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33. 축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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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고후13:11-13
설교일시 200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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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
고후13:11-13
(2001/8/19)


'있음'만으로도 복이 되는 사람

'축복'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축복'은 '빌 祝'에 '복 福' 자가 더해진 것이니까 이 말은 '복을 빌어줌'을 뜻합니다. 우리가 새해에 덕담을 하는 것도 결국 축복행위입니다.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누리라는 기원인 셈이니 말입니다. 사람들은 우스갯소리로 말합니다. 기독교인은 욕을 해도 복음적으로 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자식들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에도 "예라, 이 빌어먹을 녀석아" 하지 말고 기왕이면 "예라, 이 복받을 녀석아"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맡기신 일은 "복의 매개자"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창12:3). 이보다 더 아름다운 일이 없습니다. 나의 '있음'이 다른 이들에게 복이 되는 삶이란 얼마나 가슴 벅찬 일입니까?

예배는 대개 축도로 마칩니다. 그런데 축도는 예배의 마침표가 아닙니다. 쉼표입니다. 베스터만이라는 신학자는 축복기도는 "예배 안에서 일어난 일과 예배 밖에서 일어나는 일을 연결짓는 다리"라고 말했습니다. 축복을 받는다는 것은 그러므로 우리의 일상적인 삶속에 하늘의 뜻을 끌어들이겠다는 다짐인 것입니다. {어둠의 자식들}이라는 책으로 유명한 이동철씨는 어느 좌담회에서 짓궂긴 하지만 의미심장한 말을 했습니다.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교회 안에서의 모습과 세상에서의 모습이 다른 까닭은 축복기도가 잘못됐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회중들이 강대상을 향해 서도록 하고 축복기도를 하니까, 교회 안에서는 성도인데 돌아서 세상으로 돌아가면 본성대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축복기도를 할 때는 교회 문을 활짝 열어놓고, 회중들을 세상을 향하도록 돌려 세워놓고 하는 게 어떻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축복기도가 예배 안에서 일어난 일과 예배 밖에서 일어나는 일을 연결짓는 다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바울의 축복기도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것은 이후 교회에서 행해지는 축복기도의 원형이 된 것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사도 바울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성도들과 함께 하기를 빕니다. 아시다시피 바울은 은혜를 경험한 사람입니다. 그 은혜가 어찌나 소중했던지 바울은 이 세상에 있는 어떤 것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롬8:39)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그 은혜가 그리도 소중한 까닭은 그가 경험했던 절망의 깊이가 너무도 깊었던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기 전에도 그는 진리를 위한 열정에 사로잡힌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좀처럼 내적인 자유를 얻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어쩌면 희랍 신화에 나오는 탄탈로스의 심정이었는지도 모릅니다. 탄탈로스는 지옥에서 벌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가 받은 벌은 물 속에 몸을 잠그고 있으면서도 영원히 갈증에 시달려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탄탈로스가 마시려고 입을 대면 물이 달아나 버리곤 했던 것입니다. 바울의 심정을 생각하면 카프카의 {성}에 나오는 측량기사가 생각납니다. 아무리 성에 가까이 다가서도 성은 저만큼씩 멀어지는 겁니다.

율법에 대한 열심이 역설적으로 그를 진리로부터 멀어지게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주님이 그에게 다가오셨을 때, 주님의 은총의 빛이 그를 어루만졌을 때 그는 해방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눈과 눈을 마주하듯 보게 되었고, 가야 할 곳에 이미 도달해 있었습니다. 기억하시지요? 예수님이 물 위를 걸으신 기적 이야기를 전하면서 요한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배로 영접하니 "배는 곧 저희의 가려던 땅에 이르렀다"(요6:21)고 보도합니다. 기가 막힌 이야기입니다. 주님을 영접하면 우리는 이미 가려던 땅에 이르는 것입니다. 물론 이 땅에서의 일들을 계속해야 하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그 구속의 은혜를 경험했기에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어요.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게 하려 함이라(고후5:4)

구원에 관한 일, 생명에 관한 일은 우리의 의지와 결심으로 되는 게 아니에요. 우리가 생명에게 꿀떡 삼켜져야 해요. 이렇게 삼켜지는 것을 가리켜 '은혜'라 하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은 그분의 은혜로 생명에 삼켜진 존재가 된 것이지요. 바울은 우리가 그런 은혜 속에 살기를 기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바울 사도는 또 하나님의 사랑을 빌고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을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그 말씀을 가슴 깊이 느끼며 사십니까? 그냥 해보는 소리가 아니라면 어떤 뜻으로 하시는 말씀입니까? 저는 하나님의 사랑을 네 가지로 생각해 봅니다.

첫째,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사랑이십니다. 우리는 모두 없는 데서 나왔습니다. '한 번 가볼까' 하고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어느 뇌성마비 장애우가 울먹이면서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어머니에게 감사드려요." 기자가 물었습니다. "무엇에 대해서요?" "나를 있게 하셨으니까요." 저는 눈시울이 시큰해졌습니다. 건강한 몸 가지고 살면서도 감사를 모르는데,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감사하는 그 영혼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어머니 아버지를 통해 우리를 있게 하신 분이십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있게 하지 않았을 겁니다.

둘째, 하나님은 보존자로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일마다 때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키시고, 동행해주십니다. 절망에 빠질 때도 희망의 빛으로 우리를 이끌어 주십니다. 슬픔에 잠길 때도 그 슬픔에 떠밀려가지 않도록 우리 삶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십니다. 우리가 깨닫지 못하는 시간에도 하나님은 우리 삶의 울타리가 되고 계십니다.

셋째, 하나님은 구원자로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시기 위해 독생자 아들까지 보내주셨습니다. 우리 속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만한 것이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 속에 사랑의 고리를 만들어주시고는 그 사랑으로 구원하십니다.

넷째, 하나님은 죄로 인해 사랑을 잃어버린 우리 속에 사랑을 심어주심으로써 우리가 사랑을 실천할 수 있도록 하십니다. 우리가 다소라도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으로 살아간다면 그것은 우리가 착해서라기보다는 하나님이 우리 속에 창조해주신 사랑 덕분입니다. 바울은 성도들을 위해 이런 하나님의 사랑이 끊이지 않기를 비는 것입니다.


성령의 교통하심

바울 사도는 성령의 교통하심을 빌고 있습니다. 성령은 바람입니다. 그냥 바람이 아니라 신바람입니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일을 신명나게 하도록 하는 힘입니다. 사도행전은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내 증인이 되리라"(1:8)는 주님의 말씀을 전해줍니다. 여기서 권능은 '힘'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힘을 덧입어야 합니다. 에스겔이 보았던 마른 뼈의 골짜기에 하나님의 숨이 불어오자 그 뼈들이 군대가 되어 일어났습니다. 성령은 죽은 것들을 살려냅니다. 우리의 신앙고백이 제 아무리 정교해도, 그것으로 성도가 되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고가의 전자 제품을 들여놓아도 전기가 들어오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전기가 들어와야 그 제품은 열을 내기도 하고, 빛으로 바뀌기도 하여 자기 존재의 목적에 맞게 일을 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려는 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이 우리 속에 내주하셔야 우리는 영을 위해 '힘찬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세상에는 힘차게 살아가는 이들이 참 많습니다. 맥없는 것보다는 힘있게 살아가는 이들이 멋있어 보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힘있는 삶이 과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인가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근육은 멋있지만, 영혼의 근육은 빈약한 이들이 많습니다.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몸의 근육은 볼품없지만, 영혼의 근육이 잘 발달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많이 사용하였기 때문입니다. 겉보기에는 자기 한 몸 추스리기도 어려운 것 같은 데 남을 돕는 일에 민첩하고, 나눔을 실천하는 일에 끈질긴 사람들 말입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원한다면 성령께서 우리에게 바람처럼 다가오실 것입니다.

이것을 피에르 신부는 바람과 돛의 비유를 통해 설명합니다. 우리가 배를 앞으로 몰아가기 위해 돛을 펼쳤다 해도 바람이 불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런가 하면 성령인 바람이 불더라도 돛이 펴져 있지 않다면 그때도 배는 나아가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나아가게 하기 위해 우리의 동의를 필요로 합니다. 인간은 키를 잡고 돛을 폅니다. 그제서야 성령께서 그를 항구로 인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복된 생의 열매

이처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 가운데 살기 위해 마음을 여는 이들이 거두는 생의 열매는 무엇입니가? 바울은 그것을 다섯 가지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기쁨, 온전케 됨(회복), 위로, 화목(마음을 같이 함), 평안이 그것입니다. 이런 생의 열매를 맺을 때 우리는 비로소 '복의 매개자'인 것입니다. 우리 속에 기쁨이 없다면 하나님과의 연결점을 잃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 삶이 이런저런 일로 찢기워 있다면 가장 소중한 하나를 잃고 살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 삶이 사람들 사이에 분열을 일으키고 있다면 죄가 우리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 삶에 평안이 없다면 하나님에 대한 근원적인 신뢰를 잃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행복하고 아름다운 생의 비결은 하나님과의 일치의 끈을 놓치지 않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 속에 있는 이들은 자기를 드러내지 않습니다.


오래 전에 믿음이 깊은 한 성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매우 거룩한 사람이었으나 스스로 거룩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주위의 사람들이 그를 일컬어 성자라고 말했지만, 그는 결코 자신을 성자라고 여기지 않았습니다. 아무튼 그는 평범한 일을 하면서도 자기 주위에 사랑의 향기를 그윽하게 내뿜었습니다. 그는 어린아이처럼 천진무구했고, 주위의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고 용서했습니다. 어느 날 천사가 내려와서 그에게 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그대에게 보내셨네. 무엇이든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해 보게. 혹시 치유의 은사를 받고 싶은가?"
"아닙니다. 저는 오히려 하나님께서 친히 치료하시길 바랍니다."
천사가 다시 물었습니다.
"죄인들을 바른 길로 돌아오게 하고 싶은가?"
그가 대답했습니다.
"아닙니다. 인간의 마음을 건드리는 것은 제가 할 일이 아닙니다. 그건 하나님께서 하실 일입니다."
"그러면 그대는 덕행의 모범이 되어 사람들이 본받고 싶게 마음이 끌리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은가?"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제가 관심의 중심이 됩니다. 저는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싶지 않습니다."
답답한 천사가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면 그대는 무엇을 바라는가?"
"저는 다만 하나님의 은총을 바랄 뿐입니다. 하나님의 은총만 있다면 저는 더 바랄 게 없습니다."
이때 천사가 다시 말했습니다.
"안 되네. 어떤 기적이든 그대가 원하는 것을 말해야 하네. 안 그러면 한 가지라도 억지로 떠맡기겠네."
"정 그러시다면, 저를 통해서 좋은 일이 이루어지되, 제 자신이 알아차리는 일이 없게 해주십시오."
"알겠네."
그래서 천사는 그의 소원대로 그 성인의 그림자가 그의 뒤에 생길 때마다 그곳이 치유의 땅이 되도록 해주었습니다. 그가 지나는 곳마다, 그래서 그의 그림자가 생기는 곳마다 병자들이 치유되고, 땅이 기름지게 되고, 말라붙었던 샘물이 다시 솟고, 삶의 고달픔에 시달린 이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성인은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관심이 온통 그의 그림자에 집중되었기 때문에 그는 잊혀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자기는 잊혀진 채 자기를 통해서 좋은 일들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그의 소원이 충분히 성취되었습니다.

등 록 날 짜 1970년 01월 01일 09시 33분 21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