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54. 새로운 삶의 다짐(송구영신예배)
설교자 김기석
본문 엡4:25-32
설교일시 2015/12/31
오디오파일 s20151231.mp3 [15690 KBytes]
목록

새로운 삶의 다짐
엡4:25-32
(2015/12/31, 송구영신예배)

[그러므로 여러분은 거짓을 버리고, 각각 자기 이웃과 더불어 참된 말을 하십시오. 우리는 서로 한 몸의 지체들입니다. 화를 내더라도, 죄를 짓는 데까지 이르지 않도록 하십시오. 해가 지도록 노여움을 품고 있지 마십시오. 악마에게 틈을 주지 마십시오. 도둑질하는 사람은 다시는 도둑질하지 말고, 수고를 하여 제 손으로 떳떳하게 벌이를 하십시오. 그리하여 오히려 궁핍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것이 있게 하십시오. 나쁜 말은 입 밖에 내지 말고, 덕을 세우는 데에 필요한 말이 있으면, 적절한 때에 해서, 듣는 사람에게 은혜가 되게 하십시오. 하나님의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성령 안에서 구속의 날을 위하여 인치심을 받았습니다. 모든 악독과 격정과 분노와 소란과 욕설은 모든 악의와 함께 내버리십시오. 서로 친절히 대하며, 불쌍히 여기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과 같이, 서로 용서하십시오.]

• 빈손이라도 내보이자
주님의 은총이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늦은 시간이지만 우리는 지난 한 해 동안의 삶을 하나님께 바치고, 다가오는 새해를 감사함으로 맞이하기 위해 이 자리에 있습니다. 문풍지를 울리는 바람처럼 세월이 그렇게 빠르게 그리고 소란스럽게 우리를 스쳐 지나가면 우리 마음에는 그늘이 남습니다. '이만 하면 잘 살았다'고 말하고 싶지만 차마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아마 죽었다 깨어나도 회한을 남기지 않고 살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자기의 허물이 크다는 사실만 알아도 좋으련만 우리는 대개 다른 이들 때문에 힘들었다고 생각합니다. '~ 때문에'라는 말처럼 허망한 말이 없습니다. 기울어가는 시간을 반추하면서 저는 이정록 시인의 시 한편을 떠올렸습니다. 그가 어머니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토대로 쓴 시입니다.

"허물없는 사람 어디 있겄냐?
내 잘못이라고 혼잣말 되뇌며 살아야 한다.
교회나 절간에 골백번 가는 것보다
동네 어르신께 문안 여쭙고 어미 한 번 더 보는 게 나은 거다.
저 혼자 웬 산 다 넘으려 나대지 말고 말이여.“
-<가슴 우물>, 어머니학교 48 중에서

어머니는 이미 장년이 된 아들에게 인생의 이치를 가르칩니다. 남 탓 하지 말고, 내 잘못이라고 자꾸 되뇌며 살랍니다. 우리는 즉시 그렇게 수세적으로 살면 나쁜 놈들의 밥이 되기 십상이라고 항의하고 싶어집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다른 말씀 더 보태지 않으시고 동네 어르신께 문안 여쭙고 어미 한 번 더 찾아보는 사람이 되라고 하십니다. 교회 다닌다고 사람이 마땅히 할 도리를 하지 않는다면 그건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단순하지만 본질을 꿰뚫는 말입니다. 이런 저런 세상 일 때문에 속상해 하는 아들을 향해 저 혼자 웬 산 다 넘으려 나대지 말라고 말합니다. 어머니는 뜻대로 되지 않는 세상일 때문에 아들이 지치고 낙심할까봐 그게 걱정입니다.

우리의 하늘 아버지도 비슷한 마음이 아닐까요? 지난 일년 동안 거두어들인 삶의 열매가 아무리 부실해도 지나친 자책감에 사로잡히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눈여겨 보시는 것은 우리가 얼마나 많은 일을 했나가 아니라, 우리에게 맡겨진 일을 얼마만한 사랑을 가지고 했느냐입니다. 성취한 일이 적다 해도 사랑 안에서 걸었다면 다행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못했다면 정직하게 우리의 빈손을 하나님께 보여드려야 합니다.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지만 아무 것도 잡지 못했다고 말했던 제자들처럼 말입니다. 그러한 정직한 자기 응시야말로 하늘의 도움이 유입되는 통로입니다.

• 불확실성의 시대에
우리는 지금 새해를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새해는 우리에게 다시 시작할 용기를 줍니다. 그러나 새로운 삶을 잉태하지 못한다면, 새로운 삶을 다짐하는 것이 아니라면 바꿔 거는 달력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사실 시간은 무심히 흘러와 우리를 스치고 지나갑니다. 우리의 과제는 그 시간 속에서 영원을 붙잡는 것입니다. 영원을 붙잡기 위해 우리가 마련해야 하는 도구는 사랑입니다. 함께 살라 명하신 이웃을 소중히 여기는 것, 그의 생명을 풍요롭게 하기 위해 마음 쓰는 것이야말로 영원에 잇댄 삶이라 하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이웃을 잠재적 적 혹은 경쟁자로 보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 굴레 속에 갇힌 이들에게 세상은 약육강식의 전장입니다. 그들은 외로움과 두려움 속에서 바장입니다. 어느 사회학자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99% 사람들을 프레카리아트precariat라고 규정했습니다. 이건 신조어인데 '불안정하다, 불확실하다'는 뜻의 프리케어리어스precarious와 프롤레타리아트proletariat의 합성어입니다. 대개는 불안정한 고용 상황에 처한 비정규직 혹은 파견직 노동자나 실업자, 노숙자를 총칭하는 말이지만, 지금 나름대로 든든한 직장에 다니는 이들이라고 해서 안심하고만 있을 수는 없는 세상입니다. 삶이 위태로울수록 우리 마음의 여유는 줄어들고, 타자를 향한 연민과 존중의 마음 또한 줄어들게 마련입니다. 거부당할까봐 조바심치고, 잊혀질까 두려워합니다. 세상이 점점 거칠어지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새해에도 이런 상황은 크게 변하지 않을 겁니다. 희망적인 이야기를 하면 좋겠지만 그럴 수 없습니다. 이게 현실입니다. 그렇기에 믿음이 요구됩니다. 바울 사도는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고 말했습니다(빌3:20). 우리가 진정 하늘에 속한 사람이라면 땅의 현실에 따라 부평초처럼 나부끼지 않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참 의로움과 참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어떤 마음으로 살아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새해 여행길의 노잣돈으로 삼았으면 좋겠습니다. 먼저는 말에 대한 교훈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거짓을 버리고, 각각 자기 이웃과 더불어 참된 말을 하십시오. 우리는 서로 한 몸의 지체들입니다."(25)
"나쁜 말은 입 밖에 내지 말고, 덕을 세우는 데에 필요한 말이 있으면, 적절한 때에 해서, 듣는 사람에게 은혜가 되게 하십시오."(29)

여기서 말하는 '거짓'은 믿음 없는 사람의 행실과 태도를 가리키는 말이지만 그 근본적 의미는 거짓말입니다. 우리가 거짓말을 하는 이유는 다양합니다. 자기의 부끄러운 행실을 숨기기 위해서 할 때도 있고, 다른 이들을 호도하기 위한 경우도 있고, 자기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경우도 있습니다. 말이 제집을 잃고 떠도는 사회는 불행합니다. 지금 우리는 불신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누가 무슨 말을 해도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듣지 않습니다. 말이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기는커녕 도리어 더 멀어지게 할 때가 많습니다. 천박한 말, 거친 말, 누군가를 모욕하기 위해 발설되는 말들이 세상의 토대를 허뭅니다. 참된 말이 회복되지 않으면 참된 삶도 불가능해집니다. 바울은 나쁜 말은 입 밖에 내지 말라고 권고합니다. 성도들은 탓하는 말, 조롱하는 말, 폄훼하는 말, 거친 말과 이별해야 합니다. 우리가 사용해야 하는 말은 덕을 세우는 말입니다. 올 한 해 우리가 사용하는 말이 살리는 말, 세우는 말, 북돋는 말, 위로하는 말, 격려하는 말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성령의 능력 안에서
바울 사도는 성도들은 분노에 사로잡히지 말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물론 이 말은 불의에 대해 침묵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불의를 보고도 분노할 줄 모른다면 그는 하나님의 영 안에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분노할 때는 분노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그 분노가 자기와 공동체를 파괴하도록 허용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물론 에베소서의 이 대목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 지켜야 할 성도들 간의 윤리를 다루고 있지만 그것을 우리 삶의 자리로 확대해도 마찬가지입니다.

"화를 내더라도, 죄를 짓는 데까지 이르지 않도록 하십시오. 해가 지도록 노여움을 품고 있지 마십시오. 악마에게 틈을 주지 마십시오."(26-27)

화를 낼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 화 속에 갇히지는 말아야 합니다. 죄를 짓는 데까지 이르지 않도록 하라는 말은 바로 그 뜻입니다. 노여움을 오래 품으면 그것이 독이 되어 우리의 성품을 망가뜨립니다. 악마는 타자를 향한 노여움을 타고 우리 속에 들어올 때가 많습니다. 이어서 사도는 건강한 노동을 권고합니다.

"도둑질하는 사람은 다시는 도둑질하지 말고, 수고를 하여 [제] 손으로 떳떳하게 벌이를 하십시오. 그리하여 오히려 궁핍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것이 있게 하십시오.(28)

새해에는 우리 모두 건강한 노동의 기쁨을 누리며 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노동은 하나님의 초대에 응답하는 행위입니다. 인간은 노동을 통해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을 가꿉니다. 생태계를 파괴하거나, 생명을 해치는 일은 가급적이면 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쩔 수 없이 그런 일을 요구받는 자리에 있다 하더라도 생명을 훼손하는 일을 최소화하기 위해 애써야 합니다. 새해에는 그런 노동의 결실을 홀로 누리는 것이 아니라 어려운 이들에게 나누어줄 수 있는 마음의 여유도 누릴 수 있기를 빕니다. 사도는 우리가 성령 안에서 살아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성령 안에서 구속의 날을 위하여 인치심을 받았습니다. 모든 악독과 격정과 분노와 소란과 욕설은 모든 악의와 함께 내버리십시오."(30-31)

성령은 하나님의 숨입니다. 생명을 깨우는 봄바람처럼 우리에게 불어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꿈을 품게 하시는 성령을 늘 사모하며 사십시오. 헛된 유혹의 바람이 아니라 하늘 바람을 향해 마음을 열 때 우리 삶의 비애는 줄어들 것입니다. 하나님의 숨이 우리 속에서 생동할 때 우리를 중력처럼 잡아당기는 죄의 유혹은 스러질 수밖에 없습니다. 해가 떠오르면 이슬이 스러지는 것처럼 성령이 우리 안에서 작동할 때 악독, 격정, 분노, 소란, 욕설, 모든 악의는 물러갈 것입니다.

• 외경과 연민
이제 마지막 권고입니다.

"서로 친절히 대하며, 불쌍히 여기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과 같이, 서로 용서하십시오."(32)

새해에는 우리 모두 친절한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세상이 참 무정하고 거칠어졌습니다. 믿는 이들은 이 척박한 인정의 황무지를 친절함으로 개간하라는 부름 앞에 서있습니다. 이웃들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보아낼 때 우리는 친절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 이웃들이 내 마음에 들건 들지 않건 그들도 하나님께 속한 존재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믿음이 우리에게 주는 선물 가운데 하나는 다른 이들에 대해 연민의 마음을 품게 한다는 사실입니다. 따지고 보면 다 딱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머무는 한 근심과 걱정으로부터 온전히 해방될 수는 없습니다. 거리를 걷고 있는 사람 아무나 붙잡고 물어보십시오. 걱정 근심이 없는 사람 만나기 어려울 겁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서로를 귀히 여기고 측은히 여겨야 합니다. 설사 그가 좀 잘못했다 하더라도 사랑으로 품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해를 허락하신 것은 그런 삶을 좀 연습해보라는 초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새해에는 우리들의 사랑의 동심원이 점점 커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가족과 교인들의 한계에서 벗어나, 위태로운 생존을 이어가고 있는 프레카리아트들에게까지 확장될 때 우리는 비로소 자아의 감옥에서 벗어난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신동엽은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라는 시에서 티없이 맑은 영원의 하늘을 보고 싶어하는 이들을 향해 말합니다. "닦아라, 사람들아/네 마음속 구름/찢어라, 사람들아/네 머리 엎은 쇠항아리". 더러워진 우리 마음을 자꾸 닦지 않고는, 우리 머리에 덮씌워진 욕망의 쇠항아리를 찢지 않고는 영원의 하늘을 볼 수 없습니다. 그는 영원의 하늘을 본 사람들의 삶을 두 마디 말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외경'과 '연민'입니다.

저는 새해 우리 교우들이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에 눈을 뜬 사람들이 되어서 늘 외경심을 품고 살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멋진 일에 동참하는 사람답게 이웃들에 대한 연민의 마음을 삶으로 드러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살리는 말, 분노를 조절할 줄 아는 능력, 건강한 노동, 타자에 대한 존중과 연민이 우리 교우들의 삶을 요약하는 단어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주님의 은총이 일년 내내 우리를 감싸주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16년 01월 01일 00시 10분 35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