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29. 신앙의 벼릿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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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신33:8-11
설교일시 200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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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벼릿줄
신33:8-11
(2001/7/22)


삶을 곧추세우는 중심이 있는가

한 주쯤 전에 집사님 한 분이 참 재미있게 읽은 책이라면서 시집 한 권을 가져다 주셨습니다. 책을 보니 50대 여성의 일상사가 잔잔한 감동으로 다가왔습니다. 그 중에는 나이 겨우 서른에 자살하고만 한 젊은 여성을 안타깝게 추모하는 시(양정자|{가장 쓸쓸한 일} 중에서 [삶2])가 있더군요. 그녀는 "살아가는 매 순간 순간이 늘 놀라운 감동과 새로운 느낌으로/불꽃처럼 치열하게 타올라야 한다는/다급한 강박관념에 빠졌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삶이 어디 그런가요? 진부하기 이를 데 없지요. 결국 그 여성은 "삶이 너무 지루하고 권태롭고 허허롭기 때문에" 그 치욕스런 삶을 견딜 수가 없어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답니다. 시인은 나이 서른이면 "우리 삶이 지루하고 권태롭고 허허로운 바로 그 점 때문에/오히려 더욱 절절히 살맛이 우러나오는 것임을/이제 조금씩 깨닫기 시작할 나이"라면서 너무 이른 죽음을 애도합니다. 저는 지루하고 권태롭기 때문에 살맛이 절절히 우러나온다는 이 대목을 보면서 알 듯도 하고 모를 듯도 했습니다. 역시 나는 정서적인 지진아구나 하고 자책을 하기도 했습니다. 경험있는 분들에게 한번 여쭈어보아야겠다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할 필요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인은 다른 시에서 자기의 한계를 순순히 고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십이 넘어서도 인생살이에 대해 스스로 터득한 바가 없어서 마음이 헛헛 하고 빈 것 같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의 가방에는 늘 양식인양 남의 책 한 두 권이 담겨있어야 안심이 된다는 것입니다([큰 가방]).

세월이 간다고 인생이 밝아지는 것은 아닌가 보지요? 오히려 헛헛하고 빈 것 같은 마음을 추스리기가 더 어려울는지도 모르겠어요. 아무리 굴러도 일어서고야마는 오뚜기처럼 우리 삶을 곧추세우는 하나의 중심이 있다면 우리는 지금보다는 좀 더 힘있게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역도 선수들이 경기장에 나오면 뭘 하는지 아시지요? 허리에 두른 가죽띠를 단단히 맵니다. 우리 삶에 그런 뭐가 있어야 합니다. 흐트러지기 쉬운 삶을 단단하게 매조지해주는 삶의 원리 말입니다. 그것을 가리켜 삶의 벼릿줄이라 할 수 있을 거예요. 벼릿줄은 그물의 위쪽 코를 꿰어 오므리거나 펼 때 잡아당기는 줄이에요. 그게 없으면 그물은 제 구실을 할 수가 없어요. 우리가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려면 신앙의 벼릿줄이 제대로 서있는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세상을 떠날 날이 가까워진 모세가 그의 후손들을 위해 축복하는 장면 가운데서 레위 지파에 대한 축복의 내용입니다. 여러분 아시는대로 레위 지파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을 위해 구별된 지파입니다. 가나안 땅 정착 초기에는 지방의 성소에서 제사장 노릇을 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 성전이 지어지고 지방에 있는 성소가 문을 닫게 되자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올라와 제사장을 돕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들은 찬양으로 예배를 돕기도 하고, 성전 문지기 혹은 곳간지기를 하면서 살아갔습니다. 나중에는 백성들에게 종교 교육을 시키는 책임까지 지게 되었습니다. 레위인들의 삶은 오늘 우리가 다시 한번 확인해야 할 신앙의 벼릿줄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분별력

신앙의 첫 번째 벼릿줄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분별력입니다. 모세는 "둠밈과 우림이 주의 경건한 자에게 있도다" 하고 축복했습니다. 둠밈(Thummim)과 우림(Urim)이 뭐길래 이렇게 강조되고 있을까요? 둠밈과 우림의 사용법에 대해서는 일치된 견해가 없습니다. 다만 짐작할 뿐이지요. 대체적으로 사람들은 둠밈과 우림은 대제사장이 입은 예복의 가슴 주머니(흉패)에 넣어 보관하고 있다가 어려운 일을 만나 하나님의 뜻을 여쭤볼 때 사용하는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제사장들은 양자택일의 문제 앞에서 긍정 아니면 부정의 답을 그것을 통해 알아낸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을 대신해서 둠밈과 우림이 그들과 함께 있기를 빕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여쭙고 그것을 백성들에게 알리는 역할을 맡게 된 것이지요. 둠밈과 우림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두렵고 떨리는 일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 서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제멋대로 살 수 있겠어요. 안 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여쭙고 그 답을 듣기 위해서 항상 몸과 마음을 정결히 해야 합니다. 영이 잠들어 있으면 안 됩니다. 잠꼬대 같은 소리나 하면 곤란합니다. 그런데 그건 레위인에게나 해당하니 다행이라고 하지 마십시오. 베드로는 주님을 믿는 이들을 가리켜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벧전2:9)이라 했습니다.

왕 같은 제사장으로 부름받은 우리들이야말로 둠밈과 우림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이 세대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여쭙고 그것을 백성들에게 옳게 전해야 할 책임을 진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 했습니다. 우리가 이 세대를 본받는 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둠밈과 우림을 우리에게 맡기셨습니다. 그것은 권력이 아닙니다. 다른 이를 지배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오히려 소명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옳게 분별하고 그것을 백성들에게 전하라는 소명 말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시행하려는 용기

신앙의 두 번째 벼릿줄은 하나님의 뜻을 시행하려는 용기입니다. 하나님이 둠밈과 우림을 레위 지파에게 맡기려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그들이 흠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흠 없는 사람이란 없습니다. 며칠 전 어려움을 겪고 있는 친구를 만났습니다. 그는 사람에 대한 신뢰를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믿었던 사람들이 보이는 뜻밖의 행동에 놀란 것입니다. 그는 존경하는 어느 원로 목사님께 그 문제에 대해 이야기 하다가 사람들에 대한 신뢰를 잃게 된 아픔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러자 그 목사님이 그러시더래요. "이 사람아, 세상에 착한 사람은 하나도 없어." 어떻게 들으면 너무 부정적인 이야기 같아요. 하지만 예수님도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와서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하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대답을 하시기에 앞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막10:17-18). 그래요, 흠 없는 사람은 없어요. 바울도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롬3:10)고 했어요.

하나님이 레위인들에게 그런 역할을 맡기신 것은 불편부당不偏不黨한 그들의 태도 때문이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러 시내산에 머물고 있을 때 기다림에 지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론을 졸라 금송아지를 만듭니다. 그리고 그 송아지 앞에 절합니다. 그 송아지가 백성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신이라는 거지요. 모세가 산에서 내려와 보니까 참 기가 막혀요. 그는 화가 나서 외칩니다. "누구든지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는 내게로 나아오라"(출32:26). 그러자 레위 자손들이 나와요. 그들은 모세의 명령을 받아 패역한 백성들을 죽입니다. 그때 그들은 부모·자식·형제라고 해서 적당히 넘어가지 않았어요. 하나님의 공의를 세우기 위해 그들은 눈물을 머금고 맡겨진 일을 한 것이지요. 오늘 본문 9절에 나오는 것은 바로 그런 상황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신앙인들이 가져야 할 벼릿줄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의 뜻을 받들기 위한 추상같은 엄격함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적당히 굽혀서 가까운 이들을 기쁘게 하면 안 됩니다. 우리처럼 패거리짓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또 있을까요? 낯선 사람이 만나면 제일 먼저 하는 게 연고찾기 아니던가요? 고향과 출신 학교를 따져보다가 그래도 연관이 없다 싶으면, 하다 못해 군대의 인연까지 두루 찾아보고, 어디 한군데라도 인연이 있어야 안심하는 것이지요. 우리 사회를 움직이는 동력은 '원칙'이 아니라 '정'입니다. 저는 군대에 있을 때 사단 참모로부터 자기가 잘 아는 병사 하나를 군종병으로 써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그것은 옳은 방법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군단 참모까지 나서서 그 병사를 받아달라고 인사 청탁을 해왔습니다. 그래도 거절했습니다. 그 병사는 군종병으로 적임자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에 제가 겪었던 여러 가지 어려움은 여러분들의 상상에 맡깁니다.

우리 사회에서 '끈끈한 정의 원리'를 거절하고 '원칙'을 지킨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여러분은 다 경험하셨을 것입니다. '정의 원리'라는 것이 어떻게 보면 인간적인 듯 보이지만, 그게 우리 사회를 병들게 만드는 것입니다. 레위인들은 이런 면에 있어서는 서릿발같았습니다. 가족이니까 하고 슬쩍 눈을 감지 않았습니다. 기준이 달라지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예'와 '아니오'를 분명히 했던 것이지요. 일제 시대 이후 지금까지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이 혼란은 바로 청산해야 할 것을 청산하지 않는 죄 때문입니다. 좋은 게 좋은 게 아닙니다. 옳은 것이 좋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한없이 부드럽고 겸손하고 온유한 사람이어야 하지만, 진리 앞에서는 사자가 되어야 합니다. 레위인들의 그런 용기를 보았기에 모세는 그들이 "여호와께 헌신하게 되었다"(출33:29)고 칭찬하는 것입니다.


주의 법도를 가르치려는 열정

마지막으로 말씀 드립니다. 신앙의 세 번째 벼릿줄은 주의 법도를 사람들에게 가르치려는 열정입니다. 레위인들은 백성들에게 거룩한 백성으로 사는 법을 가르쳤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죄인임을 압니다. 죄를 지어서 죄인인 것이 아니라, 죄인이기에 죄를 짓는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우리 속에는 온갖 죄악이 가득합니다. 그것들은 당분간 우리 속에 갇혀있지만 여건만 맞으면 우리 밖으로 솟구쳐 나와 우리를 지배하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죄가 우리를 사로잡아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끊임없이 자기를 살피면서 깨어있어야 합니다. 죄는 잠에서 옵니다. 우리가 헛된 일에 마음을 팔 때 사탄은 우리 속에 있는 죄를 불러냅니다. 영적인 잠이야말로 죄의 텃밭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잠들려고 할 때마다 우리를 깨워주는 이들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이들입니다. 이보다 아름다운 일은 없습니다. 목사만 그 일에 부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성도로 부름 받은 우리 모두가 그런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한 영혼에 대한 진실한 사랑이 있다면 우리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주의 말씀으로 훈계하고 양육해야 합니다. 그런 열정이 우리 속에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사람들에게 돈벌이를 가르치고, 인생을 즐기는 법을 가르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영생을 얻는 길을 가르치는 것이야말로 거룩한 일입니다. 우리는 그런 일에 부름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오늘의 본문을 통해 우리 신앙의 벼릿줄을 점검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분별력을 가지고 살고 있는지, 하나님의 뜻을 시행하려는 용기가 있는지, 하나님의 뜻을 가르치려는 열정이 있는지……그것이 우리에게 있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지키실 것이고,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을 기쁨으로 받아주실 것입니다. 이제 잠시 거둠 기도를 드리십시다.

등 록 날 짜 1970년 01월 01일 09시 33분 21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