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26. 내 손에서 하나가 될 것이다
설교자 김재흥
본문 겔 37:16-23
설교일시 2016/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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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손에서 하나가 될 것이다
겔 37:16-23
(2016/06/26 강림 후 제6주)

겔 37:16-23
너 사람아, 너는 막대기 하나를 가져다가, 그 위에 ‘유다 및 그와 연합한 이스라엘 자손’이라고 써라. 막대기를 또 하나 가져다가 그 위에 ‘에브라임의 막대기 곧 요셉 및 그와 연합한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고 써라. 그리고 두 막대기가 하나가 되게, 그 막대기를 서로 연결시켜라. 그것들이 네 손에서 하나가 될 것이다. 네 민족이 네게 묻기를 ‘이것이 무슨 뜻인지 우리에게 일러주지 않겠느냐?’하면, 너는 그들에게 말해 주어라. ‘나 주 하나님이 말한다. 내가 에브라임의 손 안에 있는 요셉과 그와 연합한 이스라엘 지파의 막대기를 가져다 놓고, 그 위에 유다의 막대기를 연결시켜서, 그 둘을 한 막대기로 만들겠다. 그들이 내 손에서 하나가 될 것이다.’ 하셨다고 하여라.

성령강림 후 제6주 주일 아침, 주님의 전을 찾아 나온 청파의 모든 교우 여러분 위에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6.25 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66년이 지나 맞이하게 되는 주일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통해 이스라엘 분단의 역사를 살피며 이 시대와 이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함께 헤아려볼 수 있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 분단과 증오
다윗 왕과 솔로몬 왕의 통치를 거치면서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확고한 위치를 확보하게 됩니다. 선왕 다윗에 이은 솔로몬의 치적은 화려합니다. 그는 40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렸습니다. 열왕기상 4장은 솔로몬의 영화를 이렇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은 유프라테스 강에서부터 블레셋 영토에 이르기까지, 또 이집트의 국경에 이르기까지, 모든 왕국을 다스리고, 그 왕국들은 솔로몬이 살아 있는 동안 조공을 바치면서 솔로몬을 섬겼다.’(4:21) 솔로몬은 그의 아버지 다윗이 블레셋에서 들여온 철제무기를 앞세워 주변 나라들을 복속시켰습니다. 또한 솔로몬은 아버지 다윗도 하지 못한 성전 건축과 궁전 건축을 하게 됩니다. 성전 건축에는 7년의 시간이 걸렸고 궁전 건축에는 13년이 걸렸습니다. 그뿐 아니라 주변국들과의 무역을 통해 많은 부를 축적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그의 화려한 치적들이 무색해질 만큼의 과오를 범했습니다. 물론 이방의 우상을 숭배하는 잘못도 큰 잘못이었습니다만 그보다 더 큰 잘못이 있었으니 그것은 국가를 분열시켰다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국책사업’이라는 명분으로 백성들에게 과중한 노역을 부과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 3만 명을 뽑아 레바논에서 나무 베는 작업을 하게 했고, 7만 명의 사람들을 뽑아 나무와 짐을 운반하게 했으며, 8만 명은 산에서 채석작업을 시켰습니다. 18만 명을 동원한 장기간의 건축사업은 지나치게 많은 세금과 더불어 백성들에게는 감당하기 힘든 무거운 짐이었습니다.
솔로몬이 죽고 그의 아들 르호보암이 왕위에 오르자 북쪽 10지파의 지지를 받은 여로보암이 르호보암 앞에 가서 청합니다. “임금님의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 무거운 멍에를 메우셨습니다. 이제 임금님께서는 임금님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지워 주신 중노동과 그가 우리에게 메워주신 이 무거운 멍에를 가볍게 해주십시오.” 이 말에 르호보암은 “내 아버지가 당신들에게 무거운 멍에를 메웠소. 그러나 나는 이제 그것보다 더 무거운 멍에를 당신들에게 메우겠소. 내 아버지는 당신들을 가죽채찍으로 매질하였지만, 나는 당신들을 쇠 채찍으로 치겠소.”라고 소름끼치는 답변을 합니다. 이에 여로보암은 북쪽의 10지파를 이끌고 따로 나라를 세우니 그것이 북 이스라엘이요, 르호보암은 유다와 베냐민 지파만 남은 남 유다의 왕이 됩니다. 하나의 나라가 둘로 갈라선 것입니다.
솔로몬은 강병을 기반으로 부국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부국강병은 자신의 족속을 제외한 이스라엘의 피땀을 착취함으로 이루어진 것이요, 언제든 무너질 수 있는 모래 위에 지은 집 같은 것이었습니다. 만약에 솔로몬과 르호보암이 아래에서 들려오는 이스라엘 민중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며 그들의 신음소리에 공감하며 살았다면 역사를 좀 다르게 흘러갔을 것입니다. 같은 말을 쓰고 같은 하나님을 믿는 하나의 나라로 그렇지 않았을 때보다 훨씬 안정적이고 튼튼한 나라로 지냈을 것입니다.

북 에브라임과 남 유다로 나뉜 이스라엘은 서로 전쟁도 하고 때로는 연합하며 지냈습니다. 그러다가 주전 8세기 북쪽에서 아시리아라는 강대국이 등장하면서 이 둘 사이에는 큰 긴장이 조성됩니다. 아시리아의 티글랏빌레셋 3세가 서진 정책을 펼치며 시리아 팔레스타인 지역의 약소국들을 압박했습니다. 처음에는 아시리아에게 조공을 바치며 티글랏빌레셋에게 머리를 조아리던 시리아의 르신 왕과 북 이스라엘의 베가 왕은 동맹을 맺고 그에게 반기를 들었습니다. 남 유다의 아하스 왕은 그 동맹에 가입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시리아의 르신 왕과 북 이스라엘의 베가 왕은 남 유다를 선제공격하려 했습니다. 불안에 떨던 아하스 왕은 우상에게 자신의 아들을 불태워 바치면서 유다의 안정을 빌었습니다. 예언자 이사야는 아하스에게 이렇게 충고합니다. “주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는 회개하고 마음을 편안하게 하여야 구원을 받을 것이며, 잠잠하고 신뢰하여야 힘을 얻을 것이다.’”(사30:15) 이사야는 아하스 왕에게 시리아-이스라엘 동맹에도 가입하지 말고, 아시리아도 의지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며 진중하게 있으라 조언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하스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아시리아에 의지하기로 마음먹고 티글랏빌레셋에게 편지를 씁니다. “나는 임금님의 신하이며 아들입니다. 올라오셔서, 나를 공격하고 있는 시리아 왕과 이스라엘 왕의 손에서 나를 구원하여 주십시오.”
아하스는 강력한 외세를 끌어들여 위기를 극복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너무나 비참했습니다. 티글랏빌레셋은 군대를 이끌고 와 시리아와 북 이스라엘을 칩니다. 아하스는 왕좌를 보존했고 유다는 왕국의 모습을 유지했지만 예배제의 형태까지 아시리아의 것을 그대로 따라해야 하는 속국으로 전락했습니다. 이후 북 이스라엘은 아시리아를 향해 새로운 반란을 일으켰고 이에 주전 722년 아시리아의 새로운 왕 사르곤2세는 북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 성을 함락시킵니다. 북 이스라엘은 이제 역사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사르곤2세는 약 27,000여 명의 이스라엘 사람들을 아시리아로 끌고 갔으며 여러 다른 민족들이 사마리아에 들어가 살게 했습니다. 아시리아는 새로운 식민지에 혼혈정책을 펼쳤고 그로인해 북 이스라엘 사람들은 새로운 이방인들과 피가 섞이게 되었습니다.

타의에 의해서 피가 섞이게 된 북 이스라엘의 사마리아 사람들은 역사의 피해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남 유다 사람들은 그들을 더 이상 이스라엘 사람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북 이스라엘의 멸망 후 135년이 지나 남 유다도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당합니다.(주전 587년) 70년의 노예 살이 끝에 유대인들은 해방을 맞아 고향땅 예루살렘으로 돌아옵니다. 그들은 무너진 성전을 세우려 했습니다. 그 때 사마리아 사람들은 남쪽 사람들의 성전 재건을 도와주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당신들과는 관계가 없는 일’이라며 도움을 거절했습니다. 이에 사마리아 사람들은 성전 재건을 방해했고 이후에 성벽 재건도 방해했습니다.
외경 중에 한 권인 집회서를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내가 이웃으로 증오하는 민족이 둘 있는데 세 번째 것은 민족이라 할 수도 없다. 사마리아 산에 사는 주민들과 블레셋인들, 그리고 세겜에 사는 어리석은 자들이다.”(집회서50:25,26)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간의 갈등은 너무 컸습니다. 그 갈등과 긴장 관계는 예수님 시대에도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본래 북부 갈릴리 지역과 남부 유다 지역을 오갈 때 중간에 위치한 사마리아 땅을 밟지 않고 가려고 요단강 동편으로 건너다녔습니다. 마치 유대와 사마리아 사이에 민통선, 민간인 통제선이 아니라 민족 통제선이 존재하는 듯 말이죠. 예수님께서 어느 날 그 선을 넘어 사마리아를 관통해 길을 가셨습니다. 사마리아 지역의 수가 성이라는 곳을 지나실 때 예수님께서는 홀로 우물가에 앉아 계시게 되었고 마침 물을 길으러 나온 여인에게 물을 좀 떠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그 때 사마리아 여자가 예수님께 대답합니다. “선생님은 유대 사람인데, 어떻게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하십니까?” 성경은 뒤에 이런 말을 덧붙입니다. ‘유대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과 상종하지 않기 때문이다.’(요4:9) 또 누가복음 9장에 보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도 나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사마리아의 한 마을에 들어가셨을 때, 쉴 곳을 요청하자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수님의 일행을 맞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제자인 야고보와 요한은 “주님,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그들을 태워 버리라고 우리가 명령을 하면 어떻겠습니까?”라고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의 엄청난 증오의 불길이 보이십니까? 이 갈등과 분열, 증오와 불신의 불길은 아주 오래된 것입니다. 솔로몬 사후 남북의 분단으로부터 따지면 900년이 된 분열의 불길이요, 북 이스라엘의 멸망 이후부터 따지면 700년이 된 증오의 불길입니다.

• 두 개가 하나 되는 꿈
이 오랜 분단과 분열, 증오의 흐름 속에서 다른 꿈을 꾸고 다른 이야기를 해온 사람이 있습니다. 유다가 바벨론에 멸망당해 낯선 땅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시절, 하나님의 영은 제사장 출신의 에스겔에게 임했습니다. 에스겔은 주님의 권능에 사로잡혀 하나의 환상을 보게 됩니다. 골짜기를 가득 메운 죽은 뼈가 하나님의 군대를 이루어 되살아나는 꿈이었습니다. 그 환상에 이어 에스겔은 새로운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됩니다. “너 사람아, 너는 막대기 하나를 가져다가, 그 위에 ‘유다 및 그와 연합한 이스라엘 자손’이라고 써라. 막대기를 또 하나 가져다가 그 위에 ‘에브라임의 막대기 곧 요셉 및 그와 연합한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고 써라. 그리고 두 막대기가 하나가 되게 그 막대기를 서로 연결시켜라. 그것들이 네 손에서 하나가 될 것이다.”(겔37:16,17)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이 하나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놀라운 꿈입니다. 두 막대기가 하나의 막대기가 된다는 것이 놀라운 것이 아니라 그 막대기에 쓰여 있는 두 이름이 도저히 하나가 될 수 없는 이름으로 생각되기 때문에 놀라운 것입니다. 포로기를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이후에 유다와 사마리아의 갈등을 생각해보아도 그 말씀이 유대인들에게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은 말씀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꿈은 예수님에게 이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수가 성에 들어가셨을 때 우물가에서 영혼이 목마른 여인을 만나주셨을 뿐 아니라 그 마을에서 이틀이나 머무시며 사마리아 사람들을 만나셨습니다.(요4:40) 그리고 누가복음 9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사람들이 자신들을 맞이해주지 않았다며 사마리아를 향해 하늘에서 불이 내리기를 간청하던 야고보와 요한을 꾸짖으셨습니다.(눅9:55) 그리고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향한 적대감을 표현할 때, ‘귀신들린 자’라는 말과 함께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말을 썼는데 이는 유대인들이 보았을 때 예수님이 사마리아 사람만큼 싫은 존재로 보였다는 표현일 수도 있지만 예수님께서 그만큼 사마리아 사람들과 친하게 지냈다는 뜻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비유와 이적의 행위 속에서 사마리아인들은 유대인들보다 훨씬 선하고 바른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강도 만난 사람을 도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그렇고 예수님께 치유 받은 10명의 한센병 환자 중 유일하게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를 드린 사마리아 출신의 한센병 환자 이야기가 그렇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는 유대 공공의 적, 공인된 원수, 사마리아 사람들과 가깝게 지내신 것일까요? 왜 유대인들 앞에서 사마리아인들을 두둔하신 것일까요? 예수님의 눈에는 유다와 사마리아 사이의 오래된 분열과 증오의 장벽이 보이지 않았던 것일까요? 하나님 나라의 사역이라는 중차대한 일을 하시기 위해서는 이미 유대사회에서 공공의 적으로 낙인찍힌 사마리아 사람들을 멀리하고 유대인들을 가까이하는 것이 작은 것을 잃고 큰 것을 얻는 방법이 아니었을까요? 유대인들처럼 사마리아 사람들을 무시하고 멸시하지는 않아도 되도록 그들과 적당한 거리두기를 하는 것이 전략적으로 옳은 선택이 아니었을까요? 체제에 의해 배제된 자와 자신을 동일시할 때 그 자신 또한 체제에서 배제당하리라는 것을 예수님은 모르셨던 것일까요?

• 꿈을 이어 받은 사람들
우리 민족도 이스라엘처럼 남북으로 분단되었습니다. 해방 직후 일본군 철수를 위해 38선 북쪽은 소련군이, 남쪽은 미군이 치리하면서 생긴 분단이 올해로 71년이요,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고통스러운 6.25 한국전쟁의 비극이 일어난 지도 올해로 66년입니다.
71년 전 금이 가고 66년 전 완전히 두 개로 부러진 하나의 막대기는 이제 언제 다시 하나로 합쳐질지 알 수가 없습니다. 부러져 반 토막이 된 막대기들은 서로를 향한 흉기로 변해버렸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서로를 향한 증오만 커질 뿐 우리는 본디 ‘하나’였다는 기억은 점점 옅어져 갑니다. 우리나라의 20대를 대상으로 서울대학교 통일연구원이 시행한 여론 조사에 따르면 2007년에는 통일을 해야 한다는 의견이 53.3%였는데 2015년에는 통일을 해야 한다는 의견이 30.7%로 줄어들었습니다. 얼마 전 어느 모임에서 만난 중학교 선생님의 이야기도 그와 동일했습니다. 해마다 ‘통일’을 주제로 학생들에게 글짓기를 시키는데 ‘통일을 하지 말자’는 주장의 글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통일이 되면 당장 남한이 감당해야 할 경제적 부담이 커지고 그 부담이 자신들에게 돌아온다는 생각이 크게 작용한 것입니다.
지난 봄 어느 날 자전거를 가지고 임진각에 갔습니다. 임진각 전망대에 올라 북쪽을 보았습니다. 민통선 저 너머로 흐릿하게 북쪽이 보였습니다. 북쪽에 조금 더 가까이 가보고 싶었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판문점 표지를 따라 달렸습니다. 그러나 얼마 달리지 못하고 저는 멈추어 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새로 나타난 표지 위에는 ‘전방 1.4km부터 민통선 지역임. 직진 금지, 미승인차량 회차’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그 표지를 보는 순간 아프게 떠오르는 얼굴들이 있었습니다. 먼저 교회 원로 어르신들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북에 고향을 두고 오신 원로 어르신들은 저 표지를 보실 때 얼마나 마음이 먹먹하실까, 저 표지가 뭐라고 어르신들을 고향에 못 가게 하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또 떠오른 얼굴들이 있었습니다. 밀양, 강정, 광화문, 안산에서 만났던 얼굴들이었습니다. 이 사회가 보다 나은 사회가 되도록,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길 원하여 있는 힘껏 애를 써보지만 늘 만나게 되는 것이라고는 막다른 골목인 사람들. 임진각과 판문점 사이에 놓여 있는 표지를 보면서, ‘저 표지에 담긴 아픔과 고통을 외면하고는 우리 사회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문제들을 풀 순 없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떻게든 저 ‘길 없음’, ‘돌아가시오’라는 표시를 지우고 싶었습니다.

그 이후에 분단의 현실과 통일의 문제에 좀더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지난 5월 말에는 ‘고난받는이들과함께하는모임’에서 주관한 철원 민통선 기행을 다녀왔습니다. 버스를 타고 철원으로 향하는 동안 진행을 맡은 목사님께서 문익환 목사님의 시 <잠꼬대 아닌 잠꼬대>를 소개해 주셨습니다.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난 올해 안으로 평양으로 갈 거야
기어코 가고 말 거야, 이건
잠꼬대가 아니라고 농담이 아니라고
이건 진담이라고
...
아 그 한마음으로
칠천만 한겨례라는 걸 확인할 참이라고
오가는 눈길에서 화끈하는 숨결에서 말이야
아마도 서로 부둥켜안고 평양 거리를 뒹굴겠지
사십사 년이나 억울하게도 서로 눈을 흘기며
부끄럽게도 부끄럽게도 서로 찔러 죽이면서
괴뢰니 주구니 하며 원수가 되어 대립하던
사상이니 이념이니 제도니 하던 신주단지들을 부수어버리면서 말이야
...
난 지금 역사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야
역사를 말하는 게 아니라 산다는 것 말이야
된다는 일 하라는 일을 순순히 하고는
충성을 맹세하고 목을 내대고 수행하고는
훈장이나 타는 일인 줄 아는가
그게 아니라구
역사를 산다는 건 말이야
밤을 낮으로 낮을 밤으로 뒤바꾸는 일이라구
하늘을 땅으로 땅을 하늘로 뒤엎는 일이라구
맨발로 바위를 걷어차 무너뜨리고
그 속에 묻히는 일이라고
...
벽을 문이라고 지르고 나가야 하는
이 땅에서 오늘 역사를 산다는 건 말이야
온 몸으로 분단을 거부하는 일이라고
휴전선은 없다고 소리치는 일이라고
서울역이나 부산, 광주역에 가서
평양 가는 기차표를 내놓으라고
주장하는 일이라고 ...

문익환 목사님은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구약신학자요 공동번역성서 발간에 구약성서번역자로 참여하셨던 분입니다. 성서의 세계로 깊이 들어가셔서 그랬던 것일까요 문 목사님은 예언자들의 정신을 그대로 이어받은 사람으로 사셨습니다. 사회의 잣대보다는 성서의 가르침과 예수님의 가르침을 더 근본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사셨습니다. 에스겔에서 예수님에게로 이어진 분단과 증오를 넘어서 하나 되는 꿈을 문 목사님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사셨습니다. 그로인해 감옥에서 11년이라는 시간을 보내셔야 했지만 문 목사님은 마치 신랑이 신부 방에 들어가듯 감옥에 들어가는 것을 기꺼워 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의 마무리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로 하려합니다. 한 율법교사가 예수님께 나와 묻습니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오히려 그에게 물으십니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기록하였으며, 너는 그것을 어떻게 읽고 있느냐?” 율법교사는 답합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하였고, 또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대답이 옳다. 그대로 행하여라. 그리하면 살 것이다.” 여기서 더 나가 율법교사는 하나의 질문을 덧붙입니다. ‘내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하는 이웃의 범위가 어떻게 되느냐’는 질문 말입니다. 예수님은 그 율법교사의 질문에 하나의 긴 이야기로 답을 해주십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이 그의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게 된 채로 그를 내버려두고 갔다. 마침 어떤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 사람을 보고 피하여 지나갔다. 레위인도 그렇게 그냥 지나갔다. 그런데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길을 가다가 그 강도 만난 사람이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는 측은한 마음이 들어 가까이 가서 그 상처에 기름을 붓고 싸매주고 그를 자기 짐승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주었다. 다음 날 그는 돈을 여관 주인에게 주며 그 사람을 돌보아 달라, 추가 비용이 들면 그것도 내가 지불하겠다, 하였다. 너는 이 세 사람 중 누가 강도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예수님은 ‘누가 나의 이웃입니까’라는 율법교사의 질문을 ‘누가 이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이냐’라는 질문으로 돌려주고 계십니다. 세 개 중에 하나를 고르라는 문제입니다. 1번 제사장, 2번 레위인, 3번 사마리아인. 율법교사가 선택한 답은 무엇이었습니까? 3번 사마리아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객관식 문제를 주관식으로 답변했습니다.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그 답변을 할 때에 성경에 기술되어 있지 않지만 인상이 찌그러지고 있는 율법교사의 표정을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율법교사는 차마 ‘사마리아인입니다’라고 답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기준으로 사마리아인은 인간도 아니요 그렇게 선한 행동을 할 수 있는 사람도 아니요 더군다나 사마리아인에게 이웃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기 때문입니다. 그 율법교사의 마음속에는 사마리아인을 향한 엄청난 증오와 미움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의 주인공은 선한 사마리아인이 아닙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율법교사입니다. 예수님께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율법교사에게 들려주신 이유는 그의 마음속에 있는 분단과 증오의 장벽이 무너지고 그 또한 이야기에 등장한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이념, 종교, 인종을 뛰어넘어 어려움을 당한 이웃들을 돕는 사람으로 살아가길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하셨기에 말미에 그 율법교사에게 이렇게 이야기하신 것입니다.“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여라.”

자신과 관계가 깊은 사람들만의 안정과 평화를 위할 뿐 그 체제를 떠받치기 위해 피땀 흘리던 이들의 신음소리를 외면하던 솔로몬의 부국강병은 나라를 분열시켰습니다. 위기가 닥쳐오자 서로 화합하지 못하고 반목하고 오히려 외세를 의지하려던 베가와 아하스의 선택은 나라를 멸망시켰습니다.
인종과 이념, 종교와 사상에 따라 갈기갈기 찢어지고 분열되고 분단된 이 세상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영생에 이르고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일까요? 세월이 갈수록 견고해져가는 저 분단의 장벽을 넘어 남과 북의 막대기가 하나 되는 길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우리 안에 있는 율법교사가 변해야 합니다. 오랜 세월 우리의 존재를 장악하고 있던 율법화된 규율들과 왜곡된 민족의식에서 벗어나 선한 사마리아인의 마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을 구성하고 있는 거대 가치들을 무비판적으로 내면화하고 그와 다른 것들을 죄악시하고 제거의 대상으로 삼았던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이 시대의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 측은히 여길 줄 아는 마음이 일어나야 합니다. 그도 나와 같은 인간임을, 서로가 동등하며 똑같은 사람임을 알아야 합니다. 어려울 때는 서로 돕고 살아야 할 인간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 시대의 강도 만난 이웃, 사마리아 사람들을 측은하게 여기셨고 그들에게 다가가 상처를 싸매주셨습니다. 그들의 입장이 되어 당신이 주실 수 있는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그로인해 당신이 유대인들의 손에 죽임을 당할 것을 아셨지만 예수님은 사마리아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주길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알려주시는 영생과 구원의 길이요, 부러져 두 개가 된 막대기가 하나가 되는 길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런 복된 길을 가는 저와 여러분들, 이 나라, 이 민족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16년 06월 26일 11시 00분 13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