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53. 헛됨을 넘어
설교자 김기석
본문 전1:1-11
설교일시 2015/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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헛됨을 넘어
전1:1-11
(2015/12/27, 송년주일)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이다. 전도자가 말한다. 헛되고 헛되다. 헛되고 헛되다. 모든 것이 헛되다. 사람이 세상에서 아무리 수고한들, 무슨 보람이 있는가? 한 세대가 가고, 또 한 세대가 오지만, 세상은 언제나 그대로다. 해는 여전히 뜨고, 또 여전히 져서, 제자리로 돌아가며, 거기에서 다시 떠오른다. 바람은 남쪽으로 불다가 북쪽으로 돌이키며, 이리 돌고 저리 돌다가 불던 곳으로 돌아간다. 모든 강물이 바다로 흘러가도, 바다는 넘치지 않는다. 강물은 나온 곳으로 되돌아가 거기에서 다시 흘러내린다. 만물이 다 지쳐 있음을 사람이 말로 다 나타낼 수 없다. 눈은 보아도 만족하지 않으며 귀는 들어도 차지 않는다. 이미 있던 것이 훗날에 다시 있을 것이며, 이미 일어났던 일이 훗날에 다시 일어날 것이다. 이 세상에 새 것이란 없다. '보아라, 이것이 바로 새 것이다' 하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는가? 그것은 이미 오래 전부터 있던 것, 우리보다 앞서 있던 것이다. 지나간 세대는 잊혀지고, 앞으로 올 세대도 그 다음 세대가 기억해 주지 않을 것이다.]

• 우울증을 앓는 세상
주님의 은총이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송년주일 아침, 우리는 지금까지 지켜주시고 이끌어주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한편,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지 못했다는 부끄러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하지만 지나치게 자책할 필요는 없습니다. 비틀걸음일망정 이곳까지 버티고 걸어왔으니 참 잘하셨습니다. 저는 가끔 힘이 빠진 채 찾아오는 후배들에게 매사에 너무 의욕적일 필요도 없지만 지레 낙심할 것도 없다고 말하곤 합니다. 그래도 힘들어 하는 이들에게는 잘 견디라고 말합니다. 견딘다는 것은 자기 자리를 끝끝내 지키는 것입니다. 시간 속을 바장이는 사람들이 비애감을 느끼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가끔 캄캄한 어둠 속에 유폐된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그때는 이리저리 방황하지 말고 잠시 그곳에 주저앉아 쉴 줄 알아야 합니다. 넘어진 김에 쉬어간다는 속담은 기막힌 지혜를 담고 있습니다. 그런 후 어둠에 익숙해지면 다시 일어나 길을 떠나면 됩니다.

군대에서 훈련을 받을 때 야간정숙보행이라는 훈련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벌건 대낮에 낮에 밤이라는 가정 하에 훈련을 했습니다. 얼굴의 번들거림을 막기 위해 검은색 물감으로 위장을 하고, 소총의 멜빵을 풀어 몸체에 감고, '앞에 총' 자세에서 발을 높이 들어 휘저으며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부비 트랩에 걸리지 않기 위한 조처措處였습니다. 훈련이 힘들지는 않았지만 왠지 애들 장난을 하는 것 같아 자꾸 웃음이 나왔습니다. 그렇게 천천히 나아가다가 '조명탄!' 하는 외침이 들려오면 재빨리 총을 바닥에 내려놓고 그 위에 엎드려야 했습니다. 총신에 빛이 반사되는 일을 막기 위해서였습니다. 교관은 조명탄 불빛이 약해질 무렵이면 살그머니 고개를 돌려 그 불빛을 의지하여 나아가야 할 방향을 가늠하라고 지시했습니다.

돌아보니 여기에 교훈이 있습니다. 살다 보면 장애물을 만나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인간관계의 어려움, 경제적 궁핍, 무의미성의 자각 등 이런저런 장애물들이 우리를 힘들게 합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것은 우리가 잘 살고 있는지 돌아볼 기회가 되기도 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잣대를 가지고 삶을 평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이미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항상 결핍감에 시달립니다. 통계청이 발표한 '한국의 사회 동향 2015'를 보면 한국인들은 주요 선진국 국민들에 비해 일상생활에서 우울감을 더 자주 느낀다고 합니다. 반면 자신감은 훨씬 약합니다. 소득 수준이나 육체적 건강은 오히려 상위권에 속합니다. 문제는 주관적 행복 지수에서 점수를 크게 까먹는다는 데 있습니다. 한국인의 행복지수 순위는 47위라고 합니다. 이 연구를 수행했던 서울대 보건대학원 조병희 교수는 한국인의 집단적 우울증 증세를 "사회적 통합이 약하고, 개인 역량이 사회적 관계에 의해 개선되는 정도가 미흡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습니다. 사회적 유대감이 약하고, 개인을 고려하지 않는 사회생활이 우리의 정신 건강을 해치고 있다는 말입니다.

• 창조적 반복
실패가 반복되면 맥이 빠지고, 더러는 허무 의식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처음에는 자기가 하는 일이 무의미한 것 같아 속상해 하다가, 나중에는 자기 존재 자체를 짐스럽게 여기기도 합니다. 그런 상황에 빠지면 누구나 "헛되고 헛되다. 헛되고 헛되다. 모든 것이 헛되다"(전1:2) 하고 탄식하는 전도자의 말에 깊이 공감하게 됩니다. 일도, 공부도, 노는 것도, 가족들을 돌보는 것도 다 부질없고 헛된 것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세상이 역동적으로 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하나도 변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권태가 우리 영혼을 잠식하기 시작합니다. 전도자의 말에 깊이 공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람이 세상에서 아무리 수고한들, 무슨 보람이 있는가? 한 세대가 가고, 또 한 세대가 오지만, 세상은 언제나 그대로다."(전1:3-4) 해는 여전히 뜨고 지기를 반복하고, 바람도 이리저리 불다가 잦아들고, 모든 강물이 바다를 향해 흘러가지만 바다는 넘치지 않습니다. 무한한 반복입니다. 그런 세상을 바라보며 전도자는 또 다시 탄식합니다.

"만물이 다 지쳐 있음을 사람이 말로 다 나타낼 수 없다. 눈은 보아도 만족하지 않으며 귀는 들어도 차지 않는다. 이미 있던 것이 훗날에 다시 있을 것이며, 이미 일어났던 일이 훗날에 다시 일어날 것이다. 이 세상에 새 것이란 없다."(전1:8-9)

따지고 보면 인생은 반복입니다. 아침부터 저녁에 잠자리에 들 때까지 우리가 하는 일은 먹고, 일하고, 공부하고, 놀고, 잠을 자는 것입니다. 더러 공적인 일을 위해 헌신하기도 합니다. 사람마다 마음을 더 집중하는 일이 있기는 하지만 이중 어느 하나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노는 일에 마음을 빼앗기는 사람이라 해도 먹을 땐 먹어야 하고, 잘 땐 자야 합니다. 삶이란 어쩌면 자전거 페달을 밟는 일과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전거는 곡선운동을 직선운동으로 바꾸어줍니다. 페달을 밟으면 앞으로 나갑니다. 날마다 반복하는 일이 가끔 우리를 권태에 빠뜨리기도 하지만, 그 반복하는 일을 소홀히 한 채 좋은 삶을 살 수는 없습니다. 덴마크의 철학자인 쇠렌 키에르케고르는 반복 속에서 혁명적 삶이 잉태되기도 한다고 말했습니다. 지금은 남녀 사이의 일의 구분이 별로 없지만, 전통사회에서 여성들의 일은 매우 반복적이었습니다. 그런데 무한 반복되는 그 일을 우리 조상들은 지혜롭게도 살림살이라 했습니다. 생명을 살리는 일이라는 말입니다. 여성의 일뿐만이 아닙니다. 농사를 짓는 일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농부들은 무한한 반복을 통해 우주의 물레를 잣습니다. 새로운 삶을 꿈꾸십니까? 그렇더라도 새로울 것이 없는 일상의 일에 충실해야 합니다. 오늘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소홀히 하면서 큰 일에만 마음을 쓰는 이들은 몽상가입니다. 그런데 이 때 다시 전도자의 항변이 들려옵니다.

"'보아라, 이것이 바로 새 것이다' 하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는가? 그것은 이미 오래 전부터 있던 것, 우리보다 앞서 있던 것이다. 지나간 세대는 잊혀지고, 앞으로 올 세대도 그 다음 세대가 기억해 주지 않을 것이다."(전1:10-11)

'새 것'이란 없다는 말에 고개가 끄덕여질 때가 많습니다. 성경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형제들 간의 갈등 이야기는 성경의 첫머리부터 나오고, 자기 이익을 확보하기 위해 다른 이들을 수단으로 삼는 일 또한 그렇습니다. 별 것도 아닌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다른 이들을 곤경 속으로 몰아넣고, 심지어는 죽음에 이르게 하는 일도 다반사입니다. 전도자는 이런 세상에 염증을 느낀 듯합니다. 그는 매우 정직하게 자기 현실을 직시하고 있습니다. 적당히 현실에 눈을 감고 나른한 행복에 취하기에는 그는 매우 각성된 사람입니다. 1장에서 그가 당도한 세계는 아무 것도 새로울 것 없는 권태로운 세계입니다. 그런데 정말 세상에는 새로운 것이 없나요?

• 새로움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 사도는 말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 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 것이 되었습니다."(고후5:17)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삶이야말로 새로운 삶, 가슴 벅찬 삶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러합니까? 세상은 우리 속에 불안과 공포심을 주입합니다. 그 불안과 공포심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이러저러한 것을 소유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소유를 통해 자기 안전을 확보하려는 것이 현대인들의 삶의 목표입니다. 그러나 욕망은 채워지는 법이 없습니다. 한 순간 충족되었다가도 다음 순간 또 다른 욕망이 우리를 확고히 사로잡기 때문입니다. 남에게 뒤질세라 우리는 제대로 쉬지도 못합니다. 우리는 안식 없는 세상을 떠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확고히 편입되는 순간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말은 그분의 마음에 접속된 채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은 무엇입니까? 만나는 이들에게 선물이 되려는 마음입니다. 그의 속에 있는 가장 아름다운 가능성을 이끌어내기 위해 자기를 마중물로 내놓는 마음입니다. 남을 희생시켜 자기를 돋보이게 만들기 보다는 자기를 낮추어 남을 복되게 하는 마음입니다. 우리 삶의 새로움은 바로 거기에서 발원됩니다.

부활절과 오순절 사건 이후 그리스도 안에서 확고히 머물렀던 사도들의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예수의 이름을 전하다가 관원들에게 끌려가 매를 맞기도 하고 감옥에 갇히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를 전하려는 그들의 열정은 조금도 사그러들지 않았습니다. 사도들은 이미 다른 세상에 속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이미 자아에 대해 죽은 사람은 어떤 위협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법입니다. 폭력이 힘을 발휘하는 것은 사람들이 폭력 앞에서 주눅이 들어 자발적으로 복종하기 때문입니다. 폭력은 예수님을 굴복시킬 수 없었습니다. 예수의 얼을 굴복시킬 수 없었고, 예수님의 마음을 황폐하게 만들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이들을 보면서 '아버지,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자기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라고 기도했습니다. 누가 승리자입니까? 제자들은 매를 맞고 풀려나면서 주님의 이름을 위해 능욕받기에 합당한 자가 된 것을 기뻐했습니다. 초대교회의 많은 성도들은 말할 수 없는 박해를 받으면서도 정의와 자비를 실천했습니다. 그들은 약한 데서 강해지는 신앙의 비밀을 세상 앞에 드러냈습니다. 이것이 새로움이 아니면 대체 어떤 것이 새로움이겠습니까?

예수님은 연약함이 강함을 이기고, 사랑이 미움을 이긴다는 사실을 몸으로 증언하셨습니다. 그 예수님과 깊이 만난 이들은 서슴없이 그 길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모름지기 예수를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고백하는 사람들은 그 길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에 새로울 게 뭐가 있겠느냐고 허탈하게 말하는 이들에게 새로운 삶이 있다는 것을 몸으로 증언해야 합니다. 오죽하면 십자가에서 처형당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본 백부장이 "이 사람은 참으로 의로운 사람이었다"(눅23:47)고 고백했을까요? 예수는 범인凡人의 눈에는 낯선 분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런 낯선 이와 그를 따르는 이들을 통해 세상은 새로워집니다.

• 작은 축제 만들기
그러나 이 거친 세상에서 낯선 자로 살아간다는 것, 십자가의 길을 걷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자꾸 억울한 생각이 들기도 하고, 나만 손해보는 것처럼 생각되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공동체가 필요합니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야 하지만 멀리 가려면 함께 가야 한다지요? 얼마 전 평화노래꾼 홍순관 선생의 '북 토크'에 패널로 참석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나눈 이야기 가운데 제가 크게 공감한 것이 있습니다. 이 살벌한 세상을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에게 개인의 책임만을 강조하는 일은 좀 잔인한 것 아니냐는 이야기였습니다. 예전에 공동체가 살아있을 때는 구성원 가운데 누군가가 밖에 나가 상처 입고 돌아오면 그가 회복될 때까지 공동체가 그를 품어주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런 공동체를 먼저 일으켜 세우는 일이라는 사실에 깊이 공감했습니다.

저는 그래서 지친 사람들에게 권고합니다. 생을 너무 심각하게만 보지 말고, 조금이라도 좋은 일이 있으면 함께 생을 경축하며 살라고요. 아는 사람 가운데 누군가에게 슬픈 일, 괴로운 일이 있을 때는 어설픈 위로나 훈계를 하지 말고 그저 그의 곁에 머물러 주라고요. 함께 생을 경축하고, 어려움을 나눌 사람이 많아질 때 우리 삶은 조금씩 든든해집니다. 며칠 전 전 연세대학교 교수였던 조한혜정 선생님의 컬럼을 읽었습니다. 그는 우리 시대를 진단하면서 서로를 감염시키는 불안이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고 말합니다. 이미 강을 건너 버린 것 같아 밥맛도 없고, 잠도 깊이 들기 어려운 세상이라는 것이지요. 그렇다고 한숨만 내쉬고 있을 수는 없으니, 함께 모여 밥은 먹고 지내는지, 잠은 잘 자는지 묻는 모임을 좀 만들어 보라고 말합니다. 컬럼 가운데 일부를 읽어드리겠습니다.

"연말에 아무리 바쁘더라도 여러 세대가 모여 안부 묻는 자리를 마련하시기를 권하고 싶다. 근대화 과정에서 과잉 주체화된 자신을 내려놓고 심심하고 느긋하게 서로의 안부를 묻는 자리, 서로로부터 배우고 서로를 사랑스럽게 보면서 나쁜 기운을 거두고 좋은 기운만 쏘아주는 자리" --조한혜정, <연말 안부를 묻는 자리> 한겨레, 2015년 12월 16일 자 30면)

그런 자리에서는 정치 이야기를 할 것도 없고, 너무 심각하게 종교 이야기를 할 것도 없습니다. 다만 서로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보듬어 안고, 함께 생을 나누면 됩니다. 우리 삶을 의미 있게 해주는 장소들을 떠올려도 좋겠습니다. 조한혜정 선생은 그런 장소들이 퇴행이 아닌 생성의 장소가 될 수 있다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교회도 그런 장소가 되어야 합니다. 올 한해 우리는 조금씩 서로에게 마음을 열며 지냈습니다. 낯섦을 극복하고, 서로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수용하면서 서로에게 배우려고 애썼습니다. 이제는 교회 안의 지체들이 서로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어야 합니다. 세상에 살다가 실패를 경험한다 해도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줄 뿐만 아니라, 회복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이들이 있음을 서로 확신할 수 있어야 합니다. 새로운 문명의 기운은 그런 실천 속에서 움터 나옵니다. 우리를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께서 앞으로도 우리의 길을 예비해주실 것입니다. 이제 금년의 남은 시간, 들판에 흩어진 이삭을 줍는 룻의 마음으로 우리 생의 결실을 거두어 들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은총을 더해주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15년 12월 27일 12시 32분 22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