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50. 변방에서 시작되는 희망
설교자 김기석
본문 미가5:2-5
설교일시 2015/12/13
오디오파일 S20151213.mp3 [20577 KBy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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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방에서 시작되는 희망
미5:2-5
(2015/12/13)

["그러나 너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의 여러 족속 가운데서 작은 족속이지만,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다. 그의 기원은 아득한 옛날, 태초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해산하는 여인이 아이를 낳을 때까지, 당신의 백성을 원수들에게 그대로 맡겨 두실 것이다. 그 뒤에 그의 동포, 사로잡혀 가 있던 남은 백성이, 이스라엘 자손에게로 돌아올 것이다. 그가 주님께서 주신 능력을 가지고, 그의 하나님이신 주님의 이름이 지닌 그 위엄을 의지하고 서서 그의 떼를 먹일 것이다. 그러면 그의 위대함이 땅끝까지 이를 것이므로, 그들은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들에게 '평화'를 가져다 줄 것이다.]

• 히스기야 시대의 어둠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대설을 지나 동지를 향해 나아가면서 밤이 더욱 길어지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빛으로 오시는 주님을 더욱 기다리게 됩니다. 삶이 분주하기는 하지만 주님을 모실 여백을 마련하기 위해 애쓰고 계시는지요? 정리 수납의 달인들은 옷가지를 정리하려면 일단 서랍에서 옷가지를 다 끄집어 내놓고 보라 하더군요. 마음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지금 우리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꼼꼼하게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후에 버릴 것은 버리고, 붙잡아야 할 것은 꼭 붙잡아야 합니다. 버리지 못해 우리 삶이 무겁습니다. 주님을 기다리는 이들은 자꾸만 자기를 비워 주님이 앉으실 자리를 마련해야 합니다. '님이 오신다'는 전갈은 이미 왔는데, 아직도 우리는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오늘은 주전 8세기의 예언자인 미가와 더불어 하나님으로부터 도래하는 희망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미가라는 이름은 '누가 야훼와 같은가'라는 뜻의 '미가야'의 축약형입니다. 미가는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게 살고 있는가를 묻는 기호로 사람들 앞에 선 사람입니다. 미가가 활동하던 시기는 앗시리아 제국이 세력을 확장하여 근동 세계를 복속시키기 위해 전쟁을 벌이던 혼란기였습니다. 유다 왕 히스기야는 앗시리아의 확장 정책에 반기를 들었습니다. 그러자 앗시리아의 산헤립은 대군을 이끌고 유다를 침공해 46개의 성읍을 초토화시켰습니다. 천혜의 방어 기지이던 예루살렘 남부의 라기스(Lachish)도 무너졌습니다. 유다는 풍전등화의 상황에 몰렸는데, 앗시리아 진영의 자중지란으로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역대기서의 기자는 히스기야의 절박한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 한 천사를 보내셔서 앗시리아 진영의 모든 용사와 지휘관과 장군들을 다 죽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대하32:21).

사람들이 막 한숨을 돌리고 있을 때 미가는 위기가 끝난 것이 아니라고 선언합니다. 미가는 머지 않아 예루살렘이 초토화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유다의 지도층들의 삶이 변하지 않는 한 위기는 지속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백성들을 세심하게 돌보아야 할 지배층들은 자기 배를 불리는 데만 열심일 뿐이었습니다. 미가는 그들을 일러 '정의를 미워하고 올바른 것을 그릇되게 하는 자들(미3:9)이라 일컫습니다. 그들은 백성을 죽이고서 그 위에 시온을 세우는 자들입니다. 지도자라는 이들은 뇌물을 받고서야 다스리고, 제사장들은 삯을 받고서야 율법을 가르치고, 예언자들은 돈을 받고서야 계시를 밝힙니다. 정치, 종교 가릴 것 없이 총체적으로 타락한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 배를 하나님으로 섬기는 자들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주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계신다고 큰소리를 칩니다. 하나님이 계시니 재앙이 닥칠 리 없다고 말합니다. 듣기에는 좋을지 몰라도 그것은 진실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미가는 직정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전합니다. 듣거나 아니 듣거나 그는 외칩니다.

"바로 너희 때문에 시온이 밭갈듯 뒤엎어질 것이며, 예루살렘이 폐허더미가 되고, 성전이 서 있는 이 산은 수풀만이 무성한 언덕이 되고 말 것이다"(미3:12)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지도층들의 호언장담은 '바로 너희 때문에'라는 책망 앞에서 무색해지고 맙니다. '바로 너희 때문에.' 미가를 통해 전달된 하나님의 뜻은 명백합니다. 백성들의 삶이 그들보다 낫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도 자기중심적이고 기회만 된다면 자기 이익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죄 가운데 살고 있는 이들의 어쩔 수 없는 한계입니다. 그렇기에 지도층의 솔선수범이 참 중요합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세상의 비전을 내놓고 그 세계를 열기 위해 자기 희생을 감행해야 합니다. 자기 희생은커녕 남을 희생시킬 방안 찾기에 골몰하는 이들로 인해 지금 우리 사회도 뿌리로부터 흔들리고 있습니다. 주어진 역할을 특권으로 이해하는 이들로 인해 사회적 결속력은 약화되곤 합니다. 그런 세상은 해체를 앞둔 세상입니다.

• 우주적 평화
그러나 미가는 역사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습니다. 세상이 잠시 혼돈 속에 빠져드는 것처럼 보여도 하나님의 구원 의지를 무산시킬 수는 없습니다. 미가는 위대한 비전을 보았습니다. 세상의 모든 나라가 주님의 성전이 있는 산으로 몰려드는 비전 말입니다. 그들은 서로를 격려하며 말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님의 길을 가르치실 것이니, 주님께서 가르치시는 길을 따르자"(미4:2b). 미가가 바라보는 세상은 진리가 왕 노릇하는 세상입니다. 기미독립선언서에서 천명한대로 '힘의 시대'는 가고 '도의의 시대'가 올 것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 말씀을 따르려고 애쓰는 세상! 미가는 그런 세상을 내다보고 있습니다. 비슷한 시기의 예언자 이사야가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살고,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눕는 세상을 꿈꾸었던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이들은 때로는 몽상가처럼 보입니다. 강력한 힘이 충돌하는 세상에서 이런 어처구니없는 꿈을 꾸니 말입니다. 하지만 믿음의 길은 이런 것입니다. 미가는 하나님께서 민족들 사이의 분쟁을 판결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유명한 비전을 제시합니다.

"나라마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나라와 나라가 칼을 들고 서로를 치지 않을 것이며, 다시는 군사 훈련도 하지 않을 것이다."(미4:3)

꿈같은 이야기입니다. 전쟁과 테러의 소식이 끊이지 않는 오늘의 세계에서도 예언자들의 이 꿈은 유효합니까? 어리석어 보여도 믿는 이들은 이 꿈에 붙들려 살아야 합니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힘보다 사랑하려는 힘이 더 크다는 사실을 삶으로 입증해야 합니다. 칼과 창보다 더 강력한 것이 사랑과 돌봄과 이해임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상대를 제거하기 위한 전쟁은 또 다른 전쟁을 부를 뿐입니다. 미가는 사람들이 자기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 앉아서 평화롭게 사는 세상, 아무런 위협도 받지 않는 세상이 도래할 거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미가라는 개인 속에서 탄생한 공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꿈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다면 바로 그런 세상을 만들기 위해 우리 속에 있는 거친 것, 날카로운 것을 제거하는 일입니다.

김준태 시인은 <국밥과 희망>에서 아프게 희망을 노래합니다. 시인은 도무지 희망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현실 속에서 따뜻한 국밥을 먹으면서 자기 마음을 가다듬는다고 말합니다. "어느날 갑자기/수백 대의 이스라엘 폭격기가/이 세상 천지 곳곳을/납작하게 때려 눕힌다 해도/서베이루트처럼 짓밟아 버린다 해도/국밥을 먹으며 나는 신뢰한다/국밥을 먹으며 나는 신뢰한다/인간은 결코 절망할 수 없다는 것을/인간은 악마와 짐승이 될 수 없다는 것을/나는 노래하고 즐거워한다". 국밥을 먹는다는 말은 삶이 아무리 힘겨워도 지속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시인은 인간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고 있는 현실이지만 인간은 짐승이나 악마가 될 수 없다고 굳게 믿으려 합니다. 현실을 모르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런 현실을 넘어설 수 있는 것이 인간 정신의 위대함입니다. 그는 오늘 우리가 처한 현실을 냉소하지 않습니다. 노래하고 즐거워하면서 역사의 부정성을 극복하려 합니다. 이게 바로 믿음입니다. 김준태 시인은 <인간은 거룩하다>라는 시에서 "오오, 새벽에 깨어나면 그대여/우리 이제 흐르는 강물에 발을 적시며/강 건너 마을 사람들을 찾으러 나가자/우리 이제 땅 위의 칼들을 녹슬게 하고/바람이 어찌하여 불어오는가를 귀 기울이자"고 노래합니다. 우리의 '강 건너 마을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서 있는 입장이 다른 사람들, 마음으로 용납하기 어려운 사람들이 아닙니까? 그들과 만나지 않고는 서로를 이해할 수도 없고, 화해할 수도 없습니다. 평화는 마음을 열고 만나는 일에서 시작됩니다.

• 베들레헴 에브라다
다시 미가에게로 돌아가겠습니다. 5장에 이르러 미가는 성탄 시기마다 인용되곤 하는 말씀을 들려줍니다.

"그러나 너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의 여러 족속 가운데서 작은 족속이지만,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다. 그의 기원은 아득한 옛날, 태초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5:2)

베들레헴 에브라다에서 새로운 세상이 시작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베들레헴은 물론 다윗의 고향입니다. 베들레헴이라는 단어만 썼더라면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다윗 가문에서 태어날 위대한 왕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하지만 미가는 '베들레헴'에 '에브라다'라는 말을 겹쳐서 쓰고 있습니다. '에브라다'는 '에브랏 사람들의 땅'입니다. 에브랏은 야곱의 아내인 라헬이 묻힌 곳이기도 합니다. 그곳은 위대한 비전과 아픔이 공존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너 베들레헴 에브라다야'라는 호명 이후에 그 도시를 일컫는 다른 표현이 등장합니다. '유다의 여러 족속 가운데서 작은 족속'이라는 것입니다. 도시의 규모 혹은 인구가 적다는 말일까요?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렇다면 굳이 그런 표현을 써야 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저는 '작다'는 말은 '보잘 것 없다'는 말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미가는 베들레헴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를 수용하는 한편 베들레헴의 새로운 의미에 주목합니다. 그곳은 보잘 것 없는 곳, 사람들이 주목하지 않는 곳, 변방입니다. 새로운 역사는 늘 변방에서 시작되는 법입니다. 세상의 모순이 집결되는 곳, 그래서 세상이 왜 이 모양이냐며 새로운 세상에 대한 꿈이 잉태되는 곳 말입니다.

신영복 선생님은 '중심부'는 '변방'의 자유로움과 창조성이 없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반드시 무너지게 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물론 그 과정은 더디고 완만합니다. 그렇기에 너무 결과에 연연하지 말고 과정 자체를 즐길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큰 아픔은 함께 짊어지고, 소소한 기쁨을 같이 나눌 이웃을 만들라고 권고합니다. 신영복 선생은 그것을 '더불어 숲 정신'이라 지칭합니다. 홀로는 숲을 이룰 수 없습니다. 작은 도시 베들레헴 에브라다야말로 새로운 세상이 시작되기에 적합한 장소입니다.

저는 호주에 가 본 적이 없지만 호주 여행을 가는 이들이 꼭 보고 싶어하는 것이 북부에 있는 거대한 모래 바위인 에어즈 록(Ayers Rock)입니다. 약 6억년 전에 생성 되었는데 단일 바위로는 세계 최대 규모라고 합니다. 둘레를 걷는 데 4시간 정도가 걸린다니 엄청납니다. 평원에 우뚝 서 있는 그 바위는 매우 신비롭게 보입니다. 호주 원주민들은 그곳을 울룰루(Uluru)라고 부르며 신성하게 여긴다고 합니다. 호주 원주민의 말로 '울룰루'는 '그늘이 지난 장소'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왠지 시적으로 느껴지는 이름입니다. 지난 12월 2일에 저를 찾아온 호주 교민이 건네주신 에세이집에서 읽은 내용입니다. '그늘이 지난 장소'에 대한 이야기 끝에 그분은 그늘 속에 무엇이 사는지를 묻습니다.

"그늘 속에는 슬픔, 아픔, 고픔이라는 세 결핍이 산다. 이 세 '픔'은 저마다의 품계를 지닌다. 슬픔이라는 축축한 물기, 아픔이라는 명료한 통각, 고픔이라는 허기진 느낌들. 그 사이에 헤아릴 수 없는 픔의 징후가 수많은 징검다리처럼 놓여 있다. 마치 검은빛과 흰빛 속에 존재하는 무수한 빛들의 슬픈 잔치같이."(남홍숙, <흔들어도 흔들리지 마>, 도서출판 문학관, 2015년 12월 1일, p.81-82)

무슨 말인지 명료하게 이해하기는 쉽지 않지만 뭔가 얼얼한 느낌이 드실 겁니다. 인생은 '슬픔, 아픔, 고픔'이라는 결핍을 견디면서 걸어가는 길이라는 뜻일 겁니다. 저자는 사랑하는 남편과 아들을 잃는 슬픔을 겪었습니다. 그렇기에 더욱 절절합니다. 그늘이 지난 땅에 당도하기까지는 꽤 먼 길을 걸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 더 나아가 온 세상을 다스릴 분은 슬픔, 아픔, 고픔을 아는 분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의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시는 분이 아닙니다"(히4:15)라고 말합니다.

•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
미가는 자기들이 직면하고 있는 현실을 해산을 앞둔 여인의 처지에 빗대고 있습니다. 백성들의 처지는 여전히 위태롭습니다. 적들의 압박 또한 여전합니다. 하지만 새로운 날은 기어코 올 것이고, 그의 기원이 태초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분이 주님의 능력을 가지고 통치하실 것입니다. 그의 통치 안에서 사람들은 '평화'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그런 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의 기원이 태초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분' 다시 말해 하나님과 잇대어 있는 분 말입니다. 그분을 기다리는 이들은 어떤 마음으로 살아야 할까요? 하나님을 등지고 살던 삶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이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미가는 세 가지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공의를 실천하는 것, 인자를 사랑하는 것,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미6:8)이 그것입니다.

공의가 무너진 세상에서 공의를 실천한다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런 위험을 무릅쓰는 이들이 있어 세상은 조금씩 정의의 길로 나아갑니다. 제 한 몸 간수하기도 어려운 세상에서 사람들을 자비로 대하고 감싸안는다는 것은 참 힘겨운 일입니다. 하지만 그 일을 소홀히 하면 우리가 참 사람이 될 가능성이 점점 줄어들게 됩니다. 이 덧거친 세상에서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믿음이란 기꺼이 그런 어리석음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주님을 진정으로 기다린다는 것은 바로 이런 일 속에 뛰어드는 일임을 잊지 마십시오. 어둠이 깊을수록 등불 하나를 밝혀드는 이들이 더욱 필요합니다. 우리는 바로 그 일을 위해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 거룩한 소명에 기쁨으로 응답하며 살기를 빕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15년 12월 13일 12시 15분 50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