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3. 그늘진 땅을 비추는 빛
설교자 김기석
본문 마 4:12-22
설교일시 2016/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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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늘진 땅을 비추는 빛
마4:12-22
(2016/1/17)

[예수께서, 요한이 잡혔다고 하는 말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돌아가셨다. 그리고 그는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역 바닷가에 있는 가버나움으로 가서 사셨다. 이것은 예언자 이사야를 시켜서 하신 말씀을 이루시려는 것이었다. "스불론과 납달리 땅, 요단 강 건너 편, 바다로 가는 길목, 이방 사람들의 갈릴리, 어둠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그늘진 죽음의 땅에 앉은 사람들에게 빛이 비치었다." 그 때부터 예수께서는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기 시작하셨다. 예수께서 갈릴리 바닷가를 걸어가시다가, 두 형제, 베드로라는 시몬과 그와 형제간인 안드레가 그물을 던지고 있는 것을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슴하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나는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로 삼겠다." 그들은 곧 그물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갔다. 거기에서 조금 더 가시다가, 예수께서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을 보셨다. 그들은 아버지 세베대와 함께 배에서 그물을 깁고 있었다. 예수께서 그들을 부르셨다. 그들은 곧 배와 자기들의 아버지를 놓아두고, 예수를 따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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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은총이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 주님은 광야에서 악마에게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악마는 식별 가능한 객관적 실체라기보다는 우리 마음을 끝없이 땅의 현실에 붙들어매려는 세력,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못하도록 하는 힘을 가리킵니다. 악마는 인간의 뿌리 깊은 죄성이 만들어낸 괴물입니다. 어지간해서는 그 힘을 이겨내기 어렵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힘에 마성적인 이름을 붙여 경계하는 것입니다. . 악마는 광야에서 '자기 확장욕'을 자극했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그런 악마의 유혹을 뿌리치고 하나님의 눈으로 삶과 세상을 바라보셨습니다.

광야 시험을 통해 예수는 하나님의 마음에 확고히 접속되었습니다. 세상의 어떤 유혹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공고한 '입장'을 가진 분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골고다 언덕에 세워진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지만, 이미 광야에서 자기 자신에 대하여 죽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언젠가도 말씀드렸습니다만 크게 한번 죽어야 다시 살 수 있는 법(大死一番 絶後蘇生)입니다. 많은 이들이 자기 양심을 거스르면서 욕된 삶을 선택하는 것은 어떻게든 살아 남아야 한다는 절박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겠다고 말하는 이들에게 먼저 자기를 부정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광야에서 받은 유혹 이야기와 연결되는 대목입니다. 마태복음에 따르면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이 시험 받으시던 그 무렵에 체포되었습니다. 그는 늘 요주의 인물이었습니다. 모욕 당하고, 천대받고, 억압당하는 것을 숙명으로 여기며 살던 사람들 속에 잠들어 있던 혼과 영을 깨웠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시인 신동엽의 표현을 빌어 말하자면 사람들의 머리를 뒤덮고 있던 쇠항아리 같은 것을 깨뜨렸습니다.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푸른 하늘을 보도록 만든 것입니다.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는 이들은 늘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가림막을 찢어 실상을 보도록 만듭니다. 당시의 식민 당국은 세례자 요한을 체포함으로 골칫거리를 제거했다고 희희낙락했을 겁니다.

• 변방에서 열리는 희망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생각일 뿐 하나님의 생각은 다릅니다.

"예수께서, 요한이 잡혔다고 하는 말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돌아가셨다."(12)

새로운 역사의 시작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출애굽의 완성과 연관된 요단강을 중심으로 새로운 역사를 시도했다면, 예수님은 갈릴리라는 변방에서부터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십니다. 예수님은 고향인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역 바닷가에 있는 가버나움으로 가서 사셨습니다. 가버나움은 갈릴리의 북서쪽에 있는 도시입니다. 그곳은 어부들의 마을이었지만, 다마스커스에서 가이사랴를 거쳐 애굽에 이르는 해변 무역 도로(via maris)가 지나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그렇기에 세관도 있었고, 로마군의 수비대도 주둔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어부 제자들과 세리 마태를 부르신 곳이 바로 그곳이고, "나는 지금까지 이스라엘 사람 가운데서 아무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마8:10)는 칭찬을 받았던 백부장이 주재하고 있던 곳도 이곳이었습니다. 돈이 제법 돌았을 테니까 가버나움은 행복한 마을이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돈은 언제나 유용한 것이지만 돈을 추구하는 마음이 모인 곳에는 행복이 없습니다. 돈 때문에 가까운 이들의 의가 상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이들이 생깁니다. 돈이 사람들의 마음을 지배하는 곳에서 민심은 흉흉해지게 마련입니다. 게다가 어부들은 헤롯 안티파스에게 막대한 세금을 내야 했고, 군인들의 횡포 또한 피부로 체감할 정도였을 겁니다. 마태는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으로 이주하신 것을 두고 예언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는 것이었다고 말합니다.

"스불론과 납달리 땅, 요단 강 건너편, 바다로 가는 길목, 이방 사람들의 갈릴리, 어둠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그늘진 죽음의 땅에 앉은 사람들에게 빛이 비치었다."(15-16)

마태는 이사야가 묘사한 곳이 바로 가버나움이라고 말합니다. 스불론 지파와 납달리 지파에게 주어졌던 땅, 바다로 가는 길목, 이방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한 곳, 이사야는 그곳에 사는 이들의 형편을 "어둠에 앉아 있는 백성"과 "그늘진 죽음의 땅에 앉은 사람들"이라는 구절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가버나움은 어둠의 땅이요, 그늘진 죽음의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곳이야말로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기에 적합한 곳이었습니다. 예수는 빛 그 자체였습니다. 복음서를 편찬하던 마태의 마음을 헤아려 보았습니다. 그는 예수라는 놀라운 존재를 묘사할 말을 궁리하다가 이사야의 이 말씀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그늘진 죽음의 땅에 앉은 사람들에게 빛'이 된 사람 예수, 이보다 더 적확한 말이 또 있을까요?

저녁 어스름이 내릴 무렵 효창 공원을 걷다 보면 나무들 사이에 환한 햇살이 내려앉은 장소와 만나곤 합니다. 새잎이 돋아나는 봄이든, 잎이 다 진 겨울이든 햇살은 늘 환하게 그 장소를 비춥니다. 그걸 볼 때마다 톨스토이가 태어난 곳인 야스나야 폴랴나라는 곳이 떠오릅니다. 그 뜻은 러시아어로 '숲속의 밝은 빈 터'랍니다. 그늘진 땅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그런 따뜻하고 밝은 장소를 그리워합니다. 마태에게 예수는 그런 분이었습니다. 마음이 울적해지다가도 그분을 떠올리면 저절로 얼굴빛 환해지는 분 말입니다.

• 회개
예수님은 가버나움에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선포의 내용은 매우 간단합니다.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17) 회개란 아시다시피 돌이킴입니다. 뉘우침과 아울러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것이 진정한 회개입니다. 회개는 하나님을 등지고 살아왔던 삶에서 하나님을 마주보며 사는 삶으로의 전환입니다. 회개는 자기를 세상의 중심에 놓고 다른 이들을 다 주변화시키던 삶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마음 안에서 다른 이들의 아픈 사정을 헤아리는 삶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회개는 나의 가능성에 의지하여 살기보다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의지하여 살기로 다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야기 하면 너무 추상적으로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 조금 구체적으로 말해 볼까요?

세례자 요한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묻는 이들에게 옷 두 벌 있는 사람은 없는 사람에게 나눠주고, 먹을 것이 있으면 나눠 먹으라고 말했습니다. 군인들은 누군가를 강압하여 자기 이득을 취하지 말라 했고, 세리들도 정한 것 이외에 더 거두지 말라고 일렀습니다. 아버지 재산을 다 탕진한 둘째 아들은 집으로 돌아와 아버지 발 앞에 엎드렸습니다. 자기의 죄와 무능 그리고 비참한 형편을 인정한 것입니다. 삭개오는 회개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보여주었습니다. 주님을 자기 집에 모신 후 그는 자기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것이 있으면 네 배나 갚겠다고 말합니다. 주님은 "오늘 이 집에 구원이 이르렀다"(눅19:9a)고 기뻐하셨습니다. 존 웨슬리는 돈 지갑이 회심하지 않으면 아직 참된 회개에 이른 것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회개란 다른 이들과 함께 살아갈 줄 아는 것, 곧 자기 좋을대로 살지 않고 남 좋을대로 사는 것입니다. 물론 그 중심에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신뢰가 있습니다.

회개하라는 명령에 이어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문장이 이어집니다. 마태는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사용하기를 꺼렸기에 '하나님 나라'라는 표현 대신 '하늘 나라'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그러니 '하늘 나라'를 하늘 저 위 어딘가에 있는 나라로 생각하지는 마십시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뜻이 성취 되는 곳, 하나님의 뜻이 지배하는 관계 혹은 삶을 가리킵니다. 이전에는 과도한 욕망에 가려 보이지 않던 참의 세계는 회개를 통해 열립니다. 하늘 나라 혹은 하나님의 나라는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사라진 세계, 곧 모든 이들이 형제 자매의 사랑을 나누며 사는 우애깊은 곳입니다. 어느 날 바리새파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고 묻자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눈으로 볼 수 있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또 '보아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 하고 말할 수도 없다. 보아라,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눅17:21).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의 일상적 만남 속에서 시작됩니다. 우리는 그 씨앗들입니다.

며칠 전 세상을 떠난 신영복 선생은 주역에 나오는 석과불식碩果不食이라는 말에 주목했습니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씨 과실은 먹지 않고 여퉈뒀다가 그 씨를 땅에 묻어 새 싹을 피워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게 바로 희망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바로 하나님 나라를 위한 석과불식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 나라의 완성은 물론 하나님께서 하실 것입니다.

• 나와 함께 일하자
악마의 유혹을 물리치신 예수님, 세상이 뭐라 해도 흔들리지 않는 독립의 사람 예수님은 이제 새로운 세상을 함께 열어갈 이들을 부르십니다. 그 첫번째 대상은 가버나움 인근의 어부들이었습니다. 아무리 물고기를 많이 잡아도 헤롯 안티파스의 정책으로 인해 가난뱅이로 살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 시대의 모순을 가장 예민하게 경험할 수 밖에 없었던 사람들이 예수님의 첫 제자가 되었다는 사실이 의미심장합니다.

갈릴리 바다에 그물을 던지고 있던 베드로와 안드레는 "나를 따라오너라. 나는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로 삼겠다"(4:19)는 주님의 부름을 받았을 때 곧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라갔습니다. 과연 이런 즉각적 응답이 있겠느냐는 물음이 생길 수도 있겠습니다. 저는 성경은 매끈한 텍스트가 아니라 주름이 많은 텍스트라고 말하곤 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많은 것이 생략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기에 성경은 다양한 해석을 향해 열린 텍스트입니다. 주름의 갈피를 면밀히 살피기 위해서는 자기 삶을 그 속에 투입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성경은 그래서 다양한 상황 속에 있는 이들에게 다양한 방식으로 길이 되어주곤 합니다. 베드로와 안드레는 출애굽 공동체의 언어로 말하자면 애굽의 끓은 가마솥을 떠나 광야로 나아간 이들입니다. 세베대의 아들인 야고보와 요한도 주님의 부름에 응답했습니다. 그들은 배와 자기들의 아버지를 놓아두고 예수를 따랐습니다. 지금까지 그들은 자기와 자기 가족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부터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일하는 일꾼이 되기로 작정했습니다.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자는 주님의 꿈에 응답한 것입니다.

주님의 부름에 응답한 이들의 특색은 무엇입니까? '버려두고 떠나는 것'입니다. 아브람은 '살고 있는 땅'과 '난 곳', '아버지의 집'을 떠나 하나님이 보여주는 곳으로 떠났습니다(창12:1). 밭을 갈고 있던 엘리사는 엘리야의 부름을 받았을 때 소를 잡아 백성들에게 주고 스승을 따라 나섰습니다(왕상19:19-21). 익숙하던 곳을 떠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낯선 것과의 만남은 언제나 우리 마음에 동요를 불러 일으킵니다. 사람들은 불퉁거리면서도 자기 자리를 떠나지 못합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길들여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따라 나선다는 것은 불편함을 능동적으로 받아들이는 행위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예수를 따르기 위해 무엇을 버렸습니까? 우리 교회에는 안락한 생활을 등지고 어려운 삶을 택한 이들이 여럿 있습니다. 딱히 예수님의 부름에 응답한 것이라고 말하지는 않지만, 그들이 그 자리에 가는 데 예수님이 큰 역할을 한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낯선 이들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사는 삶은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어리석어 보입니다. 실제로 그들은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을 많이 겪고 있습니다. 일단 경제적인 어려움이 큽니다. 기적적인 도움이 찾아오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바른 삶이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들이야말로 그늘진 땅을 비추는 작은 불빛들입니다. 교회와 교인들이 그들의 꿈을 응원해야 합니다. 그들이 지쳐 낙심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사랑이 미움과 폭력보다 강하고, 빛이 어둠을 이긴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사는 것입니다. 난민들이 줄을 잇고, 테러와 공포가 끊이지 않고, 인간의 상호 신뢰는 점점 줄어들고 있는 시대입니다. 그렇기에 성도들의 믿음과 인내가 필요합니다. 겨울의 한복판입니다. 우리의 존재가 누군가에게 햇살 한 줌이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삶이 주님이 살아계시다는 사실에 대한 증언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16년 01월 17일 11시 03분 51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