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30. 마음 다함
설교자
본문 막12:28-34
설교일시 200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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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다함
막12:28-34
(2001/7/29)


두 영혼의 만남

성경에서 서기관이라는 사람들은 대개 예수님의 적대자로 나옵니다. 그들의 문제는 많이 안다는 사실입니다. 안다는 자부심만큼 사람을 교만하게 하는 것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사탄은 명예욕과 지배욕에 굴복한 사람을 눈 앞에서 유혹한다 합니다. 그만큼 다루기 쉽다는 말일 겁니다. 성경에 대한 전문가라는 서기관들의 위험한 자부심이 전적으로 새로운 영혼인 예수에게 마음을 닫도록 만든 셈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에는 예수님에게 호의적일 뿐만 아니라, 예수님에 의해 인정받은 한 서기관이 등장합니다. 그는 예수님께 나와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질문이 진실한 것임을 알아차리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전심전력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으로 응답하십니다.

이것은 참으로 소중한 말씀입니다. 주님은 그의 들을 귀가 열려있다고 생각하셨기에 주변부를 맴돌지 않고 가장 근본적인 문제에 곧장 돌입하시는 겁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전심전력하라는 이 말씀이야말로 기독교 신앙이라는 구슬을 하나로 꿰는(一以貫之) 실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사랑은 우리 삶에 곧게 서있어야 할 수직의 중심이고, 이웃 사랑은 수직을 옆으로 눕혀놓은 수평의 중심입니다. 그 둘이 만나 십자가를 이루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죽음입니다. 동시에 생명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를 버림으로 영원을 삽니다. 서기관은 그 말씀을 듣고 '옳습니다' 하고 맞장구를 칩니다. 그의 영혼에 불꽃이 인 것입니다. 신앙은 하나님의 장단에 나의 장단을 맞추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덩' 하시면 우리는 '더꿍' 하는 것이 믿음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일에 '얼쑤' 추임새를 넣는 것이 성도들의 일입니다. 예수님은 반응할 줄 아는 영혼을 만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 멀지 않도다."


당신은 하나님 나라에 가까운가?

본문의 말씀을 묵상하다가 저는 이 말씀 앞에서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과연 주님은 나를 보고 뭐라 하실까 궁금했습니다. 궁금했다기보다는 부끄러웠다는 것이 솔직한 고백입니다. 작은 모욕과 비난에도 속상해하고, 변명하려고 애쓰는 나, 예수님의 제자를 자칭하면서도 말과 행실이나 마음씀은 세상을 더 많이 닮은 내 모습이 거울에 비추인 듯 보였기 때문입니다. 엊그제 텔레비전에서 베스트 친절 시민으로 뽑힌 대금 연주자 박원철씨는, 어떤 마음으로 사느냐는 질문에 수줍고 어눌한 말투로 이렇게 말하더군요. "그냥 어려운 분들을 보면 '아, 내가 어렵구나' 하고, 즐거워하는 분들을 보면 '아, 내가 즐겁구나' 하고 생각하는 거지요." 그가 어떤 상황에서든 한결같이 친절한지를 확인하기 위해 진행자들은 자장면 배달원을 그에게 보냅니다. 시키지도 않은 자장면이 배달되어 왔으니 그는 어리둥절했습니다. 하지만 배달원이 낙담한 표정을 지으며 자장면 값을 자기가 배상해야 한다고 말하자 잠시 머뭇거리던 그는 "내가 돈을 낼 테니 여기 앉아 그것을 먹고 가라"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그를 위해 신문까지 깔아주었습니다. 배달원이 자리를 잡고 앉는 것을 본 그는 슬그머니 일어나 밖으로 나가더군요. 얼마 후 나타난 그의 손에는 생수통이 들려 있었습니다. 배달원을 위한 배려였던 것입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아, 마음 다함이란 저런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님은 그를 향해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 멀지 않도다" 하시지 않을까요?

주님이 그 서기관을 향하여 하신 경탄의 말씀을 저는 질문으로 던져보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나라에 가깝습니까?" 이것은 교리문답이 아닙니다. 솔직하게 우리 삶을 돌아보자는 초대입니다. 조금만 정직하다면 우리는 누구나 이 물음에 대답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말과 행동과 감정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돌아보세요. 그러면 답은 쉽게 나옵니다. '그렇다'고 대답하는 분은 행복한 분입니다. '그렇지 못하다'고 대답하는 이들은 다소 쓸쓸한 마음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천국에 가기를 원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하나님 나라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배가 가라앉고 있는 데도 보석을 꺼내려 선실로 내려가는 것이 사람인가 봅니다.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하면서도 덧없는 욕망에 끄달리는 우리들입니다.


나를 사랑하세요?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형편이 크게 다른 것 같지는 않습니다. 저는 아침이면 면도를 하느라고 거울을 들여다보다가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가만히 바라볼 때가 많습니다. 저는 왕자병 환자는 아니니까, '야 참 멋지다' 그러지는 않습니다. 거울 속에 비친 내가 낯설게 여겨질 때가 많습니다. 진리의 길을 걷는 사람의 청정함이나 평온함, 그리고 사랑을 기대하면서 바라본 그 얼굴에서 저는 40대 남자의 피곤함과 고집스러움, 체념을 볼 때가 많습니다. 저는 그럴 때마다 무화과나무의 운명을 떠올립니다. 시장하셨던 예수님이 멀리서 잎사귀 있는 무화과나무 한 그루를 보시고 열매를 딸 수 있을까 하여 가보셨습니다. 하지만 아무 것도 얻을 수 없었습니다(막11:12-13). 왜 이 지경이 되었을까요? 답은 하나입니다.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마음을 다해 이웃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음악의 신동이라는 모차르트의 일화 한 토막입니다.

여섯 살이 되던 해부터 온 유럽으로 끌려다니고, 마치 곡마단의 개처럼 왕들 앞에 구경거리로 내세워지고, 아첨을 받고, 선물을 받고, 두루 귀여움을 받던 모차르트가 자신에게 흥미를 나타내 보이는 사람들에게 종종 이런 천진한 질문을 던지곤 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나를 사랑하세요? 나를 정말로 사랑하세요?" 대답이 '그렇다'고 할 때에만 그는 피아노 앞에 앉아 연주를 시작했다고 한다. 그의 연주를 듣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를 사랑하지 않으면 안된다.(레기날드 링엔바하, {하나님은 음악이시다}, 30쪽)

어린 모차르트는 어른들의 상투적인 대답을 듣고도 만족하여 연주를 했겠지요? 하지만 그 질문은 참 중요합니다. 그 느닷없는 질문은 질문을 받은 사람들에게 음악을 듣는 자세를 가다듬게 만들었을 것이고, 모차르트는 자기가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연주를 할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사랑을 요구하십니다. 우리의 사랑 없이는 설 수 없는 분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주님을 사랑해야 우리가 그분의 일을 이해할 수 있겠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냐는 질문은 질문 받는 사람의 삶을 뒤흔들어 놓습니다.


마음을 다해 사랑하라

디베랴 바닷가에서 주님이 베드로에게 하신 질문을 기억하시지요? "네가 나를 믿느냐?"가 아니었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님은 그것만 물으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되 마음을 다해 사랑해야 합니다. 그 속에 생명이 있습니다. 마음을 다한다는 것은 마음이 나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 마음을 다해 하는 일은 아름답습니다. 걸레질을 하는 모습도 그렇고, 누구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도 그렇습니다. 흉내만 내면 안 됩니다. 사람들에게 일을 시켜 보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마지못해 일을 하면서 께지럭거리는 모습처럼 보기 민망한 것이 없습니다.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성심껏 해냅니다. 찬송가 219장 2절 가사를 저는 참 좋아합니다.

주여 넓으신 은혜 베푸사 나를 받아 주시고 나의 품은 뜻 주의 뜻 같이
되게 하여 주소서

지금은 어긋나는 부분이 많지만 내가 다듬어져 주의 뜻과 일치하기를 비는 것입니다. 이 곡의 원래 가사는 더 극적입니다.

나의 영혼이 확고한 희망으로 주님을 바라보게 하시고, 나의 뜻이 당신의
뜻 안에서 사라지게 하소서
Let my soul look up with a steadfast hope, And my will be lost in
Thine

나의 뜻이 당신의 뜻 안에서 사라지기를 시인은 소망하고 있습니다. 나 좋을 대로하려는 마음이, 남 좋을 대로하라는 주님의 뜻 안으로 흡수통일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은 이웃 사랑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그분이 하시는 일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은 무엇입니까? 생명이 온전케 되는 일입니다. 일그러진 생명을 돌보는 것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은 없습니다. 배고픈 사람은 먹이고, 병든 사람은 고쳐주고, 외로운 사람의 벗이 되어 주고, 권리를 빼앗긴 사람들의 권리를 되찾아주고, 살맛을 잃은 이들에게 살맛을 되찾게 해주는 일, 바로 그것이 이웃 사랑이고 하나님 사랑입니다. 해방신학자인 구티에레즈는 "이웃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드러내는 존재"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이웃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 하나님 사랑의 깊이를 드러냅니다.


사랑의 자아의 출구, 영원의 입구

하나님 나라에 이르는 길은 사랑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랑을 잘 하지 못합니다. 아직은 나를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랑은 자기 밖으로 나가는 능력입니다. 이것을 저는 "사랑은 자아의 출구요 영원의 입구"라고 말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세상의 여러 가지 사물들, 쉬 사라지고 말 것들을 사랑하고, 극복되어야 할 자아의 응석을 받아주느라 사랑을 선택하지 못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것을 가리켜 "자기보다 못한 것을 사랑하는 영혼의 倒錯"이라고 말했습니다. 세상에는 우리의 감각을 만족시키는 것들이 참 많습니다.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한 것이 참 많습니다. 육체적인 쾌락도 결코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더 소중한 것을 잃는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하나님 나라에 가는 것 말입니다.

로마 근교인 수비아코라는 곳에 있는 성 베네딕드 수도원에는 그의 가르침과 행적을 보여주는 프레스코 벽화가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그 가운데는 매우 인상적인 그림이 있었습니다. 손에, 그리고 어깨에 새를 올려놓은 젊은이들이 그림 한 켠에 나옵니다. 여기서 '새'는 '향락'을 상징합니다. 발그레한 그들의 표정은 뭔가에 들떠 있는 듯합니다. 베네딕드의 시선은 그들을 향하고 있지만, 그의 손가락은 바닥에 놓인 몇 개의 관을 가리킵니다. 첫 번째 관에는 막 죽은 이의 시신이 있고, 다음 관에는 썩어가는 시신이 있습니다. 그 다음 관에는 앙상한 해골이 누워 있습니다. 죽으면 썩어 없어질 육신을 위해 살지 말고 영원을 위해 살라는 교훈이겠지요?

우리는 붉은 콩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팔아버린 에서를 어리석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오늘 사랑의 길 위에 있지 않다면 우리도 그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사탄은 영원을 팔아 순간의 쾌락을 사라고 우리를 부추깁니다. 하지만 주님은 우리의 순간 속에 영원을 끌어들이라고 하십니다. 그것은 사랑을 통해 가능합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줄로 압니다. 하지만 '마음을 다해' 사랑하는가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없습니다. 마음을 다하십시오. 흉내나 내고 말기에 우리 삶은 너무나 소중합니다. 사랑의 길을 걷다가 마침내 하나님 나라의 열린 문을 발견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등 록 날 짜 1970년 01월 01일 09시 33분 21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