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6. 하늘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
설교자 신진식
본문 눅 3:21-22
설교일시 2016/02/07
오디오파일 s20160207.mp3 [9349 KBytes]
목록

눅 3:21-22
(2016/02/07)
[백성이 모두 세례를 받았다. 예수께서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시는데,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예수 위에 내려오셨다. 그리고 하늘에서 이런 소리가 울려 왔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나는 너를 좋아한다.”]


입춘을 갓 지나고 설을 앞둔 주일입니다. 교회력으로는 사순절이 시작되는 성회수요일을 앞둔 주현절의 마지막 변화주일이기도 합니다. 오늘 예배 가운데 봄날의 햇살같은 주님의 은총이 저와 여러분과 미국에서 교민을 위해 말씀을 전하시는 담임 목사님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마음, 생명의 근원
새해를 맞이하며 마음먹은 일들이 잘 이루고지고 있는지요? 이번 설교를 준비하면서 새삼 “마음먹다”라는 한국말 표현이 오묘하게 느껴졌습니다. 성서는 마음이 인간 존재의 근원이라고 말합니다. 악인(惡人)과 선인(善人)이 따로 존재하지 않고, 인간은 마음먹기에 따라 악인이 될 수도 있고 선인이 될 수도 있음을 이야기합니다. 그 ‘마음먹음’의 가능성 앞에 서 있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성서의 잠언도 “그 무엇보다도 너는 네 마음을 지켜라 그 마음이 바로 생명의 근원이기 때문이다”(잠언4:23) 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마음은 이야기를 듣고, 보고, 말하며, 성장합니다. 그리고 이야기를 새롭게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이야기는 힘이 있습니다. 이야기는 질서를 만들고, 이야기는 틀(frame)을 만들어냅니다. 이야기들로 채워진 마음은 그 이야기에 따라 세상을 바라보고, 자신을 바라봅니다. 마음에 잇닿은 그 이야기에 따라 세상을 만들어가고, 자신을 만들어갑니다. 우리는 누구인지,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어떠한 곳인지, 우리는 어떠한 존재를 지향하는지, 우리는 어떠한 세상을 꿈꾸는지 알고 싶다면, 지금 우리의 마음을 채우고 있고 우리의 마음이 잇닿아 있는 그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면 됩니다. 마음은 모든 것이 시작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뒤덮은 이야기
A.D. 70년, 예루살렘의 성전이 무너집니다. 로마 제국은 티투스 장군을 앞세워 예루살렘을 초토화시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을 모두 이방 땅으로 뿔뿔이 흩어버립니다. 유대인들은 성전 체제를 비판했던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저주했습니다. 더 이상 유대 회당에서 자신들의 신앙을 지킬 수 없었던 교회는 분열의 위기에 처합니다. 성전이 무너진 자리에서 유대인들은 토라를 다시 탐구했고,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깊이 묵상했습니다. 그 성찰의 열매가 바로 신약성서의 복음서들입니다. 복음서의 이야기는 놀라운 힘을 발휘했습니다. 예수의 이야기는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을 온전히 채웠고, 시대의 어둠 속에서도 빛이신 그리스도를 따라 자신들의 삶과 교회를 든든히 세워갔습니다.

특히 누가는 복음서를 시작하면서 예수의 삶의 자리를 뒤덮고 있던 이야기들을 상징적인 인물들을 통해 암시합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제국을 통치하고 구레뇨가 시리아의 총독으로 있을 때 예수께서 베들레헴에서 탄생했음을 기록합니다.(눅 2:1) 티베리우스 황제가 왕위에 오른 지 열다섯째 해, 본디오 빌라도가 총독으로 유대를 통치하고, 헤롯이 갈릴리 지방의 분봉왕으로 있을 때,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가 되어 세례 운동을 펼치고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눅 3:1~20)

로마가 알렉산더 대왕의 후예를 자처하며 고대 근동 세계에 등장합니다. B.C. 27년, 악티움 해전에서 자신의 정적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를 제거한 옥타비아누스는 로마의 1인자가 됩니다. 로마 원로원은 옥타비아누스에게 로마군 총사령관 ‘임페라토르’의 칭호를 부여하고, 로마 제국의 종교 제사를 집전하는 대제사장 ‘폰티펙스 막시무스’의 칭호도 부여합니다. 그리고 지존자를 가리키는 칭호 ‘아우구스투스’까지 부여받은 옥타비아누스는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가 됩니다. 인류 역사에서 가장 화려한 스펙을 자랑하는 인간이 등장한 것입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강력한 로마 군대와 로마법을 기반으로 영토를 확장합니다. 제국의 속국들은 총독과 분봉왕 제도로 철저하게 그리스-로마식으로 통치 받습니다. A.D. 14년,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76세의 나이로 죽고 그 자리를 티베리우스 황제에게 물려줍니다. 그가 죽으면서 티베리우스에게 남긴 마지막 말은 “연극은 끝났다. 박수를 쳐라. Acta est fabula, plaudite."입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연극 중에도 뭇 민족의 백성들에게 박수를 강요했습니다. 로마 제국은 다른 민족들이 여러 가지 면에서 열등하기 때문에 우월한 민족의 지배가 필요하다고 간주했습니다. 그들은 시리아인과 유대인 같은 일부 민족은 기본적으로 자주성이 없고 굴종적이라서 노예로 만드는 것 말고는 거의 아무런 도움도 안 된다고 여겼습니다. 로마 제국은 도로, 수로, 로마의 법률과 같은 문명의 혜택을 타민족에게 가져다줄 사명자임을 스스로 내세웠고, 감히 그 사명에 저항하는 세력이 있으면 철저하게 응징했습니다. 로마 제국의 통치가 미치는 곳에는 굴욕과 모욕이 아니면 죽음의 두려움이 땅의 백성들을 옭죄었습니다. 누가는 바로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대에 예수께서 이스라엘의 슬픔의 땅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고, 티베리우스 황제 시대에 공생애를 사셨으며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러한 로마 제국의 통치와 문화에 자신들의 민족 신앙으로 격렬하게 저항했습니다. 유대 민족의 문화가 로마 제국의 문화보다 우월하며, 역사 속에서 유대 민족에게 계시된 하나님의 뜻은 이스라엘에게만 배타적으로 드러났고, 그럼에도 하나님의 뜻은 보편타당한 것이라고 자부했습니다. 유대 민족만이 택함을 받은 민족이라는 자긍심은 더욱더 유대인들을 토라에 집착하게 했고,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는 것만이 자신들의 신앙과 민족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최선의 길임을 확신했습니다. 그럴수록 유대인들은 메시아를 대망했습니다. 메시아 사상은 기름 부음을 받은 다윗과 그의 자손이 마지막까지 이스라엘을 다스리고 이방 민족까지 다스리게 될 것이라는 유대인들의 신앙의 정치적 표현이었습니다.

제국의 압제 아래에서 종말을 선포하며 메시아 신앙을 광야에서 거리에서 외치는 예언 공동체들이 생겨났습니다. 세례자 요한도 기울어져 가는 한 시대의 마지막 예언자였습니다. 그도 메시아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는 유대 민족의 죄악을 좌시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모든 유대인에게 심판의 날이 다가오고 있음을 설교하였습니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고 속죄의 상징으로 세례를 받아야한다고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이 세례가 도래할 메시아 시대를 준비하는 길임을 설교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세례는 제2의 해방 출애굽을 꿈꾸던 뜨거운 민족적 염원이 담긴 성사(sacrament)였습니다.

◾하늘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
안타깝게도 예수의 삶의 자리를 뒤덮고 있던 로마 제국의 거대한 이야기와 유대 민족의 뜨거운 이야기에서는 땅 위를 살아가는 평범한 한 사람의 존재의 가치와 삶의 의미는 소외 되었습니다. 오히려 이야기들이 만들어내는 질서를 어기고 그 틀에서 벗어나면 무가치한 존재가 되고 쓸데없는 인생이 될 거라는 두려움의 감옥으로 땅의 백성들을 가두었습니다. 땅의 백성들은 무가치한 존재가 될지도 모른다는, 쓸데없는 인생을 살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휩싸여 세상의 이야기들이 만들어내는 질서와 틀을 숭배했습니다.

오늘의 성서 본문은 로마 제국의 거대한 이야기와 유대 민족의 뜨거운 이야기가 지배하는 땅의 현실에서 예수께서 하신 처음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백성들이 모두 받은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신 일입니다. 우리는 종교적인 선입견을 버리고, 신앙의 선취적 태도를 뒤로하고, 예수께서 받으신 세례와 예수께서 드린 기도의 의미를 되새겨야겠습니다. 그 세례와 기도에 비춰진 예수님의 마음의 풍경을 조심스럽게 헤아려야겠습니다. 세례 받으심은 땅의 백성들의 아픔과 슬픔, 그리고 그들의 소망에 공감하는 마음의 이끌림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땅의 백성들을 하나님의 뜻으로 인도하려는 세례자 요한의 시대정신에 대한 연대 의식의 표현이었을 것입니다.

이 공감과 연대의 마음을 품고 이 땅에서 요셉의 아들로 태어나 목수로 생을 산 예수가 드린 기도에 비춰진 마음의 풍경은 어땠을까요. 거대하고 뜨거운 이야기들 앞에 무력감을 느낀 슬픔 아니었을까요. 어쩌면 땅의 현실을 외면하고 숨어계신 것 같은 하나님에 대한 원망과 절망 아니었을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밖에는 의지할 수 없는 처연함 아니었을까요. 처연함! 이 처연함이 드리워진 마음이 만들어낸 풍경은 어떤 풍경이었을까요. 나희덕 시인의 시를 읽으며 그 마음의 풍경을 함께 우리들의 마음에 담아내고 싶습니다.

높은 가지를 흔드는 매미 소리에 묻혀
내 울음 아직은 노래가 아니다

차가운 바닥 위에 토하는 울음
풀잎 없고 이슬 한 방울 내리지 않는
지하도 콘크리트 벽 좁은 틈에서
숨 막힐 듯, 그러나 나 여기 살아있다
귀뚜르르 뚜르르 보내는 타전 소리가
누구의 마음 하나 울릴 수 있을까

지금은 매미 떼가 하늘을 찌르는 시절
그 소리 걷히고 맑은 가을 하늘이
어린 풀숲 위에 내려와 뒤척이기도 하고
계단을 타고 이 땅 밑까지 내려오는 날
발길에 눌려 우는 내 울음도
누군가의 가슴에 실려가는 노래일 수 있을까

-나희덕, <귀뚜라미>

예수의 이 처연함이 자기를 잊고 신적 진실로 나갈 수 있었던 힘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를 하시는데,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예수 위에 내려오셨고, 하늘에서 이야기(소리)가 들렸다고 누가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땅의 하늘을 뒤덮은 세상의 거대하고 뜨거운 이야기들이 걷히고 주님의 영이 내려와 하늘의 이야기가 예수의 마음을 채운 사건입니다. 그 하늘의 이야기는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나는 너를 좋아한다”는 하나님의 사랑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스바냐 선지자가 환상 가운데 들었던 하나님의 사랑 이야기와도 같습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신다. 그는 전능한 구원자이시다. 그가 너를 아주 기쁘게 여기시며 너를 말없이 사랑하시고 너 때문에 노래를 부르며 즐거워하실 것이다.” (현대인 성경, 스바냐 3:17)

이 하늘의 이야기가 예수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이 하늘의 이야기가 예수의 마음을 옧죈 그 거대하고 뜨거운 세상의 이야기들을 뜬소문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예수님 마주한 이 사건이 기독교 신앙이 시작되는 준거점이요, 기독교 신앙의 능력입니다. 예수께서 공생애 동안 스스로 마중물이 되어서 땅의 백성들을 치유하고 회복시킨 복음의 능력이 바로 이 사건에 다 녹아있습니다.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이 위기의 시대에 자신의 삶을 온전히 살아내고, 교회를 든든히 세워갈 수 있었던 것도 동일하게 이 사건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도 구원하시는 그리스도의 능력일 이렇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유대 사람은 기적을 요구하고, 그리스 사람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전합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은 유대 사람에게는 거리낌이고, 이방 사람에게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러나 부르심을 받은 사람에게는, 유대 사람에게나 그리스 사람에게나, 이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고전 1:22-24)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무르게 하기 위하여 나는 더욱더 기쁜 마음으로 내 약점들을 자랑하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병약함과 모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란을 겪는 것을 기뻐합니다. 내가 약할 그 때에, 오히려 내가 강하기 때문입니다.”(고후 12:9-10)


◾마음의 습관
하늘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은 세상을 지배하는 이야기들에 주눅들지 않습니다. 하늘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에게는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조건이 어떠하든지 삶은 하나님의 축복임을 깨닫고 온전히 살아내는 은혜가 있습니다. 하늘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한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를 천하(민족, 국가, 종교)보다 귀하게 여깁니다. 하늘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은 하늘의 이야기를 참된 법정으로 삼아, 불의와 악습에 항거합니다.

지금 우리의 삶의 자리를 뒤덮고 있는 거대하고 뜨거운 이야기는 무엇입니까? 그 이야기들의 그늘 아래에서 우리는 어떤 이야기를 듣고, 보고, 만들어 내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이 아니라, 예수님이 그리셨던 마음의 풍경을 우리 마음에 담아내야겠습니다. 이것이 부르심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의 습관(habitus)입니다. 예수님의 마음과 잇닿은 여러분의 삶의 자리마다 햇살 같은 하늘의 이야기가 넘쳐나길 기도합니다. 주님의 은총이 우리와 함께하실 것입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16년 02월 07일 11시 02분 01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