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20. 친구인가, 종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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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요15:12-17
설교일시 200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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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인가, 종인가?
요15:12-17
(2001/5/20)


'친구' 열풍의 이면

요즘 <친구>라는 영화에 많은 관객들이 몰린다고 합니다. 영화에 등장하는 대사가 젊은이들의 대화 속에 수시로 등장하더군요. "내가 니 시다바리가?", "친구끼리 미안한 게 어딨노?", "우리는 친구 아이가!" 깡패들의 의리를 다룬 이 영화를 보고 젊은이들의 열광하는 이유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분석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관객이 피보다 진한 우정에 감동하는 것은 '가족 직장 할 것 없이 느슨해지
는 인간적 유대' 속에서 가족의 확장을 통해 강렬한 인간관계의 회복을 그리
워하는 욕망을 드러낸 것이 아닐까?"(정신과 의사 김현수)

마르틴 부버는 모든 참된 삶은 '만남'이라고 했습니다. 누구를 만나 어떤 관계를 맺느냐가 우리 삶의 내용을 결정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인격적인 만남보다는 기능적인 만남에 더 많은 시간을 쏟으며 살아갑니다. 사업에 도움이 될 사람을 만나고, 출세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과의 만남에 열중합니다. 때로는 누군가를 마음에도 없이 '만나 줄 때'도 있습니다. 웃고 떠들기는 하지만 헤어지고 나면 공허합니다. 그 공허함 때문에 우리는 어떤 강렬한 만남을 희구합니다. 현실 속에서는 그런 만남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강렬한 만남을 보여주는 영화에 열광하는 것입니다. 또 다른 분석도 가능합니다.

"공적 시스템이 한 개인의 삶을 보호하지 못하기에 그것을 믿지 못하고 사
적 관계에만 기댄다"(문학평론가 이성욱)

사람들이 이런 영화에 열광하는 것은 무의식적으로 우리 시대의 제도적 혼란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법이 공정하게 집행되지 못하고, 힘있는 이들이 부정의 연결 고리 속에서 자기들을 방어하는 일을 우리는 너무나 많이 보아왔습니다. 급하게 병원에 입원하려 해도 의사의 '빽'이 없으면 어렵습니다. 사람들은 관공서의 정문보다는 뒷문을 이용하는 것이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다보니 연줄 만들기에 열을 올립니다. 이것은 몇 년 전 대통령 선거 때 특정한 지역의 정서를 묶기 위해 한 정치가가 사용했던 말을 생각해보면 됩니다. "우리가 남이가?" 이 말처럼 우리의 현실을 잘 드러내주는 말이 없지 않나 싶어요. 패거리주의, 지역주의, 계급주의의 악마가 우리 사이를 헤집고 다니면서 하는 말이 바로 이것입니다. '무엇이 바른 것이고, 무엇이 선한 것이고, 무엇이 아름다운 것인가?' 하는 질문은 적어도 지도층에 있는 이들의 행태 속에서 발견하기가 어렵습니다. 오해이기를 바랍니다만 그들은 '무엇이 나의 이익이 부합하고, 무엇이 우리 당파의 이익에 기여하는가?'를 묻고 그 답에 따라 처신합니다.


주님의 친구라니?

'친구'라는 단어는 한자로 '붕朋', 혹은 '우友'입니다. 朋은 새의 날개를 뜻하는 '우羽'를 본 딴 글자입니다. 새가 두 날개로 나는 것처럼 친구는 나의 분신입니다. 날개 하나로는 날 수 없는 것처럼 친구 없는 삶은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友는 '손 手'에 '또 又'가 결합된 것입니다. 손이 손 위에 포개있는 형상입니다. 두 손을 마주잡고 있는 이가 친구입니다. 낙담한 이의 손을 잡아주고, 힘겨워하는 이의 힘이 되어주는 이들이 친구예요. 그러나 相扶相助를 미덕으로 하는 친구 관계는 자칫 잘못하면 깡패의 의리로 변질되기 쉽습니다. 그 관계의 중심 속에 진실이 없으면, 의가 없으면 참 곤란합니다. 진정한 우정이란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놀라운 말을 듣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을 향해 '친구'라고 하십니다. '감히 우리가∼?' 하고 놀라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너무 좋아할 것 없습니다. 한가지 전제가 있습니다.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하면 다시는 종이라고 부르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게 좀 묘합니다. 친구면 평등한 관계가 전제되어야 하는데,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친구라고 해준다니요? 조금 기분이 나빠지려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예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는 주님의 왕권을 전제로 한 친구 관계이지 무작정 평등한 관계가 아닙니다.

고등학교에 입학했더니 선배들이 환영식을 해준다고 모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기대를 하고 갔더니, 사실은 신고식이었습니다. 어느 중학교 출신 아무개라고 자기를 소개하고는 엎드려서 버드나무 몽둥이로 세 대씩 맞는 것이었습니다. 일종의 입문 의식(initiation)이었는데요. 다들 얻어맞아 하늘이 노랗고 어안이 벙벙한데 선배들은 우리에게 이런 복창을 시켰습니다. 우리는 더 얻어맞지 않으려고 목이 터져라 외쳤습니다. "일 학년 위에 이 학년이 있다." "이 학년 위에 선생들이 있다." "선생 위에 하나님이 있다." 그 다음이 문제입니다. "삼 학년과 하나님은 동기 동창이다." 나는 이때까지만 해도 교회에 안 다녔으니까 다소 비겁하기는 했지만 별 양심의 가책 없이 따라했는데, 교회 다니는 친구들은 좀 갈등을 느꼈을 거예요.


종과 친구의 상관관계

자기들이 하나님과 동기 동창이래요? 물론 젊은이들의 치기이겠습니다만, 성경을 잘못 읽으면 우리도 똑같은 잘못을 저지를 수밖에 없어요. 하나님의 벗이라는 말을 잘 이해할 필요가 있어요. 창세기 18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사자와 만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사자는 사실은 하나님이라고 보면 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만난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나이가 거의 100세가 된 아브라함이 자기 장막 앞에 앉아 있었습니다. 문득 어떤 느낌이 있어서 눈을 들어보았더니 낯선 사람 셋이 서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마치 종이 주인을 영접하는 것처럼 달려나가 허리를 조아리고 그들을 영접합니다.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십시오."(3)

아브라함은 그 나그네들을 영접하는 일에 빈틈을 보이질 않습니다. 직접 발 닦을 물을 길어오고, 아내에게는 음식을 장만하라고 이르고, 우리로 달려가 자기 가축 가운데 제일 좋은 송아지를 잡아 멋진 상을 차립니다. 그리고는 그들이 음식을 먹는 동안 나무 아래에 모셔 서있었습니다(8). 그들이 뭐 필요한 것이 없나 해서 대기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아브라함은 이렇게 해서 웨이터들의 선조가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철저히 종으로 처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의 역전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벗으로 대하십니다. 음식을 잘 먹고 길을 재촉하던 주님은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17) 하면서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심판 계획을 들려주십니다. 아브라함은 이제 하나님의 비밀을 나눈 사람이 되었습니다. 비밀의 나눔, 이것이 친구됨의 전제입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역대하20:7, 이사야41:8) 하나님과 흉금이 통하는 사람 아브라함을 가리켜 '주의 벗'이라고 부릅니다.

종과 친구의 갈림길이 어딘지 아시겠지요? 종은 일의 전모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부분만을 이해할 뿐입니다. 하지만 주님의 벗은 모든 것을 다 압니다. 예수님은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다"(요15:15)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아무 것도 숨기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어떻게 사는 것이 사람다운 삶인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인지, 생명의 궁극적인 모습을 다 가르쳐주셨습니다. 때로는 말씀으로, 때로는 삶으로 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비밀을 나눈 사이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친구가 되는 필요조건이기는 하지만 충분조건은 아닙니다. 이제 우리가 주님의 친구가 되기 위해서 꼭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일입니다. 이 땅에서 주님이 하시던 일을 행할 때 우리는 그분의 친구가 됩니다. 그분이 하시던 일이 뭐냐구요? 다 아시지 않습니까? 그것을 하십시오. 사랑 말입니다. 이때 사랑은 '어쩐지 맘에 들어' 어쩌구 하는 감정이 아니라, 의지적인 행동입니다.


'주님의 벗'의 표지

우리가 그분의 친구인지 아닌지를 알아볼 수 있는 표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맺는 열매입니다. 열매를 보아 그 나무를 안다 하였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택하여 세우신 것은 열매를 맺게 하려는 것입니다. 악독과 탐욕과 분열의 열매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으면서 기독교인이라고 하면 참 곤란합니다. 제가 아름다운 열매를 많이 맺으며 살지는 못하지만, 저건 아니다 싶은 후배가 나하고 아주 가깝다는 듯이 말하고 다니는 것을 보면, 마음이 아주 불편해지곤 합니다. 주님도 그러시지 않을까요? 아주 민망한 일을 저질러 놓고는 자기의 무죄를 주장하기 위해 주님의 이름을 들먹이는 이들을 보면 주님도 고개를 돌리고 싶으실 거예요. 우리가 맺어야 할 열매는 '사랑'입니다.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사랑, 서로를 보듬어 안고 어려움을 타개해주기 위해 애쓰는 사랑, 이것이 주님께 속한 생명의 표지입니다.

오늘은 감리교의 창시자인 존 웨슬리의 회심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웨슬리는 주님의 종으로 살았기에 주님의 벗이 될 수 있었습니다. 주님의 영광을 위해 철저히 자기를 낮출 때 주님은 우리를 '친구'로 여겨주십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벗' 혹은 '친구'라는 호칭은 우리가 스스로에게 부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부여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스스로를 '위대하다'고 한다고 위대해지나요? 기독교적인 위대함은 섬김과 희생과 낮아짐의 결과로 주어지는 것이지, 우리가 선언한다고 얻어지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우리가 가장 예수적인 모습으로 살아갈 때, 세상은 우리를 주님의 제자로 알아볼 것입니다. 감리교회가 지금 '위대한 감리교회'를 구호로 내걸고 대형 행사를 준비하는데 참 걱정스럽습니다. 실추된 감리교회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체육관에 수만 명이 모여 '위대한 감리교회' 선언대회를 한다는 발상은 비예수적인 것 같아 씁쓸합니다. 진정한 위대함은 선언을 통해 확보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뜻을 오늘의 삶 속에서 말없이 구현해내는 일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모두가 '주님의 벗', 혹은 '친구'라는 호칭에 부끄러움 없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기를 빕니다.

등 록 날 짜 1970년 01월 01일 09시 33분 21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