. 저는 이 대목을 볼 때마다 감탄합니다. 세상 경험이 없는 자식이 많은 돈을 가지고 집을 나가면 어떻게 살리라는 게 뻔히 보이는 데도 아버지는 아들이 집을 나가는 것을 허용하거든요. 대단한 아버지예요. 저는 그렇게 못합니다. 이 아버지는 집 나가는 자식에게 '다시는 들어오지 말아라. 이제 부자의 인연은 끝이다. 에이, 나쁜 자식' 하면서 욕을 퍼붓지도 않았어요. 다만 기다리는 거지요. 방황의 시간이 끝나면 돌아올 그 아들을 말이에요. 문을 열어놓고, 마음도 열어놓고. 아버지의 그림자가 너무 크면 자식이 클 수 없다지요. 니코스 카잔차키스라는 희랍의 작가는 자기 자서전에서 말했어요. "내 앞에 우뚝 솟은 그는 내가 받을 몫의 햇빛을 막아섰다." 아버지가 너무 크면 자식이 죽어요. 자식을 철저히 믿고, 사랑으로 인내하는 부모가 그의 인격을 만드는 겁니다. 저는 이걸 이제서 조금씩 배워요.

그런데 참 중요한 것은 아버지나 어머니가 언제가 그 자리에 계심을 자식이 확신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탕자는 집에는 아버지가 계심을 알았어요. 돌아가야 할 집이 있다는 것을 확신했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과연 자녀들에게 언제나 돌아와 안길 만한 든든한 집이 되고 있는지요? 자녀들을 위해 늘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부모의 모습을 본 사람은 때로는 빗나가도 돌아오도록 되어있어요. 과외 공부시키고, 학원에 보내는 것이 교육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모습을 자녀들이 자연스럽게 보고 자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참 교육이에요. 웬만한 일에는 흔들리지 않는 내면의 중심을 간직한 부모가 되어야 해요. 그래야 자식들이 세상에서 살다가 힘들면 돌아와 안기지요.


아름다운 자녀

그러면 이제 아름다운 자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아야 할 텐데요. 성경은 "부모를 공경할 줄 알아야 한다"고 가르쳐줍니다. 부모님은 세상에 있는 하나님의 대리자이거든요. 우리 생명의 근거가 그분들이란 말이에요. 물론 용납할 수 없을 정도록 망가진 부모를 가진 분들도 있을 거예요. 참 가슴 아픈 일입니다. 부정하고 싶어도 어쩝니까? 하나님은 그분을 통해서 우리를 이 세상에 내신 걸요. 미국에 있는 권혁순 집사가 홈페이지에 '아버지'라는 글을 올렸어요. 미국에서 성경공부하다가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모양이에요. 다른 이들이 각자의 기억을 끌어올려 아버지에 대해 말할 때 권집사는 침묵을 지켰대요. 그런데 그는 이렇게 썼어요.

"남들이 자랑하는 것처럼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다고 내세울 만한 것이 없지만, 그래도 저는 감사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였답니다. 아버지가 계셨기에 이 세상에 내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보다 더 큰 은혜가 어디 있겠습니까? 나의 존재의 근원이시자, 비록 내가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도 분명 나를 위해 모든 것을 주신 분이라는 것을 믿습니다. 저에게 생명을 허락하신 아버지 감사합니다."(권혁순 집사)

물론 이 아버지는 하늘 아버지이기도 하고, 땅의 아버지이기도 합니다. 잘났든 못났든 자기 부모를 공경할 줄 아는 사람, 기쁘시게 하는 사람이 큰 사람입니다. 반포지효(反哺之孝)라는 말이 있어요. 까마귀 새끼가 자란 뒤에 어미에게 먹을 것을 물어다 준다는 것이지요. 부모를 공경하는 마음자리에 들어설 때 우리는 다시 태어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겁니다. 부모가 못났다고 원망하거나, 비웃어서야 되겠어요? 대홍수 이후에 뭍으로 내려온 노아의 가족들은 포도 농사를 지었습니다. 어느 날 노아가 포도주를 마시고 취해서, 벌거벗은 채 잠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아들 함이 그 모습을 보고 가서 형제들에게 알렸어요. 셈과 야벳은 겉옷을 가지고 가서, 둘이서 그것을 어깨에 걸치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아버지의 벌거벗은 몸을 덮어 드렸습니다. 그들은 아버지의 벌거벗은 몸을 보지 않으려고 얼굴을 돌렸답니다(창9:18-23). 때로는 부모의 허물을 덮어줄 줄 아는 자녀가 될 때 하나님이 예비하신 복을 받게 됩니다.

세상에서 참 쉽고도 어려운 것이 부모 자식 관계입니다. 하지만 그 관계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배웁니다. 아름다운 관계를 만들기 위해서는 우리 속에 주님을 모셔야 합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부모를 공경(존경)하고, 주님의 사랑으로 자식을 존중할 때 하나님의 영광을 받으십니다. 아무쪼록 우리 교회의 모든 가정들은 부모에 대한 존경과 자식에 대한 존중이 잘 맞물려서 작은 천국의 모델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등 록 날 짜 1970년 01월 01일 09시 33분 21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