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31. 삶의 구조조정
설교자
본문 왕상19:19-21
설교일시 2001/8/5
오디오파일
목록

삶의 구조조정
왕상19:19-21
(2001/8/5)


행복에 이르는 두 길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답니다. 먼저 뭔가를 잘해야 행복한 사람이 있어요. 그는 그 목표에 도달할 때까지는 행복하지 않아요. 그는 목표 지향적인 사람입니다. 그는 능력 있는 사람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서툴기는 하지만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행복해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에게는 큰 욕심이 없습니다. 다만 자기 일을 즐깁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도 능력 있는 사람인데, 남들과 비교해서 그렇다는 말이 아니라, 즐길 줄 아는 능력이 있다는 말입니다. 가만히 보면 이런 이들의 표정은 참 느긋해요. 뭐 하나 급할 게 없고, 굳이 남보다 잘하려고 안간힘을 쓰지도 않습니다.

제 후배 중에 하나가 그런 유형의 사람입니다. 그는 몇 년 전부터 관악기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자기가 악기를 배우고 있다는 표를 냅니다. 틈만 나면 그는 연주를 들려주려고 애씁니다. 아무리 들어봐도 형편없는데, 그는 가끔 제게 압력을 넣습니다. 어느 교회에 자기 아이를 데리고 가서 플룻을 연주했더니 교인들이 다 좋아했다면서 '왜 형은 나를 부르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형도 악기 하나는 배우는 게 좋지 않겠느냐고 성화를 부립니다. 그는 급기야 얼마 전부터 별로 배울 마음도 없는 후배들을 불러모아 악기 가르치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돈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누구한테 칭찬을 듣는 것도 아닌데 그는 가르치는 일을 즐깁니다. 나는 염려스러워서 퉁명스럽게 말합니다. "아이구, 너나 망가져라. 이 녀석아." 그래도 그는 별로 싫은 내색도 없이 형도 배울 날이 올 거야, 하고 제멋대로 예언을 합니다. 돈키호테를 닮은 그 후배는 참 이쁜 구석이 있습니다.

분주한 일상 가운데서 시간을 만들어서 뭔가를 한다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만은 아닙니다. 그것도 먹고사는 일에 필요해서 하는 일 말고 순전히 즐거워서, 하고 싶어서 하는 일 말입니다. 나이 60 줄에 접어들어 동네 피아노 학원에 다니면서 '나비야 나비야 이리 날아오너라'를 치면서 기꺼워하는 분을 보았습니다. 취미생활을 위해 뭔가를 배우러 다니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아무도 모르게 사회복지 시설을 찾아가 허드렛일을 하는 분도 있습니다. 제가 알기에 대단히 바쁜 사람이고, 체력도 따라주지 않는 데도 숨은 봉사자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은 비교적 건강하게 살아갑니다. 삶에 탄력이 있어서 다른 이들에게 기쁨을 줍니다. 자기 삶의 연출자가 되었기 때문인가요? 시간의 횡포를 이겨내는 방법을 찾아냈기 때문일까요?


곁가지들을 잘라내고

저는 가끔 교인들에게 "행복하세요?" 하고 묻습니다. 어떤 분들은 가을 하늘같이 청명한 목소리로 "네" 하고 대답합니다. 그러면 제 마음도 덩달아 행복해집니다. 하지만 '참 오래 살다보니 별 희한한 질문을 다 받아보는구나' 하는 표정으로 멀뚱멀뚱 저를 바라보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면 제가 민망해집니다. 어느 목사님은 그런 이들에게 "그럼 살지마", 하고 단호하게 말하던데 저는 그러지는 못합니다. 우리 모두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행복할 건더기가 있어야 행복하지, 하고 말씀하지 마십시오. 행복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 있습니다. 오랫 동안 사용하지 않은 행복의 심지를 가다듬는 것이 행복의 조건을 찾아 표류하는 것보다 낫습니다. 물론 바깥의 조건이 너무 힘겨워서 안에 있는 행복을 도저히 찾아낼 길이 없는 분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생의 조건이 어떠하든지 우리는 예수님으로부터 근본적인 진단을 받습니다. "너는 많은 일로 염려하며 들떠 있다. 그러나 필요한 일은 하나뿐이다."(눅10:41-42a) 예수님 일행을 대접하는 일에 마음을 빼앗겨 허둥거리던 마르다가 동생 마리아를 원망할 때 하신 말씀입니다.

행복을 원한다면 예수님의 이 말씀을 진지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 삶이 단순해지지 않는 한 세월과 더불어 행복은 점점 멀어져 갈 것입니다. 익사 직전에 있는 사람이 아무리 발버둥쳐도 땅에서 멀어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 삶에 없어도 좋은 곁가지들을 잘라내야 합니다. 성서는 온통 삶의 구조조정을 단행한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 차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에게 익숙하던 생활 방식을 버리고, 낯선 세계로 나아가야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러했고, 야곱이 그러했습니다. 모세도 그렇고,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러했습니다. 익숙하던 것을 떠난다는 것은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입니다. 하지만 떠나지 않는 한 우리 삶의 지평은 넓어지지 않습니다.


돌아갈 다리를 불사르고

오늘 본문에서 엘리사는 엘리야를 통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습니다. 그는 열 두 겨릿소를 앞세우고 밭을 갈고 있었습니다. 열 두 마리 겨릿소로 밭을 간다는 데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유족한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하나님이 부르셨을 때 즉각적으로 응답했습니다. 고생길이 훤한데 말입니다. 하나님 편에 가담한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그렇게 편안한 길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엘리야가 자기 겉옷을 벗어 그의 위에 던졌을 때, 엘리사는 그것이 저항할 수 없는 하나님의 부르심임을 알아차립니다. 그가 한 일이 무엇입니까? 먼저 부모님에게 작별 인사를 드립니다. 그런 후에 소 한 겨리를 잡고, 소를 부리는데 필요한 농구들을 불살라 고기를 삶아 일꾼들에게 나누어줍니다. 일종의 작별 예식입니다. 그는 돌아갈 다리를 스스로 불태운 셈입니다. 엘리야를 따라 나선 그가 한 일은 무엇입니까? 엘리야를 수종드는 것이었습니다. 유족한 부자가 나라에서 위험인물로 낙인찍힌 이의 사환이 된 것입니다. 이처럼 극적인 변화가 있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삶의 구조조정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그게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속에 갈등을 일으킵니다. 하나님이 하라고 하시는 일은 우리 본성 상 그다지 하고 싶지 않은 일인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내 마음을 이기지 않고는 우리가 웅숭깊은 영혼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없는 이유를 차곡차곡 쌓아놓고 경우에 따라서 적절히 사용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달아나는 사람일수록 이유가 많고 응답할 수 없는 사정이 많아집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어려운 일을 만나면 천연덕스럽게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 내 마음 아시지요? 내 사정도 아시지요? 헤아려주세요." 그러면 하나님이 뭐라 하실까요? 각자 생각해 보십시오.


삶의 구조조정을 미루지 말라

엘리사는 행복한 삶의 조건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많은 제자들도 배와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바울도 이전에 그의 삶을 화려하게 장식했던 모든 자부심의 근거들을 배설물처럼 버리고 예수를 위해 고난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면 뭔가를 버리지 않으면 안됩니다. 주님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눅9:23) 하셨습니다. 예수를 따르기 위해 여러분은 무엇을 버렸습니까? 아브라함은 공포와 전율 속에서 이삭을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돌려주시기는 했지만 말입니다.

영생을 얻기 위해 우리는 오늘 무엇을 바치고 있습니까? 몸을 위해서는 우리가 참 마음을 많이 쓰고 삽니다. 좋다는 음식은 다 찾아 먹고, 조금 아프면 얼른 병원으로 달려갑니다. 의사선생님의 말씀을 아주 어렵게 알아서 어린아이처럼 말을 잘 듣습니다. 자기 이미지를 바꾸기 위해서 몸의 구조조정을 단행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다이어트와 성형 수술 말입니다. 하지만 영혼을 위한 구조조정에 우리는 왜 그리도 인색합니까? 하나님의 일을 하기에는 너무 바쁘다구요? 정직하게 말해 봅시다. 시간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할 마음이 없는 것 아닌가요? 아니, 할 마음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닐 거예요. 하지만 선뜻 내키지 않는 것이지요. 첫 걸음이 중요합니다.

시간의 구조조정을 서두르십시오. 우리 인생은 길지 않습니다. 불필요한 만남을 위해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정말로 나를 필요로 하는 이들 곁에 머물기 위한 시간을 만들며 사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보낼 시간을 늘 마련하고 사십시오. 예수님은 수많은 사람들에 둘러싸인 채 사셨지만, 하나님과 대면하는 고요한 시간은 반드시 확보해놓고 사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시간을 요구하실 때 '죄송합니다. 이번에는 정말 제가 바빠서요' 하고 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일에 동참할 수 있는 기회를 잃게 될 것이고, 그것은 동시에 그 일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려는 은총을 잃는 일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어려운 시간을 하나님께 바치면 하나님은 우리가 계획했던 것보다 더 좋은 것을 마련해 주십니다. 애굽에서 준비해간 음식이 끊어졌을 때 하늘에서 만나가 내렸습니다. 신앙의 이치가 그렇습니다.

욕망의 구조조정을 미루지 마십시오. 욕망의 수위를 조금 낮추십시오. 그러면 우리는 자유를 선물로 받게 될 것입니다. 욕망의 수위를 낮춘 사람은 나눔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회개하라고 외치는 세례자 요한에게 사람들이 와서 묻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요한의 대답은 간결합니다.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없는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눅3:10-11) 중생의 문인 회개의 열매는 바로 나눔입니다. 회개한 사람은 나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눌 수 없는 사람은 여전히 욕망의 포로로 살아갑니다. 물론 욕망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욕망이 우리의 행동이나 존재를 규정짓는 가장 강력한 요소라면 그것은 악마적인 것이 됩니다. 덜 가지되 더 많이 누리며 사는 삶을 연습하십시오.

생각도 구조조정해야 합니다. 오직 나만이 옳다는 생각은 우리 영혼의 동맥 경화증을 가져옵니다. 생의 본질에 가까이 다가선 사람일수록 겸손해집니다. 그는 자기가 아는 것이 참 적다는 사실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용납할 때, 더 나아가서 존중할 때 우리의 영혼은 커집니다. 낯선 것은 위험한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의 지평을 넓히는 기회입니다. 인종적인, 지역적인, 정치적인 편견을 버리기 위해 애쓰십시오. 잘 안 되거든 기도하세요. 바리새인을 비롯한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은 그가 자기들의 틀 속에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틀을 깬다는 것은 알을 깨는 아픔이지만 그것은 동시에 성장의 기회임을 알아야 합니다.

삶이 자꾸만 무겁다고 생각되거든 돌아보십시오. 습관적으로 짊어지고 가는 것이 있지 않는가 말입니다. 컴퓨터에는 쓰레기통이 하나씩 있습니다. 쓸데없어진 파일들을 버리는 곳입니다. 그런데 간혹 그 쓰레기통을 비우지 않으면 컴퓨터의 일 처리 속도가 느려지기도 합니다. 우리 삶의 발걸음을 자꾸만 지체하도록 하는 것들을 과감히 청산하십시오. 엘리사는 뒤로 돌아갈 길을 끊고 하나님께 나아왔습니다. 우리의 길은 앞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길은 좁습니다. 그 좁은 길을 걷기 위해 우리는 여장을 가볍게 해야 합니다. 날마다 불필요한 것들을 덜어내는 용기를 내십시오. 그래야 우리는 어려움에 처한 이웃에게 다가갈 수 있고, 하나님의 일을 위해 달려갈 수 있습니다.

등 록 날 짜 1970년 01월 01일 09시 33분 21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