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27. 거울을 보고 난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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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약1:19-25
설교일시 200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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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을 보고 난 후
약1:19-25
(2001/7/8)


성도로 살아간다는 것

예수 믿는 사람들을 가리켜 성도聖徒라고 합니다. 거룩한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호칭'이 왠지 죄송스럽지 않습니까? 스스로를 돌아보면 부끄러움뿐인데 '성도'라니요? 하지만 우리는 도덕적으로 완전하거나 영적으로 흠이 없기 때문에 '성도'가 된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해지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여러분"(고전1:2)에게 문안을 드린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성도인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근거한 것이라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시행하는 자격 시험에 통과해야만 성도가 될 수 있다면 난감한 노릇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에게 복음을 전해줍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다 성도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스스로 죄인 중에 괴수라고 했지만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총으로 '성도'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성도가 되었으니까 맘대로 살아도 되는 것은 아니겠지요. 우리는 성도라는 이름에 걸맞는 삶을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성도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무엇일까요? 바울은 골로새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그 힌트를 주고 있습니다.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 곧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실한 형제자매들에게 편지합니다."(1:2)

성도란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사람입니다. 믿음직하고 착실하다는 말이지요. 다른 말로는 성의誠意를 간직한 사람, 곧 참되고 정성스러운 뜻을 품고 사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의를 간직한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야고보 선생에게 배워보기로 할까요?


듣기는 속히 하라

저는 처음에 이 말이 잘 이해가 안 됐어요. 말하기는 더디 하라는 말은 알겠는데, 듣기는 속히 하라는 말이 무슨 뜻일까 궁리를 많이 했어요. 사람들 사이에 떠도는 소문에 귀를 열어두고 살라는 말인가? 그렇다면 이것은 가십gossip에 민감한 현대인들에게 복음일 거예요. 살을 많이 뺐다고 자랑하는 어떤 연예인이 알고 봤더니 지방 흡입술로 그랬다더라에서 시작해서, '카더라' 통신을 사람들은 많이 즐깁니다. 듣기는 속히 하라는 야고보 선생의 말은 그런 가십을 많이 수집하라는 말은 아닐 겁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 재빠르라는 말로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 참 느린 사람들입니다. 무슨 소리냐고, 나는 집회 때마다 설교를 듣고, 차에서는 기독교 방송만 듣고, 집에 가면 기독교 텔레비전만 본다고 말해도 사정은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을 듣는데 느리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말씀에 응답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사극을 보면 왕이 자기 방에 앉아 있다가 "게 누구 있느냐?" 그러면 즉각 대전 내관이 들어와서, 왕의 말에 복명하지 않습니까? 만약 왕이 부르는 데 내관이 응답하지 않는다면 당장 불호령이 내릴 거예요. 그런데도 우리는 왕의 왕이신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데도 못들은 척하며 살아요. 하나님은 때로는 설교를 통해, 때로는 어떤 상황을 통해, 때로는 어떤 사람을 통해, 때로는 우리가 접하고 살아가는 자연을 통해 우리에게 말을 건네 오시거든요. 우리는 그런 소리에 민감하지 못해요. 세미한 중에 말씀하시는 주님의 부름에 응답하지 못해요. 성도답게 살아가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 빨라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데, 우리가 항상 부재중이거나, 통화중이어서는 곤란합니다. 하나님을 위한 시간을 마련하고 살아야 합니다.


말하기를 더디 하라

다음에는 말하기를 더디 하라고 했는데요. 이것은 성경의 지혜자들은 저마다 가르친 것입니다. 또 우리 삶의 경험도 그 말을 지지합니다. 말을 급하게 해서 덕이 되는 경우는 거의 없어요.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키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잠10:19)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약3:2)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약3:6)

지옥도地獄圖를 보면 집게를 가지고 혀를 뽑는 장면이 나옵니다. 말로 짓는 죄가 얼마나 큰가를 우리에게 상기시키는 대목입니다. 어디에서든 마찬가지지만 교회에서는 특히 말조심해야 합니다. 말을 많이 하고, 말을 빨리 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말을 많이 한다고 해서 그를 존경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자기를 드러내기 위해 말을 하면 할수록 그는 실없는 사람이 됩니다.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키 어렵다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이 탈무드에서 가르친 말은 말의 절제가 얼마나 필요한지를 가르쳐 줍니다. 그들은 말하기 전에 세 황금 문을 지나게 하라고 했습니다.

첫째 문은 "이 말은 꼭 필요한 말인가?"입니다.
둘째 문은 "이 말은 진실한 말인가?"입니다.
셋째 문은 "이 말은 친절한 말인가?"입니다.

할 수 있는 대로 한 템포씩만 느리게 말하십시오. 누군가에게서 어떤 허물이 발견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을 사람들의 귀로 가지고 가지 말고, 기도의 골방으로 가지고 가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과 상의하십시오. 그런 후에 하나님의 뜻대로 하십시오.


성내는 데 더디라

성도들은 성내는 데 더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소한 일에도 화 잘 내는 사람을 보면 낯선 사람만 보면 앙앙거리고 달려드는 강아지 생각이 납니다. 화 잘 내는 사람을 기특하게 여기셔서 하나님이 복을 주신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화火는 화禍를 부르게 마련입니다. 물론 '거룩한 분노'는 꼭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왜곡되고, 불의가 판을 치는 데도 나 몰라라 하고 팔짱만 끼고 있다면 그는 성도라 할 수 없습니다. 성도는 불의한 세상을 향해 '아니요' 하고 외쳐야 합니다. 세상뿐인가요? 내 속에 있는 죄에 대해서도 분노해야 합니다. 그래야 새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의 분노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살리기 위한 분노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향해 화를 내는 것이 나의 성격과 나의 편견에서 출발한 것일 때, 우리는 상대방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히게 됩니다. 화는 불이어서 나도 태우고 상대방도 태워버리고 맙니다.

신실한 성도는 자기 속에 끓어오르는 화조차도 하나님께 가져갑니다. 그것이 기도이고, 그것이 명상입니다. 누군가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그를 향해 분노의 불을 지피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보시기에 우리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오히려 그를 위해 기도하십시오. 그것이 성도답게 되는 길입니다. 습관이 오래 되면 성품이 된답니다. 우리는 모난 사람들이지만, 말씀에 따라 살아가려고 애쓰다보면 우리는 새로운 존재로 변화할 것입니다.


마음에 심긴 도를 온유함으로 받으라

야고보가 말하는 "마음에 심긴 도를 온유함으로 받는 것"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말씀을 듣기만 하면 뭐해요. 그 말씀이 내 속에 뿌리를 내려야지요. 말씀이 뿌리를 내리려면 마음이 부드러워야 합니다. 온유함을 '겸손함' 혹은 '공손함'으로 옮긴이도 있습니다. 전에는 저도 말을 극단적으로 할 때가 있었습니다. "나는 절대로 그렇지 않다". 하지만 사람은 누구도 '절대로'라는 말을 사용할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우리가 누구이길래 장담할 수 있단 말입니까? '절대로'라는 말은 교만한 말입니다. 이런 말을 하는 이에게는 말씀이 들어갈 여백이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이들을 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조금씩 조금씩 그가 자부하던 것들을 거두어가십니다. 모난 자아를 깨뜨리시는 것이지요. 하나님을 믿게 되는 동기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성인이 되어서 믿게 된 이들 중에는 인생살이의 쓴맛을 보고 주님께 나온 분들이 많습니다. 세상에는 확실한 게 하나도 없고, 나 자신조차도 믿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자각할 때, 그는 비로소 두 이레 강아지 귀가 뚫리는 격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게 되는 것이지요.

저는 온유溫柔를 뜻하는 단어가 '흙humus'에서 나왔다는 사실이 참 놀랍습니다. 흙은 모든 것을 받아들입니다. 선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이나 다 받쳐주고, 나중에는 그들을 품에 안아 자기 속에 동화되게 합니다. 온유한 사람은 다른 이를 정죄하는 일에 재빠르지 않습니다. 그는 오래 참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오래 참으시는 것처럼 말입니다. 어느 분은 우리가 다른 사람을 대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를 대하신다면 세상은 혼돈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틀림없는 말씀입니다. 아직도 우리는 미완성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닮지 않으셨다는 사실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모릅니다. 성도라 부름받았으니 우리는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는 말씀을 무릎꿇고 공손하게 받들어야 합니다.


거울을 보고 난 후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는 않는 사람을 가리켜 야고보 선생은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고는 곧 그 모양을 잊어버리는 사람과 같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꼭 이런 경우가 아닌가 싶어요. 말씀을 들을 때는 마음에 찔림을 받기도 하고, 새롭게 살아야겠다는 다짐도 하지만, 교회 문을 나서기만 하면 재빨리 옛 생활에 적응하는 것이지요. 왜 그렇지요? 아무리 바쁘더라도 잠시 멈추어 서서 다시 한번 말씀 앞에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보고, 흉하고 일그러진 자기의 삶을 조금씩 교정해나가려는 노력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말씀Word이 사건event이 되기 위해서는 진지한 성찰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사업을 하는 분들은 날마다 달마다 수입과 지출 사항을 점검합니다. 가정주부들도 마찬가지지요. 공부 잘하는 학생들은 시험이 끝나고 나면 자기가 틀린 문제를 유심히 들여다봅니다. 그래야 다음에는 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영적인 삶을 위해 자기 삶을 돌아보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말씀의 거울에 비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듣기는 더디고, 말하기와 성내기에 빠른 우리들, 온유하기보다는 강퍅한 우리의 실상을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우리의 일그러진 모습을 교정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말씀에는 밑줄을 긋지만, 말씀이 자기 삶에 밑줄을 긋도록 허용하지는 않고 있습니다. 이게 우리의 문제입니다. 물론 우리 자신의 참상을 인정한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겠지요. 하지만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치유와 변화의 시작임을 잊지 마십시오. 자신의 실상을 보고 진정으로 아픔을 느낀다면 지금부터라도 말씀대로 살아가기 위해 애쓰십시오. 우리가 한 걸음 발을 내딛는 순간 주님은 우리를 안아 더 높은 세계로 우리를 이끄실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가 복 받은 이입니다. 오늘 이후 우리의 삶이 성도다운 신실함으로 채워지기를 기원합니다.

등 록 날 짜 1970년 01월 01일 09시 33분 21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