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21. 기름과 이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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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시133:1-3
설교일시 200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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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름과 이슬
시133:1-3
(2001/5/27)


조화의 아름다움

저마다 개성이 다른 사람들이 함께 모여 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백인백색이라고 사람들은 저마다 추구하는 바가 다르기에, 갈등을 피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人間"이라는 단어를 생각해보십시오. 사람은 다른 이들과의 관계(間) 속에 있는 존재입니다. 나와 생각도 다르고 살아가는 방식도 다른 이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을 배우고 익힐 때 우리는 성숙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다른 것은 틀린 것이 아닙니다.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을 용납해야 합니다. 아니 존중해야 합니다. 나와 다르다고 해서, 틀렸다고 말하거나 눈을 하얗게 치켜뜨지 말아야 합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나와 똑같은 사람들만 이 세상에 산다면 좋으시겠어요? 저는 못 견딜 것 같아요. 참 재미없는 세상일 거예요. 하지만 나와 다른 이들이 있어 행복합니다. 오늘의 시편은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 때 '연합'한다는 말은 '조화'를 이룬다는 말입니다. 한 사람이 얼마나 성숙한 사람인가는 그가 얼마나 다른 이들과 조화를 이룰 줄 아나를 보면 됩니다. 이것을 예수님은 "평화를 이루는 사람이 복이 있다"(마5:9) 했습니다. 그런 이가 곧 하나님의 자녀라 하셨습니다. 물론 조화를 이룬다고 해서 '자기'(self)의 정체성을 잃어버리면 곤란하겠지요?

미술 시간에 배운 게 생각나네요. "색상대비"라는 것이 있어요. 채도가 반대인 색, 예컨대 빨간색과 녹색을 동시에 보면 그 색들이 본연의 색보다 훨씬 선명하게 보이는 현상을 일컫는 말입니다. 서로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색이기에 서로를 더 도드라지게 만드는 것이지요. 그 색들을 잘 조화시킨 그림들은 우리 마음 속에 아주 강렬한 정서적 감동을 불러 일으킵니다. 어느 색도 자기 본래의 색을 잃지 않았지만, 다른 색과의 조화를 이룸으로써 혼자는 일으킬 수 없는 감동을 일으킨 겁니다.

성가대의 합창을 예로 들어볼까요? 각각의 파트가 자기의 성부를 잘 부를 때, 또 그것이 지휘자의 조율에 따라 조화를 이룰 때 우리의 가슴 깊은 곳에 있는 심금(心琴; 마음의 거문고)을 울립니다. 높고 낮은 음색들이 어울려서 하나의 전체를 이룰 때 우리는 아름다움과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베이스 파트를 맡은 이가 느닷없이 "왜 소프라노는 주선율을 노래하는 데 나는 늘 뒤만 받쳐주어야 하나" 하고 소프라노 파트를 부른다면 합창은 망치는 겁니다. 오케스트라에서 심벌즈를 맡고 있는 이가 자기 역할의 미미함에 화가 나서 아무 때나 심벌즈를 울려댄다면 연주는 망치게 마련입니다. 내 역할을 제대로 알고, 적절한 시간에 그 역할을 감당할 때 우리는 전체를 위해 의미있는 기여를 하는 것입니다.


조화의 중심

그러면 그런 조화는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캔바스에 사용되는 여러 가지 색깔들을 조화시키는 것은 화가의 솜씨입니다. 합창의 다양한 소리들을 아우르는 것은 지휘자의 솜씨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공동체를 조율하는 이는 누구입니까? 물론 목회자들이 중요합니다. 저는 이것을 아주 두려운 마음으로 자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의 중심은 목회자도, 장로도, 어떤 프로그램도 아닙니다. 오직 주님께서만 우리의 중심이 되셔야 합니다. 우리는 다만 맡겨주신 일에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우리는 저마다 다른 색깔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을 조화시키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오늘 시편에서 아름답고 조화로운 공동체의 아름다움을 시인은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 옷깃까지 내림 같다"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은 제사장을 성별할 때 사용하는 기름을 뜻합니다. 그 기름이 흘러넘친다는 말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일을 위해 성별된 사람들, 즉 자기의 소명이 무엇인지를 자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을 때 한 신앙공동체는 아름답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소명은 무엇일까요? 저마다 다 다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가 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찬양하는 이, 가르치는 이, 봉사하는 이, 섬기는 이, 말씀 선포하는 이……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사를 주신 까닭은 공동체를 위해 아름답게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성도를 온전케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엡4:12)

결국 은사는 성도들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고, 그 능력을 주심은 봉사하도록 하기 위함이고, 봉사를 통해서 결국 그리스도의 몸이 서도록 하는 것이 주님의 뜻이라는 말입니다. 바로 이것이 아론의 수염을 타고 흘러 옷깃까지 적시는 보배로운 기름인 셈입니다.


조화로운 삶

소명을 자각하고, 하나님이 맡기신 은사를 가지고 공동체를 섬기려는 이들이 모인 공동체는 어떠합니까? 그것을 시인은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하고 노래합니다. 이슬은 신선함입니다. 누군가가 우리를 보고 이슬 같은 사람이라고 하면 그건 칭찬입니다. 하지만 스모그 같다거나, 폐수 같다는 말을 들으면 곤란합니다. 성경에서 이슬은 항상 하나님의 은총과 연결되어 나옵니다.

"이슬이 진에 내릴 때에 만나도 같이 내렸더라"(민11:9)
"나의 교훈은 내리는 비요 나의 말은 맺히는 이슬이요"(신32:2)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시110:3)
"내가 이스라엘에서 이슬과 같으리니 저가 백합화 같이 피겠고 레바논 백향목 같이 뿌리가 박힐 것이라"(호14:5)

주님 안에서 조화를 이룬 공동체는 이슬 같은 신선함을 세상에 전합니다. 우리 교회의 꿈이 있다면 바로 그런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조화의 결과: 영생(eternal life)

조화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영생입니다. 영생이란 '오래 사는 것'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영생은 '하나님께 받아들여진 삶'을 말합니다. 구원은 하나님께 받아들여짐의 체험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이미 영생을 얻은 사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졌음을 진심으로 믿는다면 우리는 죄와 죽음의 악순환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내 삶이 이미 용납되었음을 알 때 우리는 다른 이들을 용납하고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요일3:14)

오늘 우리는 형제됨을 재확인하기 위해 이 자리에 왔습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영광받으시기 원합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마음 속에도 뿌둣한 감사와 기쁨이 자리잡기를 원합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오늘 이 말씀을 가슴 깊이 새기는 날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등 록 날 짜 1970년 01월 01일 09시 33분 21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