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51. 작은 문 만들기
설교자 김재흥
본문 마7:13,14
설교일시 2015/12/20
오디오파일 s20151220.mp3 [12443 KBy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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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벽
오늘 예배 드리는 자리에 나오신 모든 분들께 빛이요 생명의 말씀이신 주님의 은혜가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어느덧 대림절 넷째 주일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성탄절을 앞두고 있습니다. 성탄절이 지나면 이 해의 마지막 주일을 맞이하게 됩니다. 한 해가 또 이렇게 지나갑니다. 올해도 여느 해처럼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만 수시로 들려온 난민들의 소식과 세계 곳곳에서 일어났던 테러의 소식들은 우리들의 마음을 참으로 아프게 했습니다.

터키 해변에 잠자듯 죽어 있는 3살짜리 아이, 아일란 쿠르디의 사진은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습니다. 쿠르디의 주검은 난민들의 삶이 얼마나 힘겹고 고통스러운 것인지를 여실히 드러냈습니다. 그 때까지 아프리카와 중동의 난민들에 대해 우호적이지 않던 유럽의 여러 나라들은 쿠르디의 사고 이후에 크게 입장을 바꾸어 난민들을 받아들여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호의는 충격적인 테러로 움츠러들고 말았습니다. 지난 11월 13일 프랑스 파리 곳곳에서 테러가 일어나 200여 명이 중상을 입고 130명이 사망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에 프랑스와 서방 여러 나라가 테러의 주범으로 주목된 IS이슬람국가를 공습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반 무슬림 정서가 일어났습니다. 프랑스의 극우정당 국민전선의 마리 르펜 대표는 난민 수용을 중단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미국의 공화당 대통령 후보인 도널드 트럼프는 무슬림의 미국 입국을 금지시켜야 한다는 발언을 하기도 했습니다.

파리 테러 사건 이후에 파리 시내에 한 무슬림 사내가 나와 섰습니다. 그는 천으로 두 눈을 가리고 서 있었고 그의 발밑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힌 종이가 놓여 있었습니다. ‘나는 무슬림입니다. 그러나 테러리스트는 아닙니다. 난 당신을 믿습니다, 당신은 나를 믿습니까? 그렇다면 나를 안아 주십시오.’ 그를 지켜보던 프랑스 시민들은 연이어 그에게 다가와 진심어린 마음으로 그를 안아주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그를 안아주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습니다. 그는 한참 동안이나 사람들과 포옹을 하고 난 후 눈을 감쌌던 천을 풀고 말했습니다. “저는 무슬림입니다. 저를 믿고 안아 주신 많은 분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여러분, 무슬림이 테러리스트는 아닙니다. 저 역시 이번 테러 희생자 가족의 슬픔에 깊이 공감하고 있습니다.” 이는 뭔가 감동적이면서도 슬픈 광경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언자 이사야가 꿈꾸었고 수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꿈꾸었던 나라, ‘사자들이 어린양과 뛰놀고 어린이들 함께 뒹구는 참 사랑과 기쁨의 그 나라, 독사굴에 어린이가 손 넣고 장난쳐도 물지 않는 참사랑과 기쁨의 그 나라’는 언제쯤 이루어지는 것일까요? 그리고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런 나라를 우리는 이루지 못하는 것일까요?

11월 14일 광화문에서도 큰 충돌이 있었습니다. 여러 구호를 외치며 행진하던 시위대와 이를 진압하려던 경찰이 충돌했습니다. ‘시위대가 과격했다’는 의견과 ‘경찰이 과잉 진압했다’는 의견이 아직까지 논쟁 중에 있습니다. 경찰과 시위대 사이에는 차벽이 서있었습니다. 조금의 틈도 없이 바짝 붙어 선 대형버스들의 행렬은 그 자체로 하나의 큰 벽이었습니다. 차벽을 사이에 두고 양쪽이 서로를 적대시하며 팽팽히 맞섰습니다. 고성이 오고가고 살의에 찬 눈빛이 오고갔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큰 구렁텅이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 사이에는 큰 구렁텅이가 있어, 이쪽에서 저쪽으로 가려해도 갈 수 없고 저쪽에서 이쪽으로 오려고 해도 올 수 없었습니다. 지옥에 떨어져 불 속에서 고통을 겪던 부자는 그 품에 나사로를 안고 있던 아브라함에게 청합니다. ‘아브라함 조상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나사로를 보내서,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서 내 혀를 시원하게 하도록 해주십시오.’ 그러나 그의 청은 거절당합니다. 그 둘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있어 물 한 방울 전해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 물 한 방울이 단지 목을 추이기 위한 물 한 방울이 아니라 눈물 한 방울처럼 느껴졌습니다. 큰 구렁텅이는 나와 너 사이를 완전히 갈라놓아 서로를 위해 눈물 한 방울 흘려 줄 수 없는 사이를 상징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는 그러한 구렁텅이가 참으로 많습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에 놓여 있는 거대한 분리장벽, 한반도의 허리를 가로지르는 38선, 난민들을 향해 굳게 닫혀 있는 여러 국경의 철책, 인종이 다르다는 이유 하나로 사람을 테러리스트로 몰아가는 매몰찬 시선, 서 있는 자리가 다르고 의견이 다르다고 하여 어느 한 쪽이 다른 한 쪽을 무시하고 멸시하는 관계, 사이가 멀어질 대로 멀어져 그의 고통과 아픔의 소식을 듣고도 내 눈에 눈물 한 방울 나지 않는 관계, 이 모두가 구렁텅이요 벽입니다.

결국 이 세상이 주님이 다스리시는 참사랑과 기쁨의 세상이 되기 위해서는 그러한 벽이 무너져야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일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닙니다.

• 좁은 문
예수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그 길은 널찍하여서 그리로 들어가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너무나도 좁아서 그것을 찾는 사람이 적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생명으로 이끄는 ‘좁은 문 좁은 길’과 멸망으로 이끄는 ‘넓은 문 넓은 길’이 대칭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지적하신 문제는, 생명으로 이끄는 문과 길은 좁아서 사람들이 거의 찾지 않는다는 것이요, 멸망에 이르는 문과 길은 그 끝이 멸망에 이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넓어서 많은 이들이 찾는다는 것입니다.

‘두 가지 길’이라는 표상은 구약 성경의 전통에서도 등장합니다. 신명기 30장에서 모세는 약속의 땅 가나안 진입을 앞두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합니다. “보십시오. 내가 오늘 생명과 번영, 죽음과 파멸을 당신들 앞에 내놓았습니다. 내가 오늘 당신들에게 명하는 대로, 당신들이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길을 따라가며 그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면 당신들이 잘 되고 번성할 것입니다. … 그러나 당신들이 마음을 돌려서 순종하지 않고, 빗나가서 다른 신들에게 절을 하고 섬기면 오늘 내가 당신들에게 경고한 대로, 당신들은 반드시 망하고 맙니다.”(15-18절 중에서)

생명의 길과 죽음의 길, 둘 중에 어느 것을 선택할 것인가의 문제는 사실 결코 어려운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데 이 쉬운 선택이 문제가 되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처럼 죽음에 이르는 길은 넓고 쉬우며 생명에 이르는 길은 좁고 어렵기 때문입니다.

좁은 문과 좁은 길로 들어가라는 예수님의 말씀 속에는 금욕과 절제와 자기 부인의 뜻이 담겨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이 멸망이 아닌 생명의 길로 나아가려면 절제의 문을 통과해야만 합니다. 여러 성인(聖人)들의 절제로 연단된 삶은 예수님의 말씀이 참임을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성 프란체스코는 ‘나는 가난과 결혼했다’며 절제와 금욕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간디는 금욕과 절제를 강조하며 인간의 욕망을 절제하며 사는 것이 인간을 인간다운 삶으로 이끈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그들은 좁고 험한 길을 걸어갔지만 그들의 삶을 통해 참된 생명에 이르는 길을 열어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종종 개인적 차원의 영성과 경건에 국한된 것으로 이해되기도 합니다. 기도와 예배와 헌금과 같은 몇몇 종교적 행위를 위한 절제와 금욕을 이 말씀과 등치시키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면서, 정의와 자비와 신의와 같은 율법의 더 중요한 요소들은 버렸다. 그것들도 소홀히 하지 않아야 했지만 이것들도 마땅히 행해야 했다.(마23:23)”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좁은 길과 좁은 문을 잘못 이해하면 바리새인들과 같은 잘못을 범할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철저한 절제와 금욕생활을 했습니다. 그들은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정확하게 드렸습니다.(눅18:12) 율법에도 정통하여 사람들에게 무엇이 죄인지 무엇이 죄가 아닌지를 가르치기를 즐겨했고 ‘선생님’ 소리 듣기를 좋아했습니다. 의당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는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으며 시장 거리에서는 사람들의 인사 받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들은 물밀듯 밀려오는 헬라 문화로부터 이스라엘 됨을 지켜내기도 했지만 자신들의 삶을 일반 이스라엘 사람들의 삶과 철저히 구분 짓고 살았습니다. 바리새라는 말 자체가 ‘구분되었다’, ‘분리되었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종교적 지식과 경건을 하나의 권력으로 만들어 사람들 위에 군림했습니다. 자신들의 논리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다른 주장을 펴는 이들을 향해, ‘이 율법을 모르는 저주받을 무지렁이들아’(요7:49)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들은 입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과 방법에 대해 말했지만 그들 스스로 하나의 벽이 되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막았던 것이고 그 때문에 예수님께서 비판하신 것입니다.

좁은 길, 좁은 문을 개인적인 금욕과 절제의 의미로만 생각해선 안 됩니다. 너와 나의 관계, 우리와 그들과의 사회적 관계 속에서 그 의미를 살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강조하신 정의와 자비와 신의 이 모두가 ‘관계’를 전제한 개념이라는 점을 잊어선 안 됩니다. 이 세상에서 통과하기 가장 어려운 좁은 문은 무엇일까요? 너무 어렵고 힘들어서 많은 사람들이 쉽게 포기하고 오히려 그 반대쪽에 있는 큰 문으로 돌아서게 만드는 문은 무엇일까요? 일류대학 진학문? 대기업 취업문? 그건 아니죠. 그 문은 좁기는 하지만 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들어가기 위해 경쟁하는 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통과하기 가장 어려운 문은 이런저런 이유로 나와의 관계가 일그러진 너에게 이르는 문이 아닐까요?

저는 그런 맥락에서 오늘 본문에 나와 있는 예수님의 말씀이 이렇게 들립니다. “그 벽에 문을 만들어라. 넓고 크게 만드는 것이 어렵다면 작게라도 문을 만들어라. 벽에 문이 생기면 그리로 생명에 이르는 길이 열린다. 그 작은 문을 만드는 것이 힘들어서 많은 사람들이 장벽을 그대로 두고 살지만 그것은 결국 모두를 멸망에 이르게 할 것이다.”

예수님이야말로 거대한 장벽이 즐비한 시대에 태어나 그 장벽들에 온몸으로 부딪쳐 작은 문을 만들며 사셨던 분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로마의 식민지배라는 장벽, 알맹이는 잃어버리고 껍데기만 남은 채 사람들의 삶을 강하게 옥죄고 있던 율법이라는 장벽에 짓눌려 살아야만 했습니다. 로마인이 아니라 유대인으로 태어났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장벽에 갇혀 살아야 했던 사람들, 바리새인들처럼 철저히 율법을 지킬 수 없어 늘 죄인이라고 손가락질 받으며 살아가던 사람들을 예수님은 찾아가셨습니다. 그 장벽을 만든 사람들, 그 장벽의 존속으로 배를 불리고 안정을 취하던 자들은 예수님을 죄인으로 몰아세웠습니다. 체제를 위협하고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라며 예수님을 죽이려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벽 앞에 굴복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로마인과 유대인, 의인과 죄인,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건강한 자와 병든 자, 남자와 여자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거대한 벽을 넘어 한 사람을 찾아가셨습니다. 여리고 마을의 세리장 삭개오, 사마리아 수가성 우물가의 여인, 베데스다 연못가에 누워 있던 38년 된 병자,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혀온 여인, 죽어 무덤에 놓여 있던 나사로까지…. 우리는 복음서 곳곳에서 벽 사이로 문을 만들고 그 너머로 들어가, 사람들을 위로하고 치유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특히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유대사람들이 두려워서 문을 모두 닫아걸고 있던 제자들에게 다가가신 모습은 예수님의 생애 자체가 문을 만드는 것이었음을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요20:19) 심지어 요한복음 10장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10:7)

• 작은 문
얼마 전, 서울에서 세종시에 이르는 새로운 고속도로가 건설된다는 뉴스보도를 들었습니다. 구리에서 세종시까지 총 129km 길이의 6차로 도로를 2025년까지 6조 7000억 원을 들여 지을 계획이랍니다. 도로가 건설되면 서울과 세종시 간의 시간적 거리를 좁혀 행정 수도의 업무 효율성이 높아질 것이라 전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넓고 빠른 도로를 새롭게 건설하는 것도 이 사회의 발전을 위해 중요하지만 세월호 유족들과 같이 큰 아픔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위로받지 못하고 오히려 고립당하는 이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길과 문을 만드는 것이 이 사회와 국가를 위해 더욱 중요하고 시급한 과제가 아닐까요?

12월 8일 프란체스코 교황은 바티칸에서 ‘자비의 특별 희년’(The Jubilee of Mercy)를 선포했습니다. 그는 자비의 희년을 맞아 믿음의 사람들이 선한사마리아인의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자비로 우리 시대의 모든 이들을 위로해주도록 부름 받고 있으며, 교회는 심판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프란체스코 교황은 하나의 의식을 행했는데 그것은 성베드로성당의 ‘거룩한 문’(Porta Santa)을 연 것입니다. 본래 가톨릭교회는 25년마다 한번씩 이 문을 열어 구원의 은총을 선포해 왔습니다. 이번에는 특별히 제2차 바티간공의회 폐막 50주년을 기념하여 16년 만에 이 거룩한 문을 다시 열게 된 것입니다. 가톨릭 교인들은 교황을 따라 이 문을 통과한 후 고해성사를 하면 죄를 용서받고 천국에 이를 수 있다고 믿어 이 문을 ‘천국의 문’이라고도 부른다고 합니다.

우리도 ‘자비의 문’을 열어야 합니다. 나와 너 사이에서 오래토록 닫혀 있던 문을 열어야 합니다. 너무 오랫동안 닫혀있어 불편하고 괴롭기도 하지만 어느덧 익숙해지기도 한 그 문을 열어야 합니다. 문이 없었다면 작게라도 문을 만들어 열어야 합니다. 서로를 향해 심판하고 정죄하던 모습을 버리고 자비의 마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 문을 통해 서로의 온기가 오고가야 합니다. 눈물 한 방울이 오고가야 합니다. 그렇게 온기가 오고가고 눈물이 오고갈 수 있는 문이 거룩한 문이요 천국에 이르는 문입니다. 그 문을 열 때 네가 살고 내가 삽니다. 그 문을 열지 않을 때 나도 죽고 너도 죽습니다.

광화문 시위 현장의 모습을 담은 사진들을 여러 장 보았습니다. 그 중에 특별히 한 장의 사진이 마음에 남았습니다. 경찰 버스가 길게 차벽을 이루고 있었고 시위대와 경찰이 대치중이었습니다. 시위대는 차벽을 걷어내기 위해 차바퀴에 줄을 묶어 당겼습니다. 경찰들은 그 차벽을 지키기 위해 물대포와 켑사이신을 시위대를 향해 쏘아댔습니다. 한참의 힘겨루기를 통해 양쪽이 모두 지치고 너나 할 것 없이 최루액 때문에 눈물을 흘리며 괴로워하던 그 때, 한 시위 참가자가 생수통을 들고 최루액이 눈에 들어가 고통스러워하던 경찰에게 다가가 생수통을 기울여 그의 눈을 씻어주었습니다. 저는 그 사진 속에서 견고한 벽 사이로 작은 문이 열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느 영국 화가가 그린 크리마스 카드의 그림을 보면 호적조사에 응하기 위해 배가 부른 마리아를 요셉이 나귀에 태워 고향 땅 베들레헴으로 향합니다. 깜깜한 밤 광야 저 너머 하늘에는 메시야의 탄생을 알리는 별이 빛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그림 속에서 마리아와 요셉은 그 별 아래로 갈 수 없습니다. 그들 앞을 거대한 분리장벽이 가로 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장벽은 실제 지금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에 있는 장벽, 베들레헴으로 가는 길에 길게 쳐져있는 분리장벽을 그린 것입니다.

이 땅의 구원을 위해 찾아오고 계신 예수님께서 우리들을 부르고 계십니다. 저 높고 커다란 벽을 넘어설 수 있도록 문을 만들고 길을 만들라고 부탁하고 계십니다. 우리, 그 벽을 완전히 무너뜨리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작게라도 문을 만드는 사람들이 됩시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구렁텅이와 벽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지 맙시다. 그 장벽의 그늘에 짓눌려 눈물 흘리고 있는 이들의 마음을 헤아리는 사람들이 됩시다. 예수님은 문이셨습니다. 우리도 문이 되어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문이 되고 길이 되기를 멈추는 순간 우리 스스로가 그 누군가의 생명길을 가로막는 벽이 될 수 있습니다. 문이 되어 사셨던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다 하면서 벽이 되어 살지 맙시다.

‘문을 만드는 자’라는 귀한 사명을 감당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15년 12월 20일 11시 30분 14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