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52. 한 아기가 태어났다
설교자 김기석
본문 사9:2-7
설교일시 2015/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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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아기가 태어났다
사9:2-7
(2015/12/25, 성탄절)

[어둠 속에서 헤매던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빛이 비쳤다. "하나님, 주님께서 그들에게 큰 기쁨을 주셨고, 그들을 행복하게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곡식을 거둘 때 기뻐하듯이, 그들이 주님 앞에서 기뻐하며, 군인들이 전리품을 나눌 때 즐거워하듯이, 그들이 주님 앞에서 즐거워합니다. 주님께서 미디안을 치시던 날처럼, 그들을 내리누르던 멍에를 부수시고, 그들의 어깨를 짓누르던 통나무와 압제자의 몽둥이를 꺾으셨기 때문입니다. 침략자의 군화와 피묻은 군복이 모두 땔감이 되어서, 불에 타 없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 아이가 우리를 위해 태어났다. 우리가 한 아들을 모셨다. 그는 우리의 통치자가 될 것이다. 그의 이름은 '놀라우신 조언자',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화의 왕'이라고 불릴 것이다. 그의 왕권은 점점 더 커지고 나라의 평화도 끝없이 이어질 것이다. 그가 다윗의 보좌와 왕국 위에 앉아서, 이제부터 영원히, 공평과 정의로 그 나라를 굳게 세울 것이다. 만군의 주님의 열심이 이것을 반드시 이루실 것이다.]

• 어둠을 뚫고
빛으로 오시는 주님을 찬미합니다. 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이 들었던 천사들의 노랫소리가 삶에 지친 모든 이들의 마음에, 평화가 무너진 세상 곳곳에 은은하게 울려 퍼지기를 빕니다. 오늘 우리는 온 우주의 통치자이시면서 가장 낮은 자리에 임하시는 하나님의 성육의 신비 앞에 서있습니다.

앗시리아 제국이 고대 근동 지역을 피로 물들이던 때, 역사의 짙은 어둠이 드리웠던 때 이사야는 어둠을 뚫고 임하시는 하늘의 빛을 보았습니다. “어둠 속에서 헤매던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빛이 비쳤다". 그것은 그렇게 되었으면 하고 바라는 원망사고願望思考(wishful thinking)의 형태가 아니라 이미 실현된 것처럼 서술되고 습니다. 히브리인들이 사용하는 시제는 우리의 어법과 좀 다릅니다. 그들은 신실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 안에 살았기에 약속의 성취를 현재적 사건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어둠의 경험이 깊을수록 빛의 도래는 감동적입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어둠은 암담함, 불확실함, 무력감, 공포를 뜻하는 은유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다고 느낄 때, 강력한 적들에 의해 속절없이 유린당할 수밖에 없다고 느낄 때, 하나님의 은총은 새벽빛처럼 다가옵니다. 그 빛과 만난 이들을 사로잡는 것은 기쁨입니다. 기쁨은 내면 깊은 곳에서 솟아나오는 생명의 기운입니다. 그것은 억제하기 어렵습니다. 그 기쁨은 어둠이 빛으로 전환될 때, 절망이 희망으로 바뀔 때 터져나옵니다. 기쁨은 뭔가에 짓눌렸던 영혼을 해방하여 약동하게 만듭니다. 이사야는 그 기쁨이 멍에를 부수고, 어깨를 짓누르던 통나무와 압제자의 몽둥이를 꺾으시는 하나님의 구원행위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현실만 바라보면 답이 안 나옵니다.

멍에는 강력하여 벗어버릴 수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마치 절세의 영웅 헤라클레스가 질투심에 사로잡힌 아내 데이아네이라가 건네준 네수스의 피가 묻은 옷을 벗어버리지 못해 고통에 몸부림치다가 불길에 뛰어들었던 것처럼, 가끔 우리도 벗어버릴 수 없는 멍에에 사로잡힌 것처럼 답답해 하기도 합니다. 우리를 짓누르는 통나무와 몽둥이는 압도적이어서 도저히 꺾어버릴 수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는 할 수 없어도 하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의 가능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가능성을 바라보며 사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사야는 침략자의 군화와 피묻은 군복이 한데 모아져 불에 태워지는 것을 봅니다. 오늘 우리는 이런 꿈을 잃어버린 것은 아닌지요?

• 우리를 위해 태어난 아기
그런데 우리를 더욱 놀라게 하는 것은 그 다음 대목입니다. 이사야는 한 아기의 탄생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한 아이가 우리를 위해 태어났다. 우리가 한 아들을 모셨다.". 어법이 좀 이상하지요? 마치 아이가 스스로 태어난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어느 철학자는 인간을 가리켜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라 했습니다. 나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우리는 이 세상이라는 무대에 끌려나왔습니다. 세익스피어의 <맥베스>에 나오는 한 구절이 유명합니다. "꺼져라 꺼져, 짧은 촛불이여! 인생이란 한낱 걷고 있는 그림자 같은 것, 주어진 시간 동안 무대에서 연기하는 배우 같은 것, 얼마 안 가서 영영 잊혀져 버리지 않는가." 삶은 늘 고달픕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한 아기가 우리를 위해 태어났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아기를 모셨다고 말합니다.

이사야가 과연 예수님의 도래를 내다보고 한 말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가 새로운 질서를 가져올 존재를 내다보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의 이름은 '놀라우신 조언자',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화의 왕'이라고 불릴 것이다." 이런 놀라운 존재가 아기의 모습으로 온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여기서 아기는 생물학적 연령의 어림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강자가 약자를 유린하는 것이 자연이 정한 법칙인양 여겨지고 있던 그때, 사람들은 어떤 강력한 구원자를 기대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뜬금없이 한 아기의 탄생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아기가 누구를 가리키는지 따지는 것은 부질없는 일입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아기'가 상징하고 있는 가치입니다.

아기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누군가의 보호 없이는 살 수 없는 무력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아기는 강력합니다. 자기에게 다가오는 모든 사람을 무장해제시키니 말입니다. 어른들은 가장 따뜻한 표정과 말랑말랑한 언어를 가지고 아기에게 다가갑니다. 아이는 힘으로 지배하지 않지만 사람들을 지배합니다. 어른들의 가슴 속에 숨어 있는 사랑을 이끌어냅니다. 그런데 우리는 세상이 만들어 유포시키고 있는 거짓 신화에 얽매인 채 살고 있습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강해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다른 이들과의 경쟁에서 도태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강자들은 약자들에게 수치를 안겨주고, 패자들은 혐오의 대상으로 취급됩니다. 최근에 직원들에게 욕설을 퍼붓고 무차별 폭력을 가한 모 식품회사 명예회장의 이야기는 우리 시대가 얼마나 타락했는지를 보여주는 징표입니다. 천박합니다. 인간성의 몰락입니다. 이것이 강자들을 찬미하는 세상이 만드는 부끄러운 실상입니다. 세상이 이러니 우리는 늘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남들에게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조바심치며 삽니다. 조바심칠수록 숨은 더욱 가빠지고, 사랑의 능력은 자꾸 줄어듭니다. 그런데 오늘 연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오시는 분은 새로운 삶의 길을 열어보이고 있습니다. 역사의 새로움은 연약함을 능동적으로 받아들이는 데 있다고 말입니다. 뉴욕에 있는 유니온 신학교 교수인 현경은 <연약함의 힘>이라는 책에서 연약함의 힘이라는 말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내면의 진정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힘, 참 나를 있는 그대로 보여줄 수 있는 힘,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려 공감할 수 있는 힘, 진실대로 살기 위해 모험할 수 있는 힘, 모험에 동반되는 불안과 두려움을 견뎌내는 힘, 자신이 원하는 것과 남이 원하는 것이 상충될 때 관계의 성장을 위해 균형 있게 양보하고 타협할 수 있는 힘 등입니다."(현경, <연약함의 힘>, 샘터, 2014년 8월 6일, p. 166)

이 진술 속에 이미 내포되어 있기는 하지만 저는 여기에 지금 차가운 겨울 바람 앞에서 벌거벗기운 채 수치를 당하는 이들을 감싸안는 힘 하나를 추가하고 싶습니다. 주님은 연약한 자들을 감싸안기 위해 이땅에 오셨고, 그들의 아픔과 고통을 받아 안기 위해 오셨습니다. 지금 우리 가운데 오시는 주님은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 곁에 반드시 다가가실 것입니다. 진상규명을 위한 청문회가 열렸지만 공중파에 의해 철저히 외면당함으로 가슴에 피멍이 든 이들 말입니다. 주님은 지금 난민이 되어 세상을 떠돌고 있는 이들, 자기 땅에서 유배당한 것 같이 서글프고 고통스런 나날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 곁으로 다가서고 계십니다.

그런 주님을 신뢰하며 살아갈 때, 주님의 통치를 확장하기 위해 기꺼이 어려움을 받아들일 때 주님의 왕권은 점점 든든히 설 것이고, 평화의 나라는 확장될 것입니다. 공평과 정의가 확립된 세계야말로 사회적 약자들도 자기 몫의 삶을 온전히 누리며 살 수 있는 세상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도래와 더불어 이런 세상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런 세상에 초대받은 이들입니다. 가끔 우리는 낙심하고 지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 속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의 열심이 그것을 반드시 이루실 것입니다. 이미 오신 빛을 맞아들이고, 그 빛을 어둠 속을 걷고 있는 이들에게 전하는 것이 우리의 소명입니다. 주님의 은총이 우리 가운데, 지금 울고 있는 모든 이들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15년 12월 25일 12시 31분 34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