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1. 주님께서 다스리신다.
설교자 김기석
본문 시96:1-13
설교일시 2016/01/03
오디오파일 s20160103.mp3 [11171 KBy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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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 다스리신다
시편96:1-13
(2016/1/3, 신년주일)

[새 노래로 주님께 노래하여라. 온 땅아, 주님께 노래하여라. 주님께 노래하며, 그 이름에 영광을 돌려라. 그의 구원을 날마다 전하여라. 그의 영광을 만국에 알리고 그가 일으키신 기적을 만민에게 알려라. 주님은 위대하시니, 그지없이 찬양 받으실 분이시다. 어떤 신들보다 더 두려워해야 할 분이시다. 만방의 모든 백성이 만든 신은 헛된 우상이지만, 주님은 하늘을 지으신 분이시다. 주님 앞에는 위엄과 영광이 있고, 주님의 성소에는 권능과 아름다움이 있다. 만방의 민족들이, 주님을 찬양하여라. 주님의 영광과 권능을 찬양하여라. 주님의 이름에 어울리는 영광을 주님께 돌려라. 예물을 들고, 성전 뜰로 들어가거라. 거룩한 옷을 입고, 주님께 경배하여라. 온 땅아, 그 앞에서 떨어라. 모든 나라에 이르기를 "주님께서 다스리시니, 세계는 굳게 서서, 흔들리지 않는다. 주님이 만민을 공정하게 판결하신다" 하여라. 하늘은 즐거워하고, 땅은 기뻐 외치며, 바다와 거기에 가득 찬 것들도 다 크게 외쳐라. 들과 거기에 있는 모든 것도 다 기뻐하며 뛰어라. 그러면 숲 속의 나무들도 모두 즐거이 노래할 것이다. 주님이 오실 것이니,주님께서 땅을 심판하러 오실 것이니, 주님은 정의로 세상을 심판하시며, 그의 진실하심으로 뭇 백성을 다스리실 것이다.]

• 깨어나라, 너 잠자는 자여
새해 첫 주일 아침, 주님의 은총이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어거스틴은 우리에게 있는 시간은 오직 '현재' 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그는 과거를 기억으로 존재하는 현재라고 말하고, 미래는 기대로 존재하는 현재라고 말합니다. 현재는 기억과 기대를 품은 직관으로 존재한다는 것이지요. 말이 어렵습니다만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은 지금을 영원처럼 살아야 한다는 말일 겁니다. 죽음 이후에 이어질 영생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영생을 살라는 말입니다. 하루하루 살기도 바쁜 처지에 뜬구름을 잡는 말처럼 들릴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현대인들의 가장 큰 비애는 영원의 감각을 잊고 산다는 것입니다. 사탄은 '다른 세상'을 상상하지 못하도록 우리를 현실 논리에 꼭 붙들어 매두려 합니다. 새해 첫 주일 아침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온 우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 삶의 근본을 살피는 일입니다.

오늘의 본문인 시편 96편은 유대인들의 신년 축제인 로쉬 하샤나 때 낭독되는 시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날 유대인들은 쇼파(나팔)를 불어 사람들을 하나님의 현존 앞으로 불러 세웁니다. 나팔 소리가 들려오면 사람들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고, 지금도 지속되고 있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약속이 실현되리라는 기대를 표현합니다. 20세기의 유대 철학자 마이마너디는 뿔 나팔 소리가 상기시키는 것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깨어나라, 너 잠자는 자여,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고 회개하라.
그림자를 사냥하는 사람이 되지 말며
공허한 것을 찾느라 인생을 소비하는 자가 되지 말라.
너의 영혼을 들여다보라.
너의 악한 방법과 생각에서 떠나고 하나님께 돌아오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너를 긍휼히 여기시리라.“
(변순복, <변순복과 함께 하는 성경 속의 절기를 찾아 떠나는 여행>, 탈무드에듀아카데미, 2015년 4월 30일, p.221)

• 새 노래
새해는 그림자를 사냥하고, 허망한 것을 따르느라 생을 탕진하던 습속에서 벗어나 창조주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전환점이 되어야 합니다. 돌이킴이 없다면 시간은 우리에게 공포심이나 허무의식을 심어줄 뿐입니다. 오늘 우리가 낭독한 시의 화자는 온 땅을 주님을 찬양하는 자리에 초대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은 새 노래를 부르며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성경에서 '새 노래'는 새롭게 만들어진 노래가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하심에 대한 새로운 자각을 일컫는 말입니다. 신앙생활은 어제 먹던 찬밥을 데워 먹는 것이 아닙니다. 늘 새로운 감격과 감동이 있어야 합니다. 감사는 생각에서 나옵니다. 깊이 생각해보면 오늘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들 가운데 당연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만들지도 않은 것을 누리고 살고 있고, 누군가의 호의와 돌봄 덕분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일들을 거슬러 올라가보면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사랑 덕분에 삽니다.

눈을 뜨면 보입니다. 하지만 너무나 많은 이들이 눈을 감고 삽니다. 눈을 뜬 이들은 그렇기에 새 노래로 주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감사와 감격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가는 이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무엇일까요? 1절부터 3절 사이에는 명령형으로 되어 있는 단어가 일곱 번 등장합니다. '노래하여라'가 3번, '영광을 돌려라', '구원을 날마다 전하여라', '영광을 만국에 알려라', 기적을 만민에게 알려라' 등이 각각 1번입니다. 명령형 동사의 반복은 노래를 부르는 이들의 감정을 고양시키는 역할을 하는 동시에, 그들의 영혼을 확고히 하나님께 비끌어매는 역할을 합니다. 우리가 부르는 노래가 우리의 삶이 됩니다. 젊은이들 사이에서 즐겨 소비되는 노래를 보면 그 시대가 보입니다. 댄스, 발라드, 힙합, 랩 음악 속에는 그 시대를 바라보는 이들의 시선이 오롯이 담겨 있습니다. 사랑과 이별을 기반으로 하는 애상의 정서, 기존 질서에 대한 막연한 저항과 분노, 욕망을 서로에게 투사하는 곡들이 차고 넘칩니다. 대중 가요를 전혀 알지 못하는 제가 평가할 일은 아니지만 조금은 더 건강한 노래가 불리워졌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권위주의 시대에 음반에 한 곡씩 넣어야 했던 소위 건전가요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의 시인은 땅에 살고 있지만 자꾸만 하늘을 바라보자고 말합니다. 고대 세계의 뱃사람들이 북극성을 바라보며 자기의 항로를 살폈던 것처럼 하늘을 준거점으로 삼을 때 오늘의 삶을 의미있게 살아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시인에게 주님은 어떤 분입니까?

"주님은 위대하시니, 그지없이 찬양받으실 분이시다. 어떤 신들보다 더 두려워해야 할 분이시다. 만방의 모든 백성이 만든 신은 헛된 우상이지만, 주님은 하늘을 지으신 분이시다. 주님 앞에는 위엄과 영광이 있고, 주님의 성소에는 권능과 아름다움이 있다"(4-6)

주님은 하늘과 땅을 지으신 분이십니다. 시인은 '만방의 모든 백성이 만든 신은 헛된 우상'이라고 말합니다. 매우 배타적인 인식인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참 하나님과 우상의 차이를 생각해보면 이런 말이 그른 말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존재를 있게 하신 분입니다. 우상은 그 존재 가운데 일부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만드신 피조물들을 돌보시기 위해 기꺼이 당신을 선물로 내주십니다. 우상은 자기 앞에 엎드리는 이들에게 많은 것을 요구합니다. 하나님은 가장 낮은 자리에서 살아가는 이들을 돌보고 구원하기 위해 움직이십니다. 우상은 이미 많은 것을 누리고 사는 이들을 지키는 일에 동원됩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위엄과 영광, 권능과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 하나님께 잇대어 살아간다면 우리 삶 또한 그렇게 든든하고 아름다워질 것입니다.

• 찬양으로의 초대
시인은 이제 모든 민족들을 주님을 찬양하는 자리에 초대합니다. 그는 편협한 민족주의에 사로잡혀 있지 않습니다.

"주님의 이름에 어울리는 영광을 주님께 돌려라. 예물을 들고, 성전 뜰로 들어가거라. 거룩한 옷을 입고, 주님께 경배하여라. 온 땅아, 그 앞에서 떨어라."(8-9)

찬양이란 주님께 돌려드려야 할 것을 주님께 돌려드리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이 보여주는 하늘 예배 광경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것은 스물네 장로가 보좌에 앉아 계신 분 앞에 엎드려서, 주님께 경배를 드리면서 자기들의 면류관을 벗어서 보좌 앞에 내놓는 장면입니다. 저는 이 장면을 볼 때마다 대학 졸업식에서 내 늙으신 어머니에게 학사모를 씌워드렸던 기억을 떠올립니다. 18살에 시집을 오셔서 갖은 고생을 다 하시며 8남매를 건사하시느라 수고하신 그 어머니의 신산스런 삶을 잘 알기에 저는 그 모자를 어머니께 드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모자는 내 것이 아니라 어머니의 것임이 마땅했습니다. 스물네 장로의 마음이 그러했던 것 같습니다. 주님 앞에 엎드린 그들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우리의 주님이신 하나님, 주님은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주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셨으며, 만물은 주님의 뜻을 따라 생겨났고, 또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계4:11)

이 사실만 알고 살아도 철부지 신세는 면할 수 있을 텐데 우리는 여전히 자기 중심성의 덫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만방의 민족들이 온 세계를 향해 외쳐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제 아무리 발버둥쳐보아도 우리는 잠시 이 땅에 머물다 가는 존재일 뿐입니다. 세상에는 공평함이 없습니다. 양지에서 사는 사람도 있고 응달진 곳에 유폐된 채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산 마루에 서서 오연한 시선으로 세상을 내려다보며 사는 사람도 있고, 수난의 골짜기에서 살아가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게 현실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그런 현실을 바루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높은 산은 낮추고, 우묵한 골짜기는 메우며 사는 삶 말입니다. 강자들은 약자들을 노골적으로 윽박지르거나, 은밀하게 괴롭히기도 합니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가 명심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다스리시니, 세계는 굳게 서서, 흔들리지 않는다. 주님이 만민을 공정하게 판결하신다"(10)

세상을 다스리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한일 위안부 문제의 조속한 합의를 종용한 오바마도 아니고, 위안부 문제는 최종적으로 불가역적으로 해결되었다고 설레발치는 아베도 아니고, 이번 합의를 국민들이 대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고 말하는 박근혜 대통령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십니다. 믿는 이들은 그런 하나님의 통치에 마음을 열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억울한 눈물을 흘리는 이들에게 유난히 관심이 많으십니다. 그들의 아픈 눈물을 닦아주는 것이야말로 하나님 앞에 드리는 우리의 예배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이들은 덧없는 욕망이 우리를 이끌고 가도록 허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생명을 풍요롭게 하고, 불화를 극복하는 일을 위해 헌신해야 합니다. 사람을 사람으로 존중하지 않는 문화에 저항해야 하고, 이웃들의 아픔을 덜어주기 위해 그들 곁으로 다가서야 합니다.

• 우리 가운데서 발생하는 기쁨
하나님의 통치가 확립될 때 우리는 기쁨이라는 선물을 받게 됩니다. 만물이 다 지쳐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미세먼지에 덮인 하늘이 뿌옇습니다. 하지만 그 먼지가 걷히면 청명하기 이를데 없이 푸른 하늘이 있습니다. 푸른 하늘은 늘 그곳에 있었습니다. 잠시 가려져 있었을 뿐입니다. 먼지를 걷어내고 푸른 하늘을 드러내 보이는 책임이 성도들에게 있습니다. 그 하늘을 볼 때면 누구라도 기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늘은 즐거워하고, 땅은 기뻐 외치며, 바다와 거기에 가득 찬 것들도 다 크게 외쳐라. 들과 거기에 있는 모든 것도 다 기뻐하며 뛰어라. 그러면 숲 속의 나무들도 모두 즐거이 노래할 것이다."(11-12)

하늘과 땅, 바다와 들, 그리고 산의 나무들까지도 기쁨의 노래를 부르는 세상, 정말 아름답지 않습니까? 시인은 우주적 기쁨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부정의와 불공평으로 얼룩진 세상에서는 피조물들조차 신음하고 있지만 하나님의 통치가 수립되는 순간 신음은 기쁨의 노래로 바뀐다는 것입니다. 정말 새해에는 피조물들의 신음소리가 그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잊지 마십시오. 주님이 오고 계십니다. 오셔서 정의로 세상을 심판하시고, 진실하심으로 뭇 백성을 다스리실 것입니다. 신년에 심판을 상기하는 까닭은 삶의 새로움은 자신의 허물을 자각하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데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혼돈스러워도 하나님이 다스리신다는 사실을 망각하지 말아야 절망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사람들의 마음을 뒤덮고 있는 어둠과 절망을 조금씩 몰아내는 일입니다. 한 해 내내 이런 아름다운 소명을 성취하는 기쁨을 한껏 누리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16년 01월 03일 11시 35분 53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