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28. 산 위에 있는 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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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마5:13-16
설교일시 200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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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위에 있는 동네
마태5:13-16
(2001/7/15)


혁명적인 선언

주님은 당신의 제자들이 평생을 두고 결코 잊을 수 없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우리야 이 말씀을 많이 들어서 잘 알고 있지만, 이 말씀과 처음으로 만난 제자들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을 겁니다. 보잘것없는 인생을 살아온 그들이 "세상의 소금이고 빛"이라는 말씀은 가히 혁명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들도 현실이 암담할 때마다 뭔가 지금과는 다른 새로운 세상이 오기를 기다렸겠지요? 하지만 그들 스스로 그 세상을 열어갈 주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척박한 팔레스타인에 태어나 살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간 수많은 匹夫匹婦와 다를 바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의 말씀과 만났을 때 그들의 삶은 우주적인 의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과거의 제자들에게만 해당하는 특권이 아닙니다. 주님은 지금도 보잘 것 없는 우리를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불러 주십니다. 이것은 우리의 진부한 삶에 대한 강력한 도전이고 우리가 풀어가야 할 과제입니다. 하지만 세상의 소금이라고 하기엔 우리 삶이 너무 세상과 밀착되어 있습니다. 세상의 빛이라고 하기에는 우리 삶이 너무 어둡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아름다운 생을 살기 위해서는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살았던 이들의 삶을 유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며칠 전 저는 프랑스인들이 가장 존경받는 인물 가운데 하나인 피에르 신부님의 책을 읽었습니다. 그는 집 없는 사람들을 도우면서 평생을 사신 분인데,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 가운데 당혹스러우면서도 매혹적인 에피소드가 하나 있습니다. 피에르 신부는 1940년대에 이미 파리에 있는 자기 집을 개조해 집 없는 많은 이들에게 잠자리를 제공하고 있었습니다. 소문을 들은 많은 이들이 몰려와서 크리스마스 연휴에는 더 이상의 빈자리가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노인과 아이들이 포함된 한 가족이 신부님을 찾아왔습니다. 피에르 신부는 그들을 그냥 돌려보낼 수가 없었습니다. 이모저모로 궁리를 하던 그는 마침내 우리가 생각하기 어려운 일을 감행합니다. 예배실에 있는 예수님상을 들어내 다락 한쪽으로 치우고 그곳에 그 가족의 거처를 마련한 것입니다. 신령한 사람들이 들으면 화를 낼만한 상황인지도 모릅니다. 종교인의 본분을 망각했다고 근엄한 표정으로 야단을 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피에르 신부님은 우리에게 슬쩍 조크를 던집니다. 어쩌면 이것은 신앙의 본질을 꿰뚫는 말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때때로 나는 노숙자들을 위한 우리의 투쟁이 이처럼 널리 발전하게 된 것이 우리 집에 계시던 예수께서 맨 먼저 당신의 자리를 집 없는 가족에게 내놓으셨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외화내빈의 교회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가장 작은 자의 모습으로 우리 곁에 오신다 했습니다. 배고픈 사람, 목마른 사람, 헐벗은 사람, 나그네 된 사람, 옥에 갇힌 사람, 병든 사람의 모습으로 말입니다. 그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느냐가 곧 우리가 예수님을 대하는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제자들을 보고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이라고 하신 것은 그들의 본질(substance)을 가리키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해야 할 일(mission)이 무엇인지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 당신 자신을 내어주심으로 세상을 성화하는 소금이 되셨고,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빛이 되셨습니다. 그를 믿는 이들이 소금처럼, 빛처럼 살아가려면 그분이 하시던 일을 계속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교회들은 성전을 아름답게 하기 위해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을 저버리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本과 末의 뒤집힘입니다. 피에르 신부님의 이야기는 아주 귀담아 들을만합니다.


"성소의 아름다움은 그 대리석 포석이나 장식물에 달린 것이 아니라, 성소 주변에 주거지 없는 가족이 단 한 가족도 없다는 사실에 달려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언제쯤 깨닫게 될까?"

이 말이 제게는 천둥처럼 크게 울려옵니다. 교회가 가장 아름답게 서는 길은 바로 세상의 눈물을 닦으려 오셨던 예수님의 손발이 되는 것임을 새삼스럽게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교회들이 크고 화려한 건물을 지으려고 애를 씁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크고 화려한 건물은 있는데 그 속에서 예수님의 정신이 질식하고 있다고 한다면 곤란하겠지요? 교회를 교회 되게 하는 것은 건물이나 잘 짜여진 제도가 아니라 예수의 혼입니다. 外華內貧의 교회가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는 않는가 돌아볼 일입니다. 주님이 만일 우리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냐? 너희는 세상의 빛이냐?" 하고 물으신다면 안타깝지만 우리는 "그렇지 못합니다, 주님" 하고 고백할 수밖에 없는 형편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세상을 닮은 우리

우리가 스스로를 너무 존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택함을 입었는데 우리는 여전히 세상의 노예로 살아갑니다. 왕자의 운명을 타고 나 거지의 삶을 사는 것이 죄라고 하더군요. 우리는 이미 죄의 사함을 받았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고, 복음으로 말미암은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죄인으로 살고 있고, 땅에 속한 자처럼 살고 있고, 욕망의 노예가 되어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면 다른 필요한 것들은 주님께서 해결해 주신다는 약속을 받았으면서도 우리는 여전히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긴 채 살아갑니다. 우리는 이미 세상사에 깊이 물들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세상의 재화와 힘을 획득하는 것을 우리 생의 가장 긴급한 과제로 삼고 살아갑니다.

교회도 사정은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여쭙고 거기에 복종하기보다는 세속적인 성공의 기준에 맞추기 위해 동분서주합니다. 한 영혼에 대한 진지한 관심과 사랑보다는 수적인 확장에 온통 마음을 빼앗깁니다. 불의하고 타락한 세상을 향해 하나님의 의를 선포하기보다는 사람들의 욕망을 부추기기 일쑤입니다. 교회는 이제 세상을 닮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세상의 소금으로, 그리고 빛으로 설 수 있겠습니까? 저는 오늘 예언자들을 통해 주시는 주님의 음성에 화들짝 놀랍니다.

"크게 외치라 아끼지 말라 네 목소리를 나팔 같이 날려 내 백성에게 그 허물을, 야곱 집에 그 죄를 고하라"(사58:1)

"그러나 파숫군이 칼이 임함을 보고도 나팔을 불지 아니하여 백성에게 경고치 아니하므로 그 중에 한 사람이 그 임하는 칼에 제함을 당하면 그는 자기 죄악 중에서 제한바 되려니와 그 죄를 내가 파숫군의 손에서 찾으리라"(겔33:6)

"만일 나팔이 분명치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쟁을 예비하리요"(고전14:8)

우리는 소금으로 살지 못했습니다. 빛으로 살지 못했습니다. 세상을 향해 해야 할 소리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세상이 어두운 것은 우리가 빛이기를 포기했기 때문이고, 세상에 불의함이 가득 찬 것은 우리가 소금이기를 포기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대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이미 세상의 소금으로, 빛으로 부름받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라도 우리의 소명에 충실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분노와 애태움으로

우리가 세상의 소금이 되기 위해서는 불의한 세상에 대한 분노가 있어야 합니다. 이를테면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잠자리에 드는 어린아이가 있다는 사실을 인간성의 추문거리로 여기는 아픔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몸부림쳐도 인간다운 삶을 보장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많다는 사실에 대해서 아파하고, 또 그들을 돌보지 않고 외면하는 제도나 체제에 대해서 분노해야 합니다. 분노에 그쳐서는 안 됩니다. 고통 당하는 이들 곁에 서기 위해 스스로의 삶을 절제하고, 그들의 권리를 찾아주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소금의 존재 이유는 자기 자체의 유지가 아닙니다. 스스로를 녹여 맛을 내고, 썩음을 방지하는 것입니다. 죄 없으신 주님은 십자가를 지심으로 영원한 생명을 우리에게 주셨고, 낮은 자들의 식탁에 동참하심으로 삶의 맛을 내셨습니다.

우리가 세상의 빛이 되기 위해서는 스스로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을 그래도 밝게 비추는 빛은 사랑을 연료로 삼아 자기를 불태우는 사람들입니다. 돌아가신 어느 목사님은 초는 스스로를 태움으로 빛을 발하지만, 사람은 다른 이를 위한 애태움으로 빛을 발한다 했습니다. 예수님의 벗들인 소외된 이들에 대한 애태움으로 한 번이라도 눈물 흘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그들의 아픔을 덜어주려고 그들 곁에 다가섰던 사람은 빛의 사람입니다. 장애인들을 친부모 이상의 사랑으로 돌보는 이들에게서 우리는 빛을 봅니다. 그들은 산 위에 있는 동네와 같아서 세상에서 방황하던 많은 이들이 그 빛을 보고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게 만듭니다.


선포, 도전, 부름

예수를 믿는 사람은 많지만 스스로 덕을 세워 다른 이들에게 영적인 감화를 끼치고 살아가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하고, 아름다운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만으로는 '산 위에 있는 동네' 구실을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손과 발이 되고, 그분의 목소리가 되기 시작할 때 우리는 비로소 '산 위의 동네'처럼 희망의 전령이 될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이 말씀은 부족한 우리를 향한 과분한 선언입니다. 동시에 이 말씀은 하나의 '도전'이고 '부름'입니다. 그 놀라운 선언을 감사함으로 받아 세상을 사랑으로 밝히고, 의에 대한 목마름으로 세상을 정화하는 아름다운 이들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등 록 날 짜 1970년 01월 01일 09시 33분 21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