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30. 어둠과 빛
설교자 김재흥
본문 창 15:1-6
설교일시 2014/07/27
오디오파일 s20140727.mp3 [6708 KBy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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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15:1-6
이런 일들이 일어난 뒤에, 주님께서 환상 가운데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아라. 나는 너의 방패다. 네가 받을 보상이 매우 크다." 아브람이 여쭈었다. "주 나의 하나님, 주님께서는 저에게 무엇을 주시렵니까? 저에게는 자식이 아직 없습니다. 저의 재산을 상속받을 자식이라고는 다마스쿠스 녀석 엘리에셀뿐입니다. 주님께서 저에게 자식을 주지 않으셨으니, 이제, 저의 집에 있는 이 종이 저의 상속자가 될 것입니다." 아브람이 이렇게 말씀드리니,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그 아이는 너의 상속자가 아니다. 너의 몸에서 태어날 아들이 너의 상속자가 될 것이다." 주님께서 아브람을 데리고 바깥으로 나가서 말씀하셨다. "하늘을 쳐다보아라. 네가 셀 수 있거든, 저 별들을 세어 보아라." 그리고는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너의 자손이 저 별처럼 많아질 것이다." 아브람이 주님을 믿으니, 주님께서는 아브람의 그런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 짙은 어둠
세월호 참사의 유가족들이 국회 본청과 광화문 광장에서 지난 7월 14일부터 단식농성 중에 계십니다. 그분들의 요구는 철저한 진상조사와 책임자 처벌입니다. 그 요구는 350만 명이 넘는 국민들이 동의하고 서명할 정도로 당연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참사 100일이 지나도록 밝혀진 것 하나 없고 바뀐 것 하나 없습니다. 곡기를 끊고, 죽으면 아이 옆에 묻어 달라는 아빠 엄마들의 얼굴을 보노라면 마음이 먹먹해지고 죄인 된 느낌이 듭니다.

<밀양전>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았습니다. 한전 직원들과 경찰들, 용역들과 오랜 싸움으로 지칠 대로 지친 한 할머니가 조용히 손에 밧줄을 들고 인적이 드문 산속으로 들어가십니다. 목을 매기 좋은 나무를 찾아 두꺼운 나뭇가지 위로 밧줄을 던지는데 뒤에서 쫓아온 다른 할머니가 막아서시고 두 분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서로를 부둥켜안은 채 엉엉 우십니다. “이 더러운 세상에 살면 머하노. 내가 죽어 가지고 이 철탑이 안 되면 죽고 싶은 마음이 확 들어. 너무 싫다. 세상이 싫다. 이 세상이 싫다.”

팔레스타인 가자지구를 향한 이스라엘의 무차별 폭격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지난 7월 8일 시작된 공습은 18일 이스라엘의 지상군 투입으로 전면전이 되었고 희생자 수는 급격하게 증가하고 있습니다. 팔레스타인의 사망자만 940명이 넘고 부상자는 6,000명에 육박합니다. 사상자의 80%가 민간인입니다. 가자의 하늘 곳곳에는 한낮에도 폭탄이 만든 검은 구름이 가득합니다. 폭탄이 떨어진 자리, 그곳은 사람들이 평안히 일상을 보내던 곳이었습니다. 거룩한 예배를 드리던 곳이었으며 꿈을 키우던 학교였으며 일상의 행복을 지어가던 가정이었습니다.

너무 어둡습니다. 가까운 곳과 세상 이곳저곳에서 들려오는 소식들이 하나같이 우리의 마음과 영혼을 어둡게 만듭니다. 우리에게는 그런 어둠뿐 아니라 각자 개인적인 일과 관계, 존재에서 문득문득 마주하게 되는 어둠도 있습니다. 이런저런 어둠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습니다. 어둠은 우리의 마음만 어둡게 할뿐 아니라 커다란 돌덩이가 되어 우리의 가슴을 짓누릅니다. 어둠은 자꾸만 우리에게서 삶의 의미를 빼앗아갑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왜 사는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의미는 무엇인지, 앞으로 살아가야할 삶의 지향점이 어디인지 알 수가 없게 만들어버립니다.
어떻게 하면 이 세상에 짙게 드리워진 어둠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우리 안으로 깊게 스며든 어둠의 짓누름을 이길 수 있을까요? 안팎으로 어둠이 가득한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어떻게 사는 것일까요?

• 어둠에 갇힌 사람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리는 아브라함(아브람)에 관한 말씀은 창세기 11장 후반부터 25장 중반까지 길게 나와 있습니다. 그는 아버지 데라와 함께 바빌론 땅 우르에서 살았습니다. 거기서 아내 사라(사래)를 만나 결혼했습니다. 그러다가 아버지 데라를 따라 하란으로 와서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네가 살고 있는 땅과, 네가 난 곳과, 너의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내가 보여 주는 땅으로 가거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주어서, 네가 크게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길을 떠나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그 때 조카 롯과 롯의 가족도 동행했습니다. 그런데 약속의 땅에 도착해보니 그곳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기근이었습니다. 그는 하는 수 없이 이집트로 내려가 더부살이를 하게 되었습니다. 나그네 처지에 빌어먹어야 했기에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속여 그곳 사람들과 바로에게 소개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사라 덕에 한밑천을 챙기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구차하면서도 비루한 삶이었습니다. 다시 약속의 땅으로 올라온 아브라함은 롯과 함께 땅을 두고 갈등을 겪었습니다. 롯은 덥석 좋은 땅을 먼저 선택했고 아브라함은 남은 그 반대쪽 거친 땅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 거친 땅을 두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다시 한 번 약속을 하셨습니다. “네 눈에 보이는 이 모든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아주 주겠다. 내가 너의 자손을 땅의 먼지처럼 셀 수 없이 많아지게 하겠다.”

그 약속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조카 롯이 이웃 나라들의 공격을 받고 포로로 잡혀가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사병들을 이끌고 그 뒤를 쫓아가 롯을 구출해왔습니다. 하나님은 다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아, 두려워하지 말아라. 나는 너의 방패다. 네가 받을 보상이 매우 크다.”

아브라함은 사실 어느 정도 재산을 모았습니다. 양과 염소 같은 짐승이 많았고 그들을 치는 목자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에게는 집에서 낳아 훈련시킨 사병이 삼백 명이 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가나안 땅 거주민들이 보았을 때는 이방인이요 그에게는 자신 명의의 땅이 하나도 없었고 무엇보다도 자신의 피를 물려받은 아들이 없었습니다. 지난날 하란 땅에서 주님께서 하셨던 약속, 땅을 주고 새로운 민족을 이루게 하시겠다는 약속은 성취의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자신에게 ‘보상을 주겠다.’는 하나님께 아브라함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주님께서는 저에게 무엇을 주시렵니까? 저에게는 자식이 아직 없습니다. 저의 재산을 상속받을 자식이라고는 다마스쿠스 녀석 엘리에셀 뿐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아브라함의 답변에는 왠지 좀 따지는 듯한 뉘앙스가 담겨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마음은 어둡습니다. 바빌론에서의 삶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하란에서의 삶도 괜찮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굳이 잘 살고 있던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새로운 약속의 땅으로 가면 그 땅을 너에게 주고 너의 자손들이 바다의 모래같이 많게 하겠다, 하셨습니다. 그 약속 하나 믿고 온갖 고생을 견뎌온 삶이었습니다. 기근, 부인을 팔아먹어 연명함, 조카로 인한 고생 등등. 재산을 모은 것은 사실이지만 자손과 땅에 대한 약속은 하나도 이루어진 것이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깊은 어둠의 절망 속에서 하나님께 말씀을 드립니다. “주님께서는 저에게 자식을 주지 않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지금 깊은 어둠에 잠겨있습니다. 갇혀있습니다. 오래도록 반복적으로 지켜지지 않는 약속은 사람을 지치게 만들고 그의 영혼을 어둡게 만듭니다.

• 장막 밖에서 별을 보다
여러분이 하나님이시라면 이 깊은 어둠의 절망 속에 있는 아브라함에게 무어라 말씀하시겠습니까? 그를 어떻게 위로하고 북돋아주시겠습니까? 이미 여러 번 아브라함에게 한 약속을 지키지 못한 상태입니다. 그렇게 십 수 년이 흘렀습니다. 계속적으로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자신을 향해 대어들 듯 말하는 아브라함에게 무어라 말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장막 바깥으로 데리고 나가십니다. 그리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늘을 쳐다보아라. 네가 셀 수 있거든, 저 별들을 세어 보아라. 너의 자손이 저 별처럼 많아질 것이다.”

‘장막 밖으로 나간다.’는 것은 상당히 상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어떤 하나의 문제에 직면해서 그것에만 골몰하다가 그 문제 속에 매몰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다보면 작은 문제도 큰 문제가 되고 그것만이 전부인 듯 생각하게 되고 그것이 해결되지 않는 한 우리에게 평안은 없습니다. 그럴 때 필요한 것이 ‘장막 밖’에 서보는 것입니다. 좀 다른 시각에서 그 문제를 보는 것이죠.

조화순 목사님이 들려주신 이야기가 기억납니다. 조화순 목사님은 노동운동과 민주화운동을 해오신 목사님으로 감리교의 크게 존경받는 어른이십니다. 조 목사님께서 젊은 시절 노동운동을 하시다가 안기부에 끌려가신 적이 있으셨습니다. 본래 당당하신 목사님이시지만 젊고 건장한 안기부 직원들에 의해 끌려가니 덜컥 겁이 나셨답니다. 여직공들을 통해 들은 이야기, 그곳에 끌려가면 여자로서 견디기 힘든 모욕적인 고문을 당한다는 이야기가 생각났던 것입니다. 취조실에 끌려가 의자에 앉고 보니 앞쪽에 여러 남자들이 쭉 앉아있습니다. 이것저것 질문을 해대는데 당최 겁이 나서 아무 말도 못하겠고 몸이 계속 떨립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무슨 유체이탈처럼 자신의 몸에서 자신의 영혼이 쑥 빠져나가 옆으로 나가 서게 되었습니다. 옆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았습니다. 남자들이 쭉 앉아 말도 안 되는 질문들을 하고 있고 자기는 정말 무슨 죄인처럼 아무 말도 못하고 떨떨 떨고 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 광경이 우스워 보이는 겁니다. 아니 내가 무슨 죄졌어. 저들은 뭐라고 나를 꾸짖듯 말하는 거며, 나는 또 왜 저렇게 떨고 있는거야. 아 우습다. 그러고는 하하하 웃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그 때 밖으로 빠져나와 있던 영혼은 다시 몸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고 계속 하하하 웃자, 안기부 직원이 날카롭고 무서운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니 이게 미쳤나. 여기가 어딘지 알고 웃고 있어?” 이에 조 목사님이 바로 이렇게 답하셨답니다. “여기가 어디긴 어디야, 사람 사는 데지. 너도 사람이고 나도 사람이야. 이거 왜 이래.” 그때부터 조 목사님은 담대함을 회복하시고 그 안기부 직원들을 상대로 일장 설교를 하시게 되었고 나중에는 안기부 직원 가운데 목사님의 팬까지 생기신 일이 있답니다. 조화순 목사님께서는 그 신비한 체험을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고 고백하셨습니다.

‘장막 밖에 선다는 것’에는 그런 의미가 있습니다. 문제적 상황과 하나로 얽힌 나 자신을 다르게 보는 것입니다. 기존의 사고와 생각의 틀에서 벗어나 새롭게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에 이끌려서 더 크고 넓은 시각으로 나와 그 문제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영원의 시간 속에서 나 자신과 그 문제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조금씩 달리 보입니다. 나도 문제도 세상도 달리 보입니다.

장막 밖으로 나온 아브라함은 밤하늘의 별을 보았습니다. 다른 날에도 수없이 보았던 별들입니다. 그런데 그날은 별들이 다르게 보였습니다. 주님은 그 반짝이는 별들을 통해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의 자손이 저 별처럼 많아질 것이다.” 무의미하게 빛나던 별들이 이제 약속의 별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다시 한 번 새롭게 하나님을 믿기로 한 것입니다. 상황이 바뀐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를 짓누르던 어둠은 사라졌습니다. ‘지금 당장’ 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 ‘언젠가는’이라는 마음을 먹게 되었습니다. 좀 더 의연하게 자신의 길을 가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성경 말씀은 이렇게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주님을 믿으니, 주님께서 그런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하나님께서 의롭게 여겨주시는 믿음은 그런 믿음입니다. 자신의 장막 안에서 온갖 욕망과 어둠에 사로잡혀 그것 하나에만 골몰하는 것이 믿음이 아닙니다. 욕망과 어둠의 장막 밖으로 나가 새로운 공기를 마시는 것입니다. 작은 별빛을 큰 언약의 증표로 마음에 새기는 것입니다. 포기할 수 있지만 포기하지 않고 다시 한 번 나를 넘어 의연하고 새롭게 길을 떠나는 것입니다.

• 이어지는 빛 이야기
이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한 개인의 이야기로 끝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살펴보면 수많은 아브라함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유다는 주전 587년에 바빌로니아에 의해 멸망을 당합니다. 그 때 수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바빌로니아에 포로로 끌려갑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노예살이를 했고 그발강가에 모여 살았습니다. 그발강. 그곳은 바빌로니아의 바빌론과 우르 사이에 위치한 강입니다. 그곳에서 노예로 살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주전 538년 바사 왕국의 고레스 왕이 바빌로니아를 멸망시키고 새로운 칙령을 발표함에 따라 고향땅에 돌아가 살 수 있는 자유가 주어집니다. 그러나 이미 많은 유대인들이 바빌로니아의 생활에 익숙해져 있었습니다. 야훼 신앙도 상당 부분 무너져 있었습니다. 이사야서 40-55장(제2이사야)에는 바빌로니아 포로기의 이스라엘 사람들의 심정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이사야 49:14에는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런데 시온이 말하기를 “주님께서 나를 버리셨고, 주님께서 나를 잊으셨다”하는구나.’ 하나님께 버림받았다는 것은 그 누구도 그들과 함께하는 이가 없었다는 말입니다. 철저히 버림받았다는 생각은 그들의 믿음을 어둡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스룹바벨과 에스라, 느헤미야 같은 지도자들이 중심이 되어 많은 이들이 고향땅, 약속의 땅, 이스라엘로 돌아옵니다. 그때 그들은 소위 아브라함의 루트를 따라 귀환합니다. 4만 명에서 5만 명에 이르는 이들이 아브라함과 똑같이 우르와 하란을 거쳐 약속의 땅으로 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황폐한 땅이요 무너진 성전과 성벽이었습니다.

새로운 수많은 아브라함들은 눈앞이 깜깜했습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뭐가 하나님의 약속이며 뭐가 약속의 땅이란 말입니까? 성전과 성벽은 다 허물어져 있었고, 주변 부족들은 이 낯선 사람들을 반기지 않았고, 동족들 간에 서로를 노예 삼는 일까지 벌어지는 등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된 것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다시 한 번 깊은 어두운 장막 안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때 새로운 예언자(제3이사야)가 등장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예루살렘아, 일어나서 빛을 비추어라. 구원의 빛이 너에게 비치었으며, 주님의 영광이 아침 해처럼 너의 위에 떠올랐다. 어둠이 땅을 덮으며, 짙은 어둠이 민족들을 덮을 것이다. 그러나 오직 너의 위에는 주님께서 아침 해처럼 떠오르시며, 그의 영광이 너의 위에 나타날 것이다.”(이사야60:1,2)

‘구원의 빛이 너에게 비치었다.’, ‘주님의 영광이 아침 해처럼 너의 위에 떠올랐다.’는 말은 결국 주님께서 이스라엘의 죄를 용서하시고 다시 그들과 함께하시며 주님께서 친히 영광의 날을 이루시겠다는 약속의 말입니다. 포로기 이후의 아브라함 후손들은 그 말씀에 의지해 하나님께 버림받았다는 어두운 생각에서 벗어나,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믿음으로 무너진 성벽을 보수하고 새로운 이스라엘을 세워나가게 됩니다.

• ‘함께함’이라는 빛
이번 주 화요일 7월 29일은 빈센트 반 고흐의 124주기가 되는 날입니다.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이라는 그림을 보면 한 마을이 나옵니다. 검파란 밤하늘에는 밝은 노란색의 달과 별이 떠있고 대기는 파도처럼 하얗게 소용돌이 치고 있습니다. 그 하늘 아래로 작은 시골마을이 펼쳐져 있습니다. 밤이 찾아온 마을의 집들에는 노랗게 불이 밝혀져 있습니다. 하늘의 달과 별도 노랗고 마을 집들의 창문도 노랗습니다. 어느 해설가에 따르면 고흐의 그림 속에 나타난 노란색은 ‘신성한 사랑’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그렇게 보자면 <별이 빛나는 밤>에는 자연을 통한 신성한 사랑이 달과 별에 충만히 나타나고 소박한 일상을 살아가는 가난한 시골마을 집들에도 나타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유독 그 그림에서 한 건물에만 노란빛이 보이지 않습니다. 바로 마을 정중앙에 높은 첨탑으로 솟아있는 교회입니다. 교회에는 불이 꺼져있습니다. 단지 밤이라, 예배 시간이 아니라 불이 꺼져있다기보다는 고흐가 보기에 교회에는 ‘신성한 빛’이 보이지 않았기에 의도적으로 그렇게 표현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고흐는 한 때 전도사였습니다. 목사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전도자의 길을 가려고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벨기에의 한 탄광촌에 설교자로 파송 받아 그곳의 광부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광부들과 똑같이 생활했습니다.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누어주었습니다. 주민들처럼 허름한 옷을 입고 생활했습니다. 그러나 그 지역의 교회지도담당자는 고흐가 마을의 영적인 지도자로서 교회의 품격을 떨어뜨린다며 설교권을 박탈했습니다. 고흐는 교회를 떠났습니다. 그는 어느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습니다. “종교가 간절할 때면 교회에 가기보다는 차라리 밖으로 나가 별을 그린다.” 여기서 종교, 기독교는 어둠이 가득한 장막이고 그 장막 밖으로 나가 별을 그린다는 고흐는 아브라함을 닮았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빛이 되라고 주님은 이 땅에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그런데 빛의 사명을 감당하기는커녕 교회는 세상의 어둠을 가중시키고 있습니다. ‘신성한 것이 간절해질 때면 교회에 가기보다는 차라리 밖으로 나가 별을 그린다’는 고흐의 말은 참으로 가슴을 아프게 합니다. <별이 빛나는 밤>의 그림에서 교회에서 밝게 빛나야 하는 노란 빛을 지우고 검은색을 칠한 것은 혹시 고흐가 아니라 주님이 아니실까요? 고흐를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물으시는 것만 같습니다. 이 어두운 세상을 밝힐 너희 빛은 어디에 있느냐? 교회가 과연 이 시대의 어둠을 몰아내는 빛의 사명을 감당하고 있느냐?

고흐는 단순히 한 명의 화가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인간이 발휘할 수 있는 아름다운 정신을 끝까지 밀어붙여 인류가 오래도록 바라보고 나아가야 하는 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고흐의 삶을 살펴보면 결코 고흐 혼자만의 힘으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고흐가 어렵고 힘든 길을 갈 때 옆에서 변치 않는 지지자가 되어주었던 동생 테오가 있었습니다. 고흐 그 자신이 영혼의 어두운 밤을 지날 때 동생 테오는 그의 곁을 꿋꿋하게 지켜주었습니다. 형을 끝까지 믿어주고 지원해주었습니다. 형의 그림과 글에 깊이 공감해주었습니다.

이 시대에 깊게 드리운 어둠이 있습니다. 그 어둠 속에서 피눈물을 흘리는 이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 어둠을 이길 수 있는 길은 ‘함께하는 것’입니다. 종종 어려움에 처한 분들을 찾아가, 작은 일이라도 뭐 해드릴 것이 없냐고 여쭈어 보면 ‘그냥 이렇게 찾아와 주는 것만으로도 힘이 된다.’라는 말씀하시는 경우를 많이 보았습니다. 함께하는 것이 빛입니다. 함께함을 통해 우리는 어두운 장막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어두운 세상보다 더 어두운 교회, 그 교회를 다시 환하게 밝힐 길이 여기에 있습니다. 이 시대의 어둠과 우리 영혼에 깊게 드리운 어둠을 몰아내는 방법도 여기에 있습니다. ‘함께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러셨듯이 우리는 어려움에 처한 이웃들과 함께해야 합니다.

절망과 후회, 고통과 무의미함이 쏟아내는 어둠에 짓눌리던 예루살렘 귀환 시절에 새로운 예언자(제3이사야)를 통해 선포된 말씀도 이와 같습니다. “네가 너의 정성을 굶주린 사람에게 쏟으며, 불쌍한 자의 소원을 충족시켜주면, 너의 빛이 어둠 가운데서 나타나며, 캄캄한 밤이 오히려 대낮같이 될 것이다.”(이사야58:10)

새로운 한 주간이 펼쳐집니다. 우리는 여전히 여러 어둠을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맙시다. 다시 한 번 약속을 믿고 일어섭시다. 이 시대와 우리 영혼에 드리워진 어두운 장막 밖으로 나갑시다.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깊은 신뢰 속에서 새롭게 호흡하며 움츠렸던 가슴을 활짝 폅시다. 이제는 할 만큼 했다고,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어둠이 너무 크고 많다며 포기하지 말고 다시 한 번 어려운 이웃과 함께합시다. 그것만이 어둠을 뚫고 빛으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또한 청파 공동체의 이름으로 ‘함께함’이라는 귀한 빛의 사명을 감당하는 한 주간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14년 07월 27일 12시 02분 30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