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2.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는 용기
설교자 김기석
본문 골4:2-6
설교일시 2016/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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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는 용기
골4:2-6
(2016/1/10)

[기도에 힘을 쓰십시오.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면서, 깨어 있으십시오. 또 하나님께서 전도의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셔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할 수 있도록, 우리를 위해서도 기도하여 주십시오. 나는 이 비밀을 전하는 일로 매여 있습니다. 그러니 내가 마땅히 해야 할 말로 이 비밀을 나타낼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외부 사람들에게는 지혜롭게 대하고, 기회를 선용하십시오. 여러분의 말은 소금으로 맛을 내어 언제나 은혜가 넘쳐야 합니다. 여러분은 각 사람에게 어떻게 대답해야 마땅한지를 알아야 합니다.]

• 세상은 평화 원하지만
주님의 은총이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새해를 맞은지 불과 열흘 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우리는 벌써 낡아빠진 시간 속에서 바장이고 있습니다. 북한이 수소폭탄 실험에 성공했다고 자랑하자 국제사회는 크게 요동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유엔 안보리는 대북제재를 결의했고 우리 정부는 대북방송을 재개했습니다. 정치인들 가운데는 우리도 핵무장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정치가 건달들의 치킨 게임이 아닐진대 왜 이렇게 민족의 운명을 두고 함부로 말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북한이 보이고 있는 호전적이고 배타적인 태도는 스스로의 고립을 자초하고 있습니다. 이런 일들이 반복되면서 남북은 서로에 대해 지쳐갑니다. 마음의 문이 닫히고 대화의 문조차 닫히면 남는 것은 갈등 밖에는 없습니다. 참으로 딱한 나라입니다.

며칠 전부터 제 입을 맴도는 노래가 있습니다. "세상은 평화 원하지만 전쟁의 소문 더 늘어간다/이 모든 인간 고통 두려움뿐/그 지겨움 끝 없네". 노랫말이 우리를 우울하게 만듭니다. 희망은 아주 없는 것일까요? 이 노래는 반전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 여기 계시니/우리가 아들 믿을 때에 주의 영으로 하나 돼/우리가 아들 믿을 때에 주의 영으로 하나 돼/하날세 우리 모두가 하날세" 궁극적 희망은 주님으로 온다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안일한 현실 회피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는 이보다 더 분명한 일은 없습니다.

옥타비아누스 곧 아우구스투스 황제 때부터 시작된 소위 로마의 평화 시대는 진정한 평화 시대가 아니었습니다. 옥타비아누스는 태양신 아폴로의 아들을 자처했습니다. 그의 라이벌이었던 안토니우스가 도취의 기분을 안겨주는 술의 신 디오니소스를 좋아했던 것과 대조적입니다. 그는 그만큼 야심만만했습니다. 디오니소스가 저녁을 배경으로 한다면 아폴로는 어둠을 깨치는 새벽과 관련됩니다. 그러니까 옥타비아누스는 적절한 상징을 선택한 셈입니다. 그는 사람들 사이에 통용되던 화폐인 '데나리온'에 자기 운명을 암시하는 별자리를 그려넣기도 했습니다. 그를 기리기 위해 로마에 세운 평화의 제단(Ara Pacis Augustae)에는 그로부터 시작된 유토피아적 세계가 묘사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로마 제국의 지배가 사람들에게 행복과 번영을 가져다 준 것은 아니었습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고 착취당했습니다. 로마 제국은 압도적인 군사력을 바탕으로 하여 지중해 세계를 정복했습니다. 바로 그 때 예수님은 로마 제국과 대비되는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힘으로 누군가를 강압하거나, 타자를 수단으로 삼는 로마 제국의 논리와는 정반대로 예수님은 사랑과 나눔, 돌봄과 섬김을 통해 열리는 새로운 세상을 제시하셨습니다. 지금 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누구입니까? 로마 제국은 사라졌지만 로마 제국이 지향했던 권력에의 욕망은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신자유주의 경제질서가 바로 우리 시대의 로마 제국입니다. 2000년 전 예수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우리도 이제 새로운 세상의 꿈을 꾸기 시작해야 합니다.

• 예수적 존재의 위험
초대교회 교인들은 예수를 믿고 따른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는 로마 제국의 입장에서는 매우 위험한 인물이었습니다. 제국이 든든히 서기 위해서는 억압 당하는 이들이 자기들의 처지를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람들이 인위적으로 만들어놓은 경계선, 곧 로마 시민과 미개인을 가르고, 종과 자유인을 가르고, 거룩한 것과 속된 것 사이를 가르던 경계선을 자유롭게 넘나드셨습니다. 사회의 저변을 형성하고 있던 사람들, 그러니까 '땅의 사람'이라 업신여김을 받았던 사람들 속에 하나님 나라의 꿈을 불어넣으셨습니다.

독재자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국민들이 눈을 똑바로 뜨는 것입니다. 그래서 독재자들은 사람들이 현실의 참상에 눈을 돌리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여러 가지를 고안해 냅니다. 스펙타클한 것, 곧 볼 거리나 오락거리를 만들어 제공합니다. 로마에 세워진 콜로세움 같은 것을 연상해보면 되겠습니다. 지금도 사람들이 스포츠에 열광하는 동안 고통받는 이들의 외로움은 더욱 깊어져 갑니다. 스펙타클한 것에 중독된 사람들은 이웃들의 고통 따위는 바라보려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이웃에게 시선을 돌리도록 만드셨습니다. 그 시대의 종교 문화가 죄인이라 규정한 사람들 속에 있는 아름다움을 보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칼과 창으로 무장한 채 로마에 맞서 싸운 분이 아닙니다. 사람들 속에 있는 정신의 힘, 즉 증오와 편견을 무너뜨리고 누군가의 이웃이 될 수 있는 힘으로 그 강고한 세상과 싸우셨습니다. 우리도 그 싸움에 초대받았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한 곳이 아닙니다. 누구보다 예수를 제거하고 싶어했던 것은 성전 체제를 유지해가면서 누릴 것을 다 누리고 살던 종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예수라는 존재 자체가 그들을 추문거리로 만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한 관심을 보이면 보일수록 그들은 불안해졌습니다. 자기들의 설 자리가 좁아진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로마 제국의 입장에서도 예수는 불온한 인물이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과 로마 제국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기에 그들은 공모하여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했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은 험한 말을 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완력으로 누군가를 누르려는 이들이 아닙니다. 세상의 힘 앞에 굴종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소수의 사람들만 행복하고 다수의 사람들은 불행으로 밀어넣는 세상의 허구성을 통찰하고 사람들에게 일깨우는 사람들입니다. 어느 때든지 불의한 세상은 그런 이들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불온의 딱지를 붙여 제거하거나, 격리하려 합니다. 바울 사도는 복음을 전하다가 여러 차례 옥에 갇혔습니다. 그건 다른 사도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어떤 박해도 그들을 침묵시킬 수는 없었습니다. 영화 <마하트마 간디>의 한 장면이 떠오릅니다. 영국의 식민지배에 항거하는 비폭력 저항을 주도했다 하여 관헌에게 체포되어 감옥으로 끌려가면서 간디는 웃음 띤 얼굴로 말합니다. "많이 가본 길입니다.“ 그는 동료들에게 감옥을 가득 채우자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런 이들을 누가 당해낼 수 있겠습니까?

• 기도의 연대
하지만 그 길은 역시 어려운 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성도들에게 기도에 힘쓰라고 권고합니다. "기도에 힘을 쓰십시오.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면서, 깨어 있으십시오."(골4:2)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에 접속하는 일입니다. 기도를 통해 우리는 상황에 따라 일희일비하지 않고 영원의 빛 속을 거닐게 됩니다. 기도는 마음 내킬 때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라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한 깨어 있는 존재가 될 수 없습니다. 기도는 이미 우리 속에 현존해 계시는 하나님께 마음을 기울이면서 주님의 마음과 일치되기를 소망하는 것입니다. '기도에 힘쓰라'는 사도의 권고를 듣는 이들은 아마도 시편 기도를 떠올렸을 것입니다. 시편을 묵상하고 노래로 부르면서 사람들은 자기들의 마음을 주님께 비끌어매곤 했습니다.

바울은 또한 주님의 일을 하다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자신을 위해서 기도 해달라고 부탁하고 있습니다. 속히 풀려나기를 바라서가 아닙니다.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의 문이 열리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할 수 있도록, 우리를 위해서도 기도하여 주십시오. 나는 이 비밀을 전하는 일로 매여 있습니다. 그러니 내가 마땅히 해야 할 말로 이 비밀을 나타낼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십시오."(3b-4)

그리스도의 비밀이란 무엇일까요? 사도는 골로새서 2장 10절에서 그 비밀을 누설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는 모든 통치와 권세의 머리"라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모든 빚문서를 지워버리시고 그것을 십자가에 못박으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통치자들과 권력자들의 무장을 해제시키시고, 그들을 그리스도의 개선 행진에 포로로 내세우셔서, 뭇 사람의 구경거리로 삼으셨습니다."(골2:15) 그리스도의 비밀을 안 이들은 더 이상 옛 세계의 인력에 속절없이 끌려다니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주님은 그 존재 자체로 세계를 지배하는 이들의 민낯을 드러내셨습니다. 십자가의 피로 평화를 이루셨고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을 당신과 화해시키셨습니다.

우리 믿음은 어디를 향하고 있습니까? 겨우 내 삶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한 방편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잘 믿어서 복 받고 편안하게 사는 것이 신앙의 목표라면 신앙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이 겨우 우리들의 편안한 삶을 위해서 이겠습니까? 사도는 우리 믿음 생활의 목표를 아주 단순하게 제시합니다. "새 사람을 입으십시오. 이 새 사람은 자기를 창조하신 분의 형상을 따라 끊임없이 새로워져서, 참 지식에 이르게 됩니다."(골3:10)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끊임없이 새로워지는 것이 우리의 과제입니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달라야 합니다. 어제보다 오늘 조금 더 남을 배려하고, 다른 이들을 따뜻하게 대하고, 다른 이들 속에 생명의 기운을 북돋기 위해 자기를 조금 더 낮출 수 있어야 합니다. 저 먼 곳에까지 가서 헌신하지는 못하더라도 우리가 일상적으로 만나는 사람들 속에 하늘의 고요함과 따뜻한 온기를 전하기 위해 애쓸 때 우리는 비로소 주님을 닮은 사람이 됩니다.

• 기회를 선용하라
사도는 교회 밖에 있는 이들과 어떻게 지내야 하는지도 가르치고 있습니다. 교회는 두 가지 형태로 존재합니다. 하나는 모이는 교회입니다. 순례자들이 성전을 향해 나아가듯이 믿는 이들은 정해진 시간에 주님 앞에 한 데 모여 하나님을 찬미하고 말씀을 경청하고 삶의 경험을 함께 나눕니다. 모이기를 힘쓰지 않을 때 우리 신앙은 퇴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 다른 형태의 교회에 속한 이들입니다. 흩어지는 교회가 그것입니다. 성도는 교회에서 경험한 삶의 충만함을 가지고 일상의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일상의 자리야말로 우리 신앙의 진실함을 입증하는 유일한 자리입니다. 우리가 만나는 이들은 우리와 다른 종교를 가진 이들도 있고, 다른 가치관을 가진 이들도 있습니다. 우리와 다르다 하여 누군가를 백안시하거나 미워할 때 하나님의 나라는 가뭇없이 스러집니다.

며칠 전 떼제 공동체의 신한열 수사가 쓴 글을 보았습니다. 떼제 공동체는 지난 해 수단 출신의 난민들을 맞아들였습니다. 난민들을 맞아들이는 것이 그리스도의 뜻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얼마 전 수단 청년 하메드는 슬픈 소식을 들었습니다. 다푸르에 남아 있던 열여섯 살 난 여동생이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메드는 동료들과 함께 새벽 3시까지 꾸란을 함께 읽으며 기도를 올렸습니다. 떼제는 그들에게 개종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강도 만난 것 같은 그들의 이웃이 되어 주었을 뿐입니다. 이게 진정한 사랑이요 믿음이 아니겠습니까? 외부 사람들에게 지혜롭게 대하라는 말을 저는 그렇게 이해하고 싶습니다. 기회를 선용하라는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사랑을 배우는 것보다 소중한 일은 세상에 없을 것입니다. 사도는 또한 성도들의 말이 어떠해야 할지를 가르칩니다.

"여러분의 말은 소금으로 맛을 내어 언제나 은혜가 넘쳐야 합니다. 여러분은 각 사람에게 어떻게 대답해야 마땅한지를 알아야 합니다."(4:6)

신약성경에는 말에 대한 교훈이 유난히 많습니다. 그것은 함부로 발설된 말 때문에 공동체가 어려움에 처하는 일이 많았음을 반증합니다. 말은 공동체를 세우기도 하지만 무너뜨리기도 합니다. 말은 힘이 셉니다. 말 한 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 말도 있습니다만, 말 한 마디 때문에 누군가의 가슴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기기도 하는 법입니다. 집회서에는 이런 말이 나옵니다. "매에 맞으면 자국이 남지만 혀에 맞으면 뼈가 부러진다"(집회28:17). 거의 즉각적으로 이해가 됩니다. 누군가가 한 말 때문에 속을 끓여본 경험이 없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가 사는 세상이 이 지경이 된 것은 말을 다루는 사람들의 책임이 큽니다. 집회서의 말을 조금 더 들어보십시오.

"어리석은 자의 말은 여행 중의 짐과 같고 지각 있는 이의 말은 기쁨이 된다"(집회21:16)
"젊은이여, 필요하다면 말을 하여라. 그러나 사람들이 요청하더라도 두 번 이상은 말하지 말라"(집회32:7)

우리의 말이 그리스도의 말과 닮을 수 있기를 빕니다. "네 죄가 용서받았다"(막2:9),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눅23:43).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요8:11). 살리는 말, 북돋는 말을 연습할 때 우리는 비로소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악한 세대입니다. 그럴수록 그리스도의 비밀을 마음 속에 깊이 새겨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이 아무리 흔들려고 해도 흔들리지 않는 마음의 기둥이 하나 생기는 것입니다. 오늘도 내일도 하나님의 꿈을 가슴에 품고 나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16년 01월 10일 11시 06분 02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