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32. 하나님과 함께 떠나는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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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출33:12-17
설교일시 200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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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함께 떠나는 여행
출33:12-17
(2001/8/12)


구름이 해를 비추면

희랍의 어느 철학자(헤라클레이토스)는 사람은 "똑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들여놓을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물이 흐르고 있고, 우리도 이미 다른 사람이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비슷한 점이 더 많은 다른 사람입니다. 하루 사이에 어린이들은 조금 더 자라고, 어른들은 조금 더 늙습니다. 생각도 감정도 조금씩 바뀝니다. 우리는 모두 시간의 강물을 타고 어딘가로 가고 있습니다. 그곳이 어딘지 아느냐 모르느냐가 문제일 뿐입니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을 길벗삼아 살아갑니다. 가족들로부터, 친구, 직장 동료, 교회 교우들……'나'라고 하는 존재는 이런 이들이 내게 남겨놓은 흔적입니다. 옛 사람의 말을 우리는 옷깃을 여미고 들어야 합니다.

구름이 해를 비추어 노을이 되고, 물줄기가 바위에 걸려 폭포를 만든다. 의탁하는 바가 다르고 보니 이름 또한 이에 따르게 된다. 이는 벗 사귀는 도리에 있어 유념해 둘 만한 것이다.("유몽영" 중에서)

결국 내가 누구와 함께 하느냐가 내 삶을 결정한다는 말입니다. 나의 주체성이라는 것도 사실은 다른 이들과의 관계 속에 있습니다(間主體性). 오래 함께 산 사람들은 서로 닮게 마련입니다. 친구를 보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는 말도 다 일리가 있는 말들입니다. 여러분은 누구를 가까이 하며 살고 있습니까? 술 좋아하는 친구와 사귀면 술을 많이 마시게 되고, 마음 따뜻한 친구와 사귀면 우리 마음도 따뜻해질 것입니다. 성도란 하나님과 늘 동행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동행해주시기를 순간마다 기도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모세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주님과 함께 걷는다는 것

모세가 하나님의 계명을 받으러 시내산에 올라가 있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그 앞에 제사를 바쳤습니다. 하나님은 잠시 동안의 불안을 견디지 못하고, 어린아이처럼 칭얼거리는 백성들에게 정나미가 떨어지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자, 백성들을 데리고 내가 약속한 땅으로 가라. 내가 나의 사자들을 앞서 보내서 너희에게 약속한 땅을 예비하게 하겠다. 하지만 나는 너희와 함께 가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함께 가셔야 한다고 말하자 하나님은 '너희는 목이 뻣뻣한 백성이어서 가다가 내가 화를 참지 못하고 너희를 없애버릴까 염려가 되기 때문에 그럴 수 없다'고 하십니다. 화가 나도 단단히 나신 것 같습니다. 하지만 모세는 하나님 앞에서 물러나지 않습니다. 물러나면 안 되지요. 그러면 백성들은 끈 떨어진 연처럼 어디로 처박힐는지 알 수 없을 테니 말입니다.

모세는 정신을 가다듬고 하나님 앞에 섭니다. 그리고 차근차근 하나님이 자기들과 동행하셔야 할 이유를 밝힙니다. 첫째로 그는 자신에게 은총을 베푸신다고 약속하셨으니 주님의 계획을 가르쳐 주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합니다. 둘째로 이스라엘 백성이 비록 못났다고는 하지만 하나님께서 친히 백성으로 선택하셨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 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말을 들으시고는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로 편케 하리라" 하고 약속하십니다. 그런데 모세는 하나님의 노여움이 여전히 풀리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동행하면서 평안케 하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은 모세에게만 해당하는 약속처럼 들립니다. 그래서 모세는 버팁니다. "주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이곳에서 올려 보내지 마옵소서." 하나님은 모세의 청을 거절하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백성들과 동행하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나중에 모세는 하나님이 광야에서 자기들을 어떻게 보호하셨는지를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의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 마치 독수리가 그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그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같이 여호와께서 홀로 그들을 인도하셨고 함께한 다른 신이 없었도다.(신32:10-12)

하나님이 우리와 동행하신다고 하는 것보다 마음 든든한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의지하고 믿는 이들을 호위하시고, 보호하시고, 지키십니다. 조영순 권사님께서 타슈켄트에 복음을 전하러 가셨던 것 기억하시지요? 지난 화요일 저녁에 만나서 잘 다녀오셨냐고 물었더니 "목사님이 전해 주신 말씀대로 하나님이 업고 다니셨어요" 하시더군요.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기 위해 자기를 내놓은 사람은 하나님의 동행하심을 분명히 느끼도록 돼있어요. 사람들이 하나님이 정말 계신가 안 계신가 긴가민가 하는 까닭은 자기의 틀 밖으로 나가보지 않기 때문에 그래요.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와야 엄마가 곁에 있다는 것을 보게 되지 않아요? 우리가 평안할 때는 잘 몰라도 생에 어려움이 닥쳐오면 하나님의 존재를 더욱 실감나게 경험하는 것은 그 어려움을 통해 자기의 한계를 분명히 보았기 때문일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와 동행하시면서 우리를 어디로 이끌어 가시려는 것일까요?


예속에서 자유로

첫째, 하나님과 함께 하는 여행은 예속에서 자유를 향한 여행이에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네 본토 친척 아버지 집을 떠나라고 하신 까닭이 무엇일까요? 작은 통 속에 들어있던 벼룩은 통을 치워도 그 이상으로 뛰지 못한다면서요? 하나님이 크게 쓰시려는 아브라함이 자기의 재산과 인연에 얽매어 있다면 곤란한 일이지요. 그것을 넘어설 필요가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그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과 헤어지도록 하세요. 심지어는 자식에게 매이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이삭을 바치라고까지 하셨어요. 우리가 집착하고 있는 것들은 우리의 과거에 매어놓는 족쇄 구실을 할 때가 많아요. 자유의 새 땅으로 가야 할 히브리인들이 먼저 해야 할 것은 애굽의 밥솥을 버리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자유인이 되어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그 자유는 이중적이에요. 하나는 다른 사람이나 상황이 우리의 의사와 관계없이 우리를 강제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설명이 필요없겠지요? 둘째가 더 중요한데요. 내게 힘이 있다고 해서 다른 이를 우리 마음대로 다루지 않는 것입니다. 이게 정말 우리가 맛보아야 할 진정한 자유입니다. 우리는 조금만 힘이 있으면 다른 사람에게 실력 발휘해보고 싶어 하잖아요? 이사야는 다른 이들을 진심으로 존중하고 그들과 평등하게 어울리며 사는 세상의 꿈을 '이리가 어린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눕고, 어린이가 독사의 구멍 곁에서 장난하는'(사11:6-9) 것으로 그린 바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다양한 사람들과 피조물들이 평화롭게 공존하면서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유의 나라입니다.


분열에서 하나됨으로

둘째, 하나님과 함께 하는 여행은 분열에서 하나됨을 향하는 여정입니다. 죄는 무엇이든 분리시키는 힘입니다. 인류의 첫 사람은 하나님이 하지 말라는 일을 하고는,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나무 뒤에 숨었어요. 하나님과의 분리가 일어난 거지요. 또 아담은 하와에게, 하와는 뱀에게 책임을 전가했어요. 잔잔한 호수에 돌을 던지면 동심원이 물가로 번져가듯이, 죄가 우리 속에 들어오면 분열의 파문이 우리를 사로잡고 맙니다. 가인의 마음에 죄가 들어가니까 동생 아벨을 죽이지 않던가요? 그렇습니다. 죄는 분리시키는 힘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하나되게 하는 힘입니다. 우리 속에 하나님이 오시면 우리는 서로를 용서하고,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사랑하게 됩니다. 불화했던 가족들이 하나가 되는 것은 값싼 선물이나 한 끼 식사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 속에 하나님을 모셔야 합니다. 남과 북이 갈라진지 56년입니다. 통일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임인 교회가 서로의 다름을 용납하면서 평화롭게 공존하듯이 우리는 이제 서로에게 마음을 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어느 신문사는 종교인들의 입을 빌어 북한을 사탄의 하수인인 것처럼 말하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정말 자기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합니다.


죽음에서 영생으로

셋째, 하나님과 함께 하는 여행의 최종 목적지는 영생입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들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이들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죽음의 하수인이 되기를 거부합니다. 그들은 생명을 살리는 일에 자신을 바칩니다. 사탄은 우리에게 돈벌이를 위해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말라고 속삭입니다. 그 속삭임에 넘어간 사람들은 아이들이 먹는 음식에 넣어서는 안 될 것을 넣고, 엉터리 휘발유를 만들어 팔기도 하고, 비가 올 때 슬그머니 오염 물질을 흘려보내기도 하고, 산업 폐기물을 슬쩍 땅 속에 묻고, 건물을 지을 때는 적당히 자재를 빼돌리기도 합니다. 그들의 시커먼 영혼이 즐겨 사용하는 말이 있습니다. "알 게 뭐야."

하지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돈벌이를 위해 생명을 볼모로 잡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늘 명심하고 살아갑니다.

너희는 너희 거하는 땅 곧 나의 거하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 여호와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 거함이니라.(민35:34)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우리가 사는 이 땅이야말로 하나님이 거하시는 거룩한 땅임을 압니다. 그래서 항상 조심스럽게 살아갑니다. 자기의 욕심을 자제하면서 남들의 행복을 위해 마음 쓰며 삽니다. 이런 이들은 이미 그리스도의 품안에 있는 이들입니다. 우리가 다른 생명들을 돌보기 위해 노력한 만큼 우리 속에 심긴 영생의 나무는 더욱 크게 자랄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있는 곳에 참된 자유가 있고, 일치가 있고, 생명의 아름다움이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발걸음이 머무는 곳마다 이런 아름다운 자유와 일치와 생명의 기적이 날마다 나타나기를 기원합니다.

등 록 날 짜 1970년 01월 01일 09시 33분 21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