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47. 미리암의 노래
설교자 김기석
본문 출15:19-21
설교일시 2015/11/22
오디오파일 S20151122.mp3 [19233 KBy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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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암의 노래
출15:19-21
(2015/11/22)

[바로의 군마가 그의 병거와 기병과 함께 갈라진 바다로 들어갔을 때에, 주님께서 바닷물을 돌이키셔서 그들을 덮으셨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은 바다 한가운데로 마른 땅을 밟고 건넜다. 그 때에, 아론의 누이요 예언자인 미리암이 손에 소구를 드니, 여인들이 모두 그를 따라 나와, 소구를 들고 춤을 추었다. 미리암이 노래를 메겼다. "주님을 찬송하여라. 그지없이 높으신 분, 말과 기병을 바다에 던져 넣으셨다."]

• 생명 중심적 사고
주님의 은총과 평강이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교회력으로 마지막 주일인 오늘 우리는 지난 날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기다림의 절기인 대림절기를 거쳐 성탄절기, 주현절기, 사순절기, 부활절기, 오순절기를 거쳐오면서 과연 우리 속에 그리스도의 마음이 깊이 자리잡았는지요? 하나님 나라가 우리 가운데서 자라고 있는지요?

세상은 여전히 어둠과 혼돈 가운데 있고, 평화를 염원하는 인류의 꿈을 비웃듯 세계 도처에서 테러와 전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시리아에서 벌어지고 있는 내전 상황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난민이 되어 세상을 떠돌다가 죽어가고 있습니다. 파리 테러 사건은 지금 세상이 얼마나 위험한 곳으로 변하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국내의 정치상황도 어지럽기 그지없습니다. 사람들 사이에 냉소와 허무주의의 바이러스가 빠르게 번져갑니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증오와 절망과 혼돈의 어둠에 끌려 들어가지 않기 위해 애쓰는 이들이 있습니다. 어둠 가운데 작은 등불 하나를 밝혀드는 마음으로 사는 이들 말입니다.

오늘 우리는 출애굽 이야기를 통해 그런 이들과 만나게 될 것입니다. 출애굽기는 압제의 땅 애굽에서 신음하던 사람들을 구원해내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담고 있는 책입니다. 그 이야기의 첫대목에서 우리는 놀라운 여인들과 만나게 됩니다. 먼저는 히브리의 산파들입니다. 강제노역에 시달리면서도 왕성한 생명력을 보여주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보면서 공포를 느낀 바로는 히브리 산파인 십브라와 부아를 불러서 은밀하게 이릅니다. "너희는 히브리 여인이 아이 낳는 것을 도와줄 때에, 잘 살펴서, 낳은 아기가 아들이거든 죽이고, 딸이거든 살려 두어라."(출1:16) 죽음 기계가 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산파들은 바로의 명령을 거슬러 남자 아이들도 살려 두었습니다. 이 일이 애굽 왕에게 보고되자 왕은 산파를 불러 들여 어찌하여 일을 그렇게 처리하였느냐고 묻습니다. 산파들의 대답이 매우 맹랑합니다. "히브리 여인들은 이집트 여인들과 같지 않습니다. 그들은 기운이 좋아서, 산파가 그들에게 이르기도 전에 아기를 낳아 버립니다"(출1:19). 성경은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였으므로 그렇게 하였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한 가지 더 덧붙여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아기를 잉태하고 낳아 기르는 여인들이 가지고 있는 '생명 중심적 사고' 말입니다. 자기 권력의 강화를 최우선의 관심으로 여기는 이들은 자기 일에 방해가 되는 사람을 제거하는 일에 주저함이 없습니다. 타락한 권력은 본래 반생명적입니다. 히브리 산파들은 비록 사회적 위치가 바로에 비해 말할 수 없이 비천하지만 하나님의 마음과 잇댄 채 살던 사람들입니다. 출애굽기의 기자는 하나님께서 그 산파들의 집안을 번성케 하셨다고 말합니다. 권력의 독주로 인해 생명이 질식되고 있을 때 사회의 맨 밑바닥에 있던 여인들이 일어나 바로를 넌지시 꾸짖고 있는 것입니다.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요게벳은 아기를 낳은 후 석달을 숨어 기르다가 더 이상 숨길 수가 없게 되자 아이를 갈대 상자에 담아 역청과 송진으로 물이 새지 못하도록 한 후 나일강에 띄웁니다. 막연히 가져다가 버린 것이 아닙니다. 매월 초가 되면 애굽의 귀족들은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기 위해 나일강에서 목욕을 하곤 했습니다. 요게벳은 바로 그런 정황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입니다. 갈대 상자라고 번역한 테바(tevah)는 놀랍게도 노아의 방주를 뜻하는 단어와 동일합니다. 그러니까 요게벳이 만든 것은 방주인 셈입니다. 요게벳은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후 나머지는 하나님의 뜻에 맡겼습니다. 생명의 주인이신 주님께 생명을 맡긴 것입니다.

출애굽기는 그 갈대상자가 나일강물 위로 떠내려 갈 때 모세의 누이인 미리암은 멀찍이 서서 지켜보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때 '서서'라는 단어는 그냥 우두커니 서 있었다는 말이 아니라 '확실한 자기 입장을 가지고 확고히 서 있다'는 뜻으로 새겨야 한다고 합니다(김이곤, <출애굽기의 신학>, 한국신학연구소, 1989년12월 30일, p.26 참조) 미리암은 어쩌면 미구에 벌어지게 될 일을 머리 속에 이미 그리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침내 바로의 딸인 공주가 갈대 상자에서 울고 있는 아기를 보았습니다. 히브리 사람의 아이임을 알았지만 공주는 그 아이를 불쌍히 여겼습니다. 생명이 속절없이 유린되는 세상에서도 인종과 계급과 피부색을 넘어 연민을 가지고 사람을 대하는 그 마음이 살아 있다면 희망의 불씨는 꺼지지 않는 법입니다. 미리암은 바로 그 순간에 공주 앞에 몸을 드러내고는 아이를 위해 유모를 구해주겠다고 말합니다. 결국 모세는 자기 친어머니인 요게벳의 젖을 먹고 자랄 수 있게 됩니다. 출애굽 이야기를 여는 이 여인들 이야기는 생명이 죽음보다 강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 백성 곁으로
미리암이 또 다시 등장하는 것은 민수기 12장입니다. 출애굽 공동체가 광야에서 여러 가지 시련을 겪고 있을 때였습니다. 여러 가지 우여곡절이 많았습니다. 고단한 행군에 지친 백성들이 심하게 불평을 늘어놓았다가 징계를 받기도 하고, 단조로운 먹을거리에 지친 사람들이 투덜거리기도 했습니다. 모세도 지쳤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 앞에서 불평을 터뜨렸습니다. "이 모든 백성을 제가 배기라도 했습니까? 제가 그들을 낳기라도 했습니까? 어찌하여 저더러, 주님께서 그들의 조상에게 맹세하신 땅으로, 마치 유모가 젖먹이를 품듯이, 그들을 품에 품고 가라고 하십니까?"(민11:12) 모세의 심정이 이해됩니다. 정말 난감했을 겁니다. 그렇기에 그는 자기 혼자서는 이 백성을 다 짊어질 수 없다면서 차라리 자기를 죽여 그런 곤경을 면하게 해달라고 간청합니다.

이런 와중에 민수기 12장은 맥락에서 벗어난 듯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모세가 구스 여인을 아내로 맞이했다는 것입니다. 구스는 에티오피아를 이르는 말이지만 주석에 보면 '미디안'이라고도 되어 있습니다. 모세가 데려온 여인이 미디안 출신의 아내 십보라를 이르는 말인지, 아니면 다른 여인인지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여러 잡족이 어울려 있던 공동체인지라 그 여인이 구스 사람이라는 것이 문제였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모세가 현실의 괴로움을 잊으려고 그 여인에게 과도하게 집착하고 있었던 것일까요? 민수기는 '미리암과 아론'은 모세가 그 여인을 아내로 맞은 것을 두고 모세를 비방하였다고 말합니다. 모세가 적절하게 처신하지 못했다는 일종의 꾸지람이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시지 않았느냐!" 그런데 놀라운 것은 주님의 말씀입니다. 이 모든 상황을 다 아시는 주님은 모세를 비방한 미리암과 아론을 준엄하게 꾸짖으셨습니다. 예언자들에게는 꿈과 환상으로 당신의 뜻을 일러주시지만 모세에게는 얼굴을 마주보고 명백하게 말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모세의 우위를 확실하게 확인해 주신 것입니다. 좀 따져볼 문제가 많이 있지만 다음 대목으로 넘어가겠습니다.

구름이 장막 위에서 걷히고 나자 미리암이 악성 피부병에 걸려서 눈처럼 하얗게 되어 있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미리암의 죄에 대한 징벌이었을까요? 그렇다면 왜 아론은 이런 징벌에서 면제되었을까요? 아론 역시 모세를 비난하는 데 가담하지 않았습니까? 미리암이 주동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일까요? 여성신학자들은 남성중심적 사고가 이 이야기 속에 개입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 것 같기도 합니다. 아론이 중재에 나섭니다. 그는 모세에게 자기들이 잘못을 용서해달라면서 미리암을 저런 비참한 상태에 버려두지 말아 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러자 모세가 주님께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 비옵니다. 제발 미리암을 고쳐 주십시오."(민12:13) 하나님은 이레 동안 미리암을 진 밖에 가두었다가 그 뒤에 돌아오게 하라고 이르십니다. 그런데 성경은 마치 지나가는 말처럼 한 마디를 툭 던집니다. "백성은 미리암이 돌아올 때까지 행군을 하지 않았다."(민12:15b) 의례적인 말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을 통해 우리는 미리암이 이 출애굽 공동체에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 우리는 모세가 하나님께 투덜거렸던 내용을 보았습니다. 그는 '이 모든 백성을 제가 배기라도 했습니까?'라면서 그들을 품고 갈 여력이 자기에게는 없다고 말했습니다. '품'이라는 단어가 참 중요합니다. 모세는 탁월한 지도자이기는 했지만 누군가의 품이 될 수는 없는 사람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의 삶의 자리에 다가가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의 아픔 때문에 함께 눈물 흘리고, 시린 손을 가만가만 쓸어주는 것은 미리암과 같은 여인들의 몫이었을 겁니다. 그렇기에 백성들은 미리암이 돌아오지 않으면 떠날 수 없다고 버텼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출애굽 공동체가 광야에서 보낸 그 고단한 시간을 우리는 단순히 40년이라는 숫자로만 기억하고 있지만, 그 40년 동안 그들이 겪어내야 했던 수많은 우여곡절은 철저히 가려져 있습니다. 그 고통의 시간을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모세의 탁월한 리더십 때문이 아니라 미리암과 같은 따뜻한 돌봄과 섬김의 리더십 덕분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미리암은 백성들이 신 광야 가데스에 머물 때 죽음을 맞이했고 그 자리에 묻혔습니다(민20:1). 그의 죽음은 이렇게 간략하게 처리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전 8세기의 예언자 미가는 미리암을 출애굽을 이끈 3대 지도자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나는 너희를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나왔다. 나는 너희의 몸값을 치르고서, 너희를 종살이하던 집에서 데리고 나왔다.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을 보내서, 너희를 거기에서 데리고 나오게 한 것도 바로 나다."(미6:4)

• 근본적 확신
근거없는 말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넌 후의 상황을 보여줍니다. 뒤로 물러설 수도 없고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하나님은 강한 동풍을 보내셔서 바닷물을 뒤로 밀어내셨습니다. 물이 좌우에 벽처럼 일어서자 백성들은 마른 땅을 밝으며 바다를 건넜습니다. 바로의 말과 병거와 기병이 그 뒤를 쫓아 바다 한가운데로 들어서자 하나님은 바닷물을 본래의 상태로 되돌리셨습니다. 최강을 자랑하던 바로의 병거 부대와 기병들은 바다 속에 수장되고 말았습니다. 15장 1절부터 18절까지는 모세와 백성들이 부른 승전가입니다. 위엄과 능력으로 백성을 구하신 주님의 구원 역사가 감동적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노래는 약속의 땅에 이른 백성들을 영원무궁투록 다스리실 주님께 바치는 찬가로 끝납니다.

그런데 19절부터 나오는 '미리암의 노래'는 뒷북을 치는 것처럼 보입니다. 모세의 노래에 비해서 그 노래는 소략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하지만 학자들은 미리암의 노래가 토라 가운데 가장 오랜 전승에 속한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미리암의 노래가 모세의 노래보다 원본에 가깝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상황을 다시 재구성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모든 백성들이 사지에서 벗어난 후 맥이 풀려 주저앉아 있을 때 그들을 격려하고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하도록 이끈 것은 미리암이었습니다. 21절은 미리암을 '아론의 누이요 예언자'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예언자라는 말은 비전을 가지고 그 백성을 이끄는 지도자를 일컫는 말로 보면 됩니다. 미리암은 출애굽의 단순한 조연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매우 훌륭한 지도자였습니다. 미리암이 앞서 메긴 소리는 소박하지만 본질을 꼭 붙들고 있습니다.

"주님을 찬송하여라. 그지없이 높으신 분, 말과 기병을 바다에 던져 넣으셨다."(출15:21)

단순하기에 강력합니다. 혼돈의 세력, 생명을 억압하는 세력이 아무리 강력하다 해도 하나님을 이길 수는 없습니다. 잠시 동안은 그들이 이기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해가 떠오르면 풀 잎 위에 맺힌 이슬이 스러지는 것처럼 그들은 스러질 수밖에 없습니다.

• 노래는 이어지고
그런데 이런 미리암의 노래는 역사 속에서 반복적으로 들려옵니다. 우리는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의 기도를 잘 알고 있습니다. 아기를 낳지 못해 가슴에 한이 서렸던 여인 한나의 아픔을 하나님은 긍휼히 여겨주셨습니다. 한나는 아기를 잉태하고 또 출산하는 그 놀라운 신비를 경험한 후에 하나님의 역사 섭리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가난한 사람을 티끌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사람을 거름더미에서 들어올리셔서, 귀한 이들과 한자리에 앉게 하시며 영광스러운 자리를 차지하게 하신다. 이 세상을 떠받치고 있는 기초는 모두 주님의 것이다. 그분이 땅덩어리를 기초 위에 올려 놓으셨다."(삼상2:8)

고통의 자리, 소외의 자리에서 살았기에 억울한 자들의 처지를 신원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더욱 절절하게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세상을 떠받치고 있는 기초는 모두 주님의 것입니다. 이 사실을 명심할 때 우리는 절망의 파도에 휩쓸려 냉소의 바다에 휘말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미리암의 노래는 또한 마리아의 노래와도 연결이 됩니다. 마리아는 로마 제국의 지배 아래 있던 갈릴리의 소읍에 살고 있었습니다. 강자들의 폭력에 의해 약자들의 삶이 속절없이 유린되는 현실 속에서 희망을 노래하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성령이 그에게 임하자 그의 내면에서 노래 하나가 솟아올랐습니다.

"그는 그 팔로 권능을 행하시고 마음이 교만한 사람들을 흩으셨으니, 제왕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사람을 높이셨습니다. 주린 사람들을 좋은 것으로 배부르게 하시고, 부한 사람들을 빈손으로 떠나 보내셨습니다. 그는 자비를 기억하셔서, 자기의 종 이스라엘을 도우셨습니다."(눅1:51-54)

미리암과 한나 그리고 마리아의 노래는 모두 한 가지 사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연약한 처지에 있는 이들의 살 권리를 회복시켜주시기 위해 개입하시는 분이라는 사실 말입니다. 바로의 병거와 기병은 강력해 보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무용지물입니다. 교회력의 마지막 주일,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세상을 내다보며 그런 세상을 이루기 위해 한 걸음씩 끈질기게 나아가려는 우리에게 주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15년 11월 22일 11시 31분 22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