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1. 제자의 길
설교자 김기석
본문 요 15:18-27
설교일시 2016/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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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의 길
요 15:18-27
(2016/03/13 사순절 제5주)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세상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하였다는 것을 알아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여 있다면, 세상이 너희를 자기 것으로 여겨 사랑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세상에 속하지 않았고 오히려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가려 뽑아냈으므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종이 그의 주인보다 높지 않다고 한 말을 기억하여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했으면 너희도 박해할 것이요, 또 그들이 내 말을 지켰으면 너희의 말도 지킬 것이다. 그들은 너희가 내 이름을 믿는다고 해서, 이런 모든 일을 너희에게 할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나를 보내신 분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가 와서 그들에게 말해 주지 아니하였더라면, 그들에게는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들이 자기 죄를 변명할 길이 없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까지도 미워한다. 내가 다른 아무도 하지 못한 일을 그들 가운데서 하지 않았더라면, 그들에게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들이 내가 한 일을 보고 나서도, 나와 내 아버지를 미워하였다. 그래서 그들의 율법에 '그들은 까닭 없이 나를 미워하였다'고 기록한 말씀이 이루어진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 영이 나를 위하여 증언하실 것이다.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

• 정의와 공의가 무너진 세상
주님의 은총과 평화를 기원합니다. 금주에 세상의 이목을 온통 집중시켰던 것은 바둑 기사(碁師)인 이세돌 9단과 알파고의 대결이었습니다. 시작하기 전만 해도 아직은 기계가 사람을 이길 순 없을 거라고 예측하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뚜껑을 열어보니 결과가 아주 달랐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고도의 연산 능력으로 무장한 프로그램을 이기는 것이 애초에 불가능했다고 말하며 씁쓸한 표정을 짓습니다. 사람이 만든 프로그램이 사람을 이기는 시대가 왠지 불길한 파국을 미리 보여주는 것 같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자 어떤 분은 뭘 그거 가지고 그러냐고 자신은 이미 오래 전에 밥 짓는 일을 쿠첸에게 빼앗긴지 오래 되었다고 우스갯소리를 하더군요. 인공 지능(artificial intelligence)에 대한 논의가 다시 일고 있습니다. 저는 바둑도 모르고 인공 지능 연구가 어느 단계에 이르렀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인공 지능이 하기 어려운 일이 무엇일까 상상해 보았습니다. 타자의 아픔에 공감해 눈물을 흘리는 것, 이길 수도 있지만 상대를 배려해서 일부러 져 주는 것, 알고도 속아주는 것, 타자를 살리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는 것 등이 떠올랐습니다. 이것도 인공 지능 속에 프로그램화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할 겁니다. 발전하는 인공 지능 연구는 인간의 인간다움이 무엇인지를 다시 묻도록 우리를 몰아치고 있습니다.

주님을 길과 진리와 생명으로 고백하는 우리는 마음의 중심을 잃지 않기 위해서라도 예수님께 더욱 집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 전통은 예수님을 '참 하나님, 참 사람'(Vere Deus, Vere Homo)이라고 고백합니다. 세상이 온통 바닥부터 흔들리고 모든 가치관이 착종되는 때에 예수님의 삶을 기준음 삼아 우리를 조율해 나갈 용기를 발휘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인생이 혼돈에 빠지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은 세상을 떠날 날이 가까운 것을 아시고 제자들에게 용기를 불어넣기 위해 애쓰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주님은 세상에 남겨질 제자들에게 닥쳐올 고난을 내다보고 계십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세상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하였다는 것을 알아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여 있다면, 세상이 너희를 자기 것으로 여겨 사랑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세상에 속하지 않았고 오히려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가려 뽑아냈으므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18-19)

어둠이 지배하고 있는 세상은 빛을 미워합니다. 자기 배를 하나님으로 삼고 사는 사람들, 곧 욕망이 이끄는 대로 사는 이들은 자기들의 도덕적인 열패감을 상기시키는 사람들을 싫어합니다. 악한 일을 도모하는 이들은 홀로 선을 따르려는 이를 미워합니다. 우리 속담에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둥글둥글하게 살라는 교훈입니다. 뭔가 잘못된 것을 바로잡기 위해 나서는 사람을 보면 사람들은 '가만히만 있으면 중간은 간다'고 말합니다. 자식들의 평안을 원하는 부모들도 자식들에게 중뿔나게 나서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정의'와 '공의'가 무너진 세상은 그렇게 열리는 것입니다. 악을 보고도 침묵하는 이들이 많아질 때 악인들은 제 세상을 만난듯 활개칩니다. 결국 소속의 문제입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은 세상의 문법을 따라 살아갑니다. 그래서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주님께 속한 사람은 새로운 문법을 따라 살기에 세상이 불편하게 여깁니다. 따돌림과 박해는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이들이 피하기 어려운 현실입니다.

• 박해 앞에서 움츠러들지 말라
거룩함을 자랑하는 사람들은 병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과 귀신들린 사람들을 '더럽다' 낙인 찍고 도와시 했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긍휼히 여겨 고쳐주셨습니다. 그래도 그때까지는 별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가 사회의 맨 밑바닥을 형성하고 있는 이들과 연대하고, 피라미드 세계의 상층부에서 거들먹거리는 이들의 위선과 잘못을 신랄하게 지적하자 상황은 달라졌습니다. 그는 제거해야 할 사람이 된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미움 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셨습니다. 한동안 <미움 받을 용기>라는 책이 대중들의 시선을 집중시켰습니다. 제목이 참 재미있지요? 우리 삶이 고달픈 것은 항상 타자의 마음에 들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삶의 주체가 되지 못하고 항상 남의 눈을 의식하며 삽니다. 갈등을 유발할 만한 말은 가급적 자제하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마음에 그늘은 남게 마련이어서 사람들 앞에서는 웃는 얼굴을 보이지만 돌아서서는 불퉁거립니다. 자유롭지도 않고 행복하지도 않습니다. 그런 이들은 발에 보이지 않는 차꼬를 차고 사는 셈입니다. 모든 이들의 사랑을 받고자 하는 열망이 삶을 힘겹게 만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미움 받을 용기를 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타자의 시선으로부터 해방되는 순간 우리 속에 자유가 유입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직면해야 할 박해를 예고하십니다. "사람들이 나를 박해했으면 너희도 박해할 것이다". 평안함과 복이 아니라 미움과 박해가 제자들에게 주어지는 보상이라면 보상입니다. 예수님의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그것은 어둠과 온몸으로 부딪쳐 파란 불꽃을 만들어내는 삶입니다. 자기를 희생함으로 남을 살리는 길입니다. 불의를 불의로 드러내는 길입니다. 그렇기에 박해는 참되게 믿는 자들이 늘 직면할 수밖에 없는 현실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우리 현실은 어떠합니까? 믿지 않는 이들은 기독교인들을 조롱합니다. 하지만 박해를 가하지는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자기들의 삶을 크게 위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언자들이 그렇게 크게 외쳤던 공의와 정의를 더 이상 외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불의한 세상 현실을 폭로하고, 하나님의 뜻을 등진 채 살아가는 이들을 준엄하게 꾸짖지 않기 때문입니다. 조롱거리로 변했지만 박해 받지는 않는 교회와 신자, 바로 이것이 싸구려 은혜에 탐닉한 결과입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복음성가는 기독교인이든 아니든 애창하는 노래입니다.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다'는 가사가 사람들의 가슴을 울리는 것 같습니다. 사는 게 워낙 팍팍하고 힘드니까 사람들은 어디선가 위안을 구합니다. 가끔 젊은이들이 부르는 CCM을 들으면서 저는 그 속에 담긴 '애상' 혹은 '감상'에 혼란스러워지곤 합니다. 자기 손으로 자기를 감싸안는 듯한 곡이 많습니다. 척박한 땅을 일구기 위해 땀흘리겠다는 결기가 느껴지는 곡이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다'는 가사는 '당신은 사랑하기 위해 태어났다'는 대구(對句)가 필요합니다. 사랑이란 자기를 벗어나는 능력입니다. 그런 능력이 속에서 발현될 때 우리는 새 사람이 됩니다.

• 새로운 삶의 용기
"내가 다른 아무도 하지 못한 일을 그들 가운데서 하지 않았더라면, 그들에게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들이 내가 한 일을 보고 나서도, 나와 내 아버지를 미워하였다."(24)

주님이 하신 일은 무엇입니까? 고쳐 온전하게 하는 일이 그 첫째이고, 벽을 무너뜨리려 서로 소통하게 하는 일이 그 둘째입니다. 주님은 병든 사람은 물론이고 온통 자기에게 사로잡혀 다른 이들에게 반응할 줄 모르는 이들도 고쳐주셨습니다. 그래서 피가 돌고 따뜻한 온기가 넘치는 사람으로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또한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가르는 담들을 무너뜨려 서로의 얼굴을 보게 하셨고, 만날 수 없었던 사람들이 만나게 하셨습니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확장입니다. 주님이 하신 일을 보았으면 주님을 따르는 우리도 그 일을 해야 합니다.

뭔가 속으로 무너져 허수한 느낌에 사로잡힌 사람 곁에 머물면서 그의 빈 잔을 채워주고, 먼 행로에 지쳐 맥이 빠진 사람에게는 잠시 기댔다가 갈 수 있게 어깨를 내주고, 무너진 관계의 다리를 이어주기 위해 애쓰는 것, 그리고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것, 이전보다 조금이라도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땀흘리는 것, 바로 이런 것들이 우리가 일상 가운데서 할 수 있는 하나님 나라 운동입니다. 돈이 모든 것을 다 말하는 세상에서 돈으로 환산되지 않는 일에 보람과 기쁨을 느끼는 이들이 있음을 세상 앞에 보여주어야 합니다. 일산에 있는 명지병원에서는 일년에 250번 이상의 로비 음악회가 열립니다. 전문적인 연주자들이 환자들을 위해 자원봉사로 하는 일입니다. 그들 중 일부는 'bed-side concert'라 해서 환자들의 침상을 찾아가 연주해주는 이들도 있습니다. 연주를 듣는 이도 감동하지만 연주하는 이도 감동한다고 합니다. 저는 이것도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라 생각합니다. 이런 일을 기획한 이들의 상상력이 참 소중합니다.

세상은 일시에 변화되지 않습니다. 좋은 방향으로의 변화는 아주 완만하게 나타납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땀과 눈물, 그리고 피를 통해 세상은 조금씩 나아집니다. 하지만 나쁜 쪽으로의 변화는 급격하게 나타납니다. 아차 하는 순간 우리가 애써 성취했던 것들이 일거에 무너질 수도 있습니다. 분별력이 필요한 것은 그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이들이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합니다.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결에 묻힌 감이 있지만 사실 지난 금요일은 동일본지진의 여파로 후쿠시마 원전 폭발사건(2011년 3월 11일)이 일어난지 5주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아직도 원전은 수습이 안 된 상태입니다. 녹아버린 핵연료를 끄집어내는 데만도 최소 25년 이상 걸린다고 합니다. 후쿠시마 인근 지역에서는 방사선량이 기준치의 10배 이상으로 나타나고 있고, 갑상선암 환자도 급증하고 있고, 가축들에게도 흰 반점이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방사능에 오염된 토양과 오염수를 처리할 방법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1986년에 일어난 체르노빌 핵발전소와 더불어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는 핵 에너지에 의지하는 인류가 사실은 시한폭탄을 안고 살아가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핵발전소를 늘리고 있습니다. 북한의 핵무기 못지않게 위험한 것이 핵발전소입니다. 거기에 기대 사는 이들은 핵발전소가 안전하다고 강변하지만 인간은 갑작스런 재난 상황을 100% 통제할 수 없습니다. 일단 재난이 벌어지면 그 결과는 치명적입니다. 그렇기에 참으로 생명과 평화를 추구하는 이들이라면 과도한 전기 의존적 삶에서 벗어나는 동시에 핵발전소의 철폐를 요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이들은 이익이나 효율을 앞세우며 생명을 위험에 빠뜨리는 일을 거절할 수 있어야 합니다.

• 오소서, 성령이여
주님은 세상에 고아처럼 남겨질 제자들을 위해 보혜사께서 오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도 보혜사 곧 진리의 영을 기다립니다. 부드럽게 부는 봄바람이 잠들어 있던 생명을 깨우듯이 하나님의 영이 우리 속에 들어오실 때 우리는 새로운 존재로 거듭날 것입니다. 미혹하는 영에 붙들린 이들이 참 많습니다. 요한은 보혜사 성령께서 하시는 일을 두 가지로 압축하여 들려줍니다.

첫째, "그가 오시면,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세상의 잘못을 깨우치실 것이다"(요16:8). 죄의 뿌리에는 불신앙이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에 의존하여 살아가려는 영혼의 완고함이 바로 죄입니다. 주님이 가르치시는 의는 하나님에 대한 깊은 신뢰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이들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평가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을 따라 살아갈 뿐입니다. 심판이란 빛이신 주님을 영접하지 않는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가 참으로 믿고 의지해야 할 분이 누구인지를 일깨워주십니다.

둘째,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실 것이며, 또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실 것이다"(요14:26). 성령은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일깨워주실 뿐만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함으로써 우리를 바른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성령은 생명의 바람입니다. 신바람입니다. 생기입니다. 하나님께서 흙으로 빚으신 사람에게 생기를 불어 넣으셨던 것처럼 지금도 우리에게 숨을 불어 넣어주시면 우리는 새로운 존재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면 저 알파고처럼 무심하게 이기는 일에만 골몰하지 않고 가끔은 남에게 져주기도 하고, 다른 이들의 아픔 때문에 눈물 콧물 다 흘리기도 하고, 손해인 줄 뻔히 알면서도 불의를 준엄하게 꾸짖는 용기를 내게 됩니다. 이런 하늘 바람을 한번 만나지 못한다면 우리 인생이 너무 불쌍하지 않은가요? 온통 제 욕망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도리질치며 완강하게 주님의 숨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자기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패거리를 이루는 사람들을 가리켜 니체는 헤르덴멘쉬(Herden-mensch), 곧 짐승 떼와 같은 인간이라 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 속에 있어야 우리는 사람다운 사람이 됩니다. 주님의 생기가 우리를 채우지 않으면 우리는 평화의 일꾼, 생명의 일꾼으로 살 수 없습니다. 사순절의 남은 기간 완악한 우리 마음을 내려놓고 우리를 새롭게 빚어주실 주님의 은총 앞에 겸허히 엎드릴 수 있기를 빕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16년 03월 13일 10시 31분 42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