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25. 하늘에 쓰는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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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행9:1-9
설교일시 200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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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 쓰는 편지
행9:1-9
(2001/6/24)


마음에 새겨진 두 개의 이미지

며칠 간의 여행에서 돌아온 제게 사람들은 묻습니다. "어디가 제일 좋았어요?" 좋은 것에 순서를 매겨보라는 것인가요? 그러면 얼른 대답이 나오지를 않습니다. 머리 속을 얼른 훑어봅니다. 맑은 호수와 산, 알프스 산간에 푸른 초원을 배경으로 점점이 박혀있는 집들, 그리고 공원들이 떠오릅니다. 그리고 많은 기념물들도요. 하지만 제게 하나의 이미지로 깊이 박혀있는 것을 여러분들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로마의 교외로 나가면 "바울 참수 교회"가 있습니다. 바울 사도가 처형당한 장소에 세워진 작은 교회당입니다. 관광객들이 많이 찾지 않는 곳이기에 아주 한적합니다. 그런데 저는 그곳에서 고요함을 만났습니다. 나이 많은 수녀님 한 분이 아주 조용히 흰 수건으로 장의자를 닦고 계셨습니다. 이미 정갈하게 닦여진 의자였지만 그분은 마치 기도하듯 공들여 의자를 닦았습니다. 저는 뒤에서 조용히 그 신심어린 행위를 바라보았습니다. 그 몸짓은 기도였고, 감사였습니다. 그것이 제 기억에 새겨진 하나의 그림입니다.

파리 시내 한복판에 있는 생 쉴피스 성당에 들어섰을 때 성당은 텅 비어 있었습니다. 오직 한 사람만이 그 큰 성당을 가득 채우고 있었습니다. 블루진을 입은 초라한 행색의 40대 남자가 맨 뒤에 있는 의자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두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십자가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어떤 사연을 가진 사람이었을까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는 복잡한 도심 속에 살면서도 자기 속에 골방을 마련하고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십자가 앞에 조용히 무릎을 꿇고 있는 사람의 모습은 여행 중에 만난 아름다운 그림으로 남아 있습니다.


옷 벗는 길을 묻다

지난 5월 4일 제가 좋아하는 시인 이성선님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구도자였습니다. 그가 쓴 시는 곧 그의 구도에 대한 기록이었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저는 그의 시 '하늘에 쓰는 편지'를 떠올렸습니다.

밤마다 하늘에 편지를 씁니다.
옷 벗는 길을 묻고자 하여이다.
사랑의 길을 알고자 하여이다.
껍질에서 깨어나는
저 밤누에의
깊은 고통 곁에 함께 있고 싶습니다.
흐린 호롱불 소리 없이 타오르는 밤에
날개를 주소서.
순결한 그 시간에
당신에게 몸을 바치고 싶습니다.
(이성선, [하늘에 쓰는 편지] 중에서)

시인은 자기 삶이 무겁다고 느낍니다. 기독교인은 아니었지만 욕심으로 번잡스러운 자기 삶을 벗고 싶어 그는 밤마다 하나님 앞에 앉습니다. 그리고 옷 벗는 길을 묻습니다. 벗어날 길 없는 '자아'의 옷을 벗고 사랑의 사람이 되고 싶은 것입니다. 그는 자기를 벗고 벗어 마침내 자기에게 날개가 돋기를 기다립니다. 날개가 돋은 그 순결한 시간에 하나님께 몸을 바치고 싶은 것이 그의 소망이었습니다. 소망대로 그에게 날개가 돋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는 세상을 공격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에게 삶은 신비이고, 그렇기에 세상에 있는 어느 것 하나 함부로 대할 수 없습니다. 모두가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 세상 모두를
받들어 공손하면

사는 일이 바로 신비.

사는 일
두려움 없어라.
(이성선, [사는 일이 바로 신비] 중에서)

세상 모두를 받들어 공손하면 사는 일이 바로 신비라는 그의 말은 종교적 태도가 무엇인지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신앙이란 내가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이란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고 있음을 깊이 체험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체험한 사람은 함부로 살 수 없습니다. 내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태우는 불에서 비추는 불로

오늘의 본문은 사울이라는 젊은이의 삶에 나타난 극적인 변화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종교적인 열심에 있어서 다른 이와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그는 열성적입니다. 미지근하고 중립적인 태도를 그는 경멸했을 것입니다. 자기가 믿는 바를 위해 목숨까지도 바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불덩어리입니다. 하지만 그 불이 문제입니다. 남을 태우는 불이어서는 곤란합니다. 하나님은 불이시지만 남을 태워 재로 만들지는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호렙산 떨기나무 불꽃 속에서 모세와 만나셨습니다. 떨기나무는 환하게 타오르고 있었지만, 재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사울은 위협과 살기가 등등해서 대제사장을 찾아갑니다. 그는 자기가 믿는 바를 위해서 못 할 일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를 믿는 이들이 자기의 어머니와 같은 유대교를 혼란에 빠뜨리고 있다고 생각하니 참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는 대제사장의 위임장을 가지고 다메섹으로 갑니다. 예수 믿는 이들을 붙잡아, 결박한 채 예루살렘으로 끌어오기 위해서였습니다.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사울의 그런 열성을 "위협과 살기가 등등해서"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 모습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아름답지는 않습니다. 아무리 명분이 좋다 해도 이런 모습은 바람직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자기의 그런 열성이 하나님을 위한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홀연히 하늘의 빛이 그를 둘러 비쳤습니다. 그는 예기치 못한 사태에 놀라 땅에 엎드립니다. 그리고 한 소리를 듣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이다. 네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사울은 얼이 뜬 채 땅에서 일어나 눈을 떴습니다. 그러나 아무 것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의 손에 이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갑니다. 위협과 살기가 등등했던 그가 남의 도움 없이는 한 걸음도 움직일 수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기가 막힌 일입니까? 그는 이 뜻밖의 사태가 무엇을 뜻하는지를 몰랐습니다. 그는 사흘 동안이나 보지 못한 채 식음을 전폐했습니다. 의도적인 금식이 아니라, 존재의 충격이 그로 하여금 먹는 것을 잊게 만든 것입니다. 그 사흘 동안 그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인생의 허망함이었을까요? 내가 무엇을 보고 듣는 것, 무엇을 기획하고 행하는 것, 그 모든 일들은 내가 가진 본래적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임을 깨달았을까요? 우리는 우리가 누리고 살아가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함부로 삽니다. 내 것이니 내 마음대로 해도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내 것이란 없습니다. 우리가 누리는 것은 다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요나의 사흘이 하나님의 뜻에 대한 새로운 눈뜸의 기간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빛을 잃은 채 보낸 사울의 사흘은 '내 것'이라고 할만한 것이 실은 없다는 것을 절감하는 자각의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아나니아가 찾아와 그에게 손을 얹고 주님의 말씀을 전했을 때 사울은 비로소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본다는 점에서는 이전의 상태로 돌아간 것으로 보이지만, 하나님의 은총으로 다시 보게 되었음을 깨달았기에 그는 전혀 다른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는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위협과 살기 등등한 사람이 아니라,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 말입니다. 그는 새로운 존재로 거듭난 표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여기서 다시 이성선님의 싯귀를 떠올려봅니다.

내 세상 모두를 / 받들어 공손하면 // 사는 일이 바로 신비, // 사는 일 / 두려움 없어라


믿음에 들어간 이의 삶

믿음에 들어간 바울은 이미 생사를 넘었습니다. 그는 믿음에 들어간 자기 삶을 이렇게 표현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 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2: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빌1:20-21)

그는 더 이상 과거에 핏발 선 눈으로 남을 해치기 위해 달려가던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자아라는 껍질에서 깨어나 새로운 존재의 날개를 달기 위해 부단히 달려갑니다. 그의 삶의 모든 순간은 하나님께 바치는 편지입니다. 때로 그의 삶은 하나님께 올리는 질문서입니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나요? 주님은 지금 제가 무엇을 하기 원하십니까? 때로 그의 삶은 하나님께 올리는 청구서입니다. 하나님, 사랑할 힘을 주십시오. 고통받는 이들의 삶을 치유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십시오. 때로 그의 삶은 하나님께 올리는 보고서입니다. 주님의 도우심으로 이렇게 살았나이다.

우리도 지금 삶으로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를 향해 하는 말과 행동은 다 하나님께 쓰는 편지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대하는 방식이야말로 하나님을 대하는 방식임을 자각해야 합니다. 밤마다 옷 벗는 길을 물었던 시인의 진지함으로 살아갈 때 우리는 예수를 닮은 사람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나날의 삶으로 쓰는 편지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소식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등 록 날 짜 1970년 01월 01일 09시 33분 21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