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35. 갈림길
설교자 김기석
본문 막1:16-20
설교일시 2016/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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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림길
막1:16-20
(2016/08/28)

[예수께서 갈릴리 바닷가를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가 바다에서 그물을 던지고 있는 것을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그들은 곧 그물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갔다. 예수께서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이 배에서 그물을 깁고 있는 것을 보시고, 곧바로 그들을 부르셨다. 그들은 아버지 세베대를 일꾼들과 함께 배에 남겨 두고, 곧 예수를 따라갔다.]

• 성찰의 자리에 서다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지진으로 많은 이들이 희생된 이탈리아 사람들과도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오늘은 기독교 신앙의 초석을 놓았다고 여겨지는 성 아우구스티누스(354년 11월 13일-430년 8월 28일)의 축일입니다. <고백록>을 뒤적이다가 그의 회심 무렵의 이야기에 새삼 눈갈이 갔습니다. 그는 정결한 삶을 살고 싶어했지만 원수가 자기 의지를 지배하여 쇠사슬에 묶여 있다면서 그 까닭을 이렇게 분석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된 것은 내 의지가 왜곡되어(voluntas perversa) 육욕(libido)이 생겼고, 육욕을 계속 따름으로 버릇(consuetudo)이 생겼으며, 그 버릇을 저항하지 못해 필연(necessitas)이 생겼기 때문입니다"(어거스틴, <성어거스틴의 고백록>, 제8권 5장, 선한용 옮김, 대한기독교서회, 2008년 8월 30일, p.254). 의지의 왜곡, 육욕, 버릇, 필연으로 이어지는 그 과정이 일목요연합니다. 필연은 벗어나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죄의 노예상태란 바로 이런 것을 일컫는 말일 겁니다. 하지만 어둠이 깊으면 새벽이 다가오듯 아우구스티누스의 삶에도 새벽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친구인 폰티키아누스(Ponticianus)가 찾아왔습니다. 북아프리카 출신으로 황실에서 높은 지위에 있던 사람인데, 아우구스티누스가 사도 바울의 서신을 즐겨 읽는다는 사실을 알고는 트레베로스라는 곳에서 자기가 직접 겪은 일을 들려주었습니다. 황제가 경기장에서 구경을 하고 있는 동안 그는 다른 동료들과 근방에 있던 정원을 산책하고 있었습니다. 우연히 다른 길로 접어든 동료 두 사람이 어느 조그만 오두막집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그들은 성 안토니우스의 생애를 기록한 이야기를 발견했고, 그 글을 읽어나가면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자기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광야로 나가 은수 생활을 한 그의 이야기를 읽고 '거룩한 사랑'과 '건전한 수치감'에 압도된 한 친구가 다른 친구에게 말했습니다.

"내 부탁이니 말을 좀 해보게! 우리가 이렇게 고생하면서 추구하는 목적이 무엇이지? 우리가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이지? 우리가 제국의 공직에서 일하는 동기가 도대체 무엇이지? 우리가 궁중에서 일을 해도 결국은 황제의 친구들이 되는 것 이상은 바랄 수 없겠지? 만일 그 자리에 오른다 할지라도 거기가 얼마나 불안정하고 위험이 많은 곳인가? 그리고 위험이 많은 그 자리에 마지막으로 오르려고 할 때 얼마나 많은 위험을 치루어야 하는가? 그러나 하나님의 친구가 되기 원하면 바로 지금도 될 수 있지 않은가?"(앞의 책, p.259)

두 사람은 즉시 황제의 측근이라는 자리를 버리고 전적으로 하나님께 충성하기로 결단했습니다. 뒤늦게 그들과 만난 폰티키아누스와 다른 친구가 이제 날이 저무니 돌아가자고 말했지만 두 친구는 굳은 결심을 내보이며 자기들을 내버려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리하여 이 두 사람은 땅의 것에 마음을 다시 향한 채 궁전으로 돌아왔고 다른 두 사람은 마음을 하늘에 붙인 채 그 집에 머물렀습니다."(앞의 책, p.260)

폰티키아누스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어거스틴은 깊은 자기 성찰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그를 성찰의 자리로 인도하셨다는 말이 맞을 겁니다. "내 자신을 살피기 싫어서 이때까지 등뒤에 놓아 두었던 나를 당신은 잡아떼어 내 얼굴 앞에 갖다 세워 놓으셨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은 나로 하여금 내가 얼마나 보기 흉하고, 비뚤어지고, 더럽고, 얽었고, 종기투성이인지 보게 하셨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곁에 있던 친구 알리피우스를 붙들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우리에게 무엇이 잘못되었지? 너도 방금 들은 이 이야기는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지?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일어나서 천국을 획득하는데, 소위 모든 학문을 닦았다고 하는 우리들은 지금도 혈육의 진흙탕에서 뒹굴고 있는 것을 보라!"(같은 책, p.263)

• 삶의 모호성 속에서
황제의 측근으로 살던 관료들이 '거룩한 사랑'과 '건전한 수치감'에 사로잡혀 한 순간에 성공 지향적인 삶에서 하나님을 추구하는 삶으로 전환했다는 이야기는 너무 드라마틱해서 비현실적으로 들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런 일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은 결단입니다. '決'은 '새로운 세계를 향해 자기를 열어놓는 것'이고, '斷'은 '끊고 잘라내는 것'입니다. 신앙은 그렇기에 '이것이냐 저것이냐'(either or)의 문제이지 '이것도 저것도'(both and)의 문제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한쪽을 미워하고 다른 쪽을 사랑하거나, 한 쪽을 중히 여기고 다른 쪽을 업신여길 것이다.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아울러 섬길 수 없다"(마6:24)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모든 길을 다 걸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갈림길을 만날 때마다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어느 한 길을 선택했다는 말은 다른 길을 포기했다는 말입니다. 기로망양岐路亡羊이라는 말을 아시지요? 양을 잃어버린 사람이 사방으로 찾아나섰지만 갈림길이 너무 많아 결국은 찾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이 말 속에는 어지러운 세태일수록 근본으로 돌이켜야 한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인생의 정답은 없습니다. 각자가 서 있는 삶의 자리가 다르고, 개개인의 특성 또한 다르기에 그렇습니다. 내게는 당연한 일이 다른 이에게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한 차이를 인정하려 하지 않을 때 불화가 발생합니다.

삶의 우선순위는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어떤 이는 대의를 위해 개인들의 사소한 희생은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무고한 사람을 희생시키는 대의는 부도덕하다고 여기는 이들도 있습니다. 카뮈는 정의를 세우기 테러를 자행하는 이들을 향해 "나는 정의가 옳다고 믿지만 정의 이전에 내 어머니를 보호할 것"(로버트 자레츠키, <카뮈, 침묵하지 않는 삶>, 서민아 옮김, 필로소픽, 2015년 5월 11일, p.104)이라고 말했습니다. 사르트르와 같은 이들은 카뮈의 그런 태도를 소시민적인 것으로 보아 비판했습니다. 삶은 모호함을 그 특색으로 합니다.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지향조차 없어서는 안 됩니다.

• 넘어진 자리를 딛고 일어서다
어느날 갈릴리 바닷가를 지나가시던 예수님은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을 던지고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특별할 것도 없는 갈릴리의 일상적 풍경이었습니다. 하지만 1세기 팔레스타인의 상황을 조금이라도 이해한다면 이러한 풍경 뒤에 숨겨진 눈물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시 갈릴리의 분봉왕이었던 헤롯 안티파스는 야심가였습니다. 권력욕에 눈이 먼 그는 당시의 로마 황제였던 테베리우스에게 잘 보이기 위해 갈릴리 서안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고 황제의 이름을 따 '티베리아스'라고 불렀습니다. 주후 18년이었습니다. 그는 왕가의 정통성을 문제시하는 시선을 차단하기 위해 동생 빌립의 아내인 헤로디아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헤로디아는 하스몬 왕가의 공주였던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그를 준엄하게 꾸짖었다가 죽임을 당했습니다. 요한이 꾸짖은 것은 그의 불의한 결혼만이 아니라, 민중들의 삶을 도탄에 빠뜨리고 있던 그의 가혹한 통치였습니다.

헤롯 안티파스는 자기 야욕을 이루기 위해 백성들에게 가혹한 세금을 징수했습니다. 그리고 농부들에게 외국에 수출할 수 있도록 특화된 작물을 심도록 강요했습니다. 그로 인해 소박하게나마 이어지고 있던 농민들의 삶이 거덜나게 되었습니다. 갈릴리 어부들의 상황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배의 크기 혹은 그물의 크기에 따라 세금이 부과되었습니다. 고기를 잡지 못한 날도 세금은 예외없이 부과되었기에 어부들의 삶은 피폐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막연하기는 했지만 그들은 새로운 세상이 열리기를 학수고대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첫 제자들이 어부라는 사실이 예사롭게 들리지 않습니다. 지금 세상에서 누릴 것을 다 누리며 사는 이들은 변화 혹은 변혁을 싫어합니다. 변화는 현상 질서를 뒤흔들어놓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때 예수께서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셨습니다. 주님은 배를 호수에 띄우고 그물을 던지고 있던 시몬과 안드레를 새로운 세상의 단초가 되라고 초대하셨습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1:17) 그들은 즉시 그물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갔습니다. 예수는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이 배에서 그물을 깁고 있는 것을 보시고 그들을 부르셨습니다. 그들은 아버지를 일꾼들과 함께 배에 남겨 두고 예수를 따라나섰습니다. '부름'과 '즉각적 응답'이 도드라집니다. 힘겹다고는 해도 비교적 익숙하고 안전한 세계를 떠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들은 망설임조차 보이지 않고 주님의 부름에 응답했습니다. 이런 즉각적 응답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오늘의 본문 바로 앞에 나오는 구절에 주목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신 것은 '요한이 잡힌 뒤'입니다. 그때 주님은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여라. 복음을 믿어라"(1:15). 땅의 소리와 하늘의 소리를 대언하던 세례자 요한이 체포되었을 때 갈릴리의 민심은 들끓었을 것입니다. 어떤 때는 쇠망치처럼 둔중하게, 어떤 때는 예리한 칼로 찌르듯 자기들의 무뎌진 마음을 타격하고 충격을 가했던 예언자, 권력 앞에 조금도 주눅이 들지 않은 채 할 소리를 다했던 그가 이제 속절없이 희생당하게 될 찰나였습니다. 어떤 이들은 깊은 체념에 빠졌지만, 또 어떤 이들은 가슴 속에 일고 있는 잉걸불에 어찌할 바를 몰랐을 것입니다.

바로 그 때 예수님께서 오셔서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외치셨던 것입니다. 그 외침은 사람들의 가슴 속에서 잦아들고 있었던 불씨를 되살려놓았던 것입니다. '사람 낚는 어부가 된다는 것',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다 알지는 못해도 주님의 부름을 받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삶에 거대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직감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역사의 흐름에 따라 이리저리 나부끼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은 수동적 객체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능동적 주체로 일으켜 세웠습니다. 예수님은 로마의 폭압적 지배와 그 지배의 하수인이 되어 더욱 가혹하게 민중들을 수탈하는 헤롯의 통치에 맞선 하나님의 나라, 곧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세상을 향해 그들을 부르셨습니다.

• 버리고 떠나라
주님은 지금도 사람 낚는 어부의 길로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신자유주의 경제질서에 의해 모든 것이 경제적 가치로 환원되는 세상, 꿩 잡는 게 매라는 식의 도구적 실용주의가 판을 치는 세상에서 지친 이들을 참 사람의 길로 부르십니다. 사람들이 서로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보아내고, 서로 비스듬히 기댄 채 살아가는 세상, 해함도 없고 상함도 없는 세상의 길로 말입니다.

그 길로 가기 위해서는 우리는 많은 것을 버려야 합니다. 베드로와 안드레는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아버지와 일꾼들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버리지 않고는 따르기 어렵습니다. 부자 청년은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부름에 응답하지 못했습니다. 부유함, 유복함 속에 머물면서 영생을 구하는 것이 얼마나 허구에 찬 것인지를 그 사건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진심으로 신뢰하는 이들은 불확실한 미래에 자기 삶을 맡깁니다. 아브람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는 자기에게 익숙한 세계, 가진 것 위에 인생의 집을 지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신앙은 계산이 아니라 모험입니다.

세상은 우리 속에 끝없이 두려움을 주입합니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커질수록 우리는 자기만의 둥지 속에 머물려 합니다. 타자를 자기 삶 속에 받아들이고, 그와 더불어 더 나은 세상을 열어가는 일에 관심을 갖지 못하게 합니다. 불신앙은 우리로 하여금 사적인 문제에만 매달리며 살게 합니다. 하지만 신앙은 우리를 우리 공동의 운명을 개선하는데로 인도합니다. 지금 울고 있는 이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비천함에 처한 이들의 벗이 되어주는 일을 도외시한 채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허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숙명여대의 김응교 교수의 책 <곁으로>에서 읽은 한 대목이 떠오릅니다. 그는 이탈리아 피렌체에 있는 세례당 건물에 새겨진 부조물에 주목합니다. 날개 달린 천사가 아주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뭔가를 향해 다가섭니다. 그곳에는 조그마한 주머니가 매달려 있는데, 그 위에 '희망'을 뜻하는 'Speranza'가 축약된 형태로 적혀 있습니다. 김응교 교수는 그 주머니 자체가 희망이 아니라, 바라보는 대상 곁으로 나아가는 행동 자체가 희망이라고 말합니다. 내 어깨를 짓누르는 무게에 집중할 때 우리는 다른 이들의 짐을 나눠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신비는 다른 이들의 짐을 나눠지기 위해 무릎을 굽힐 때 우리 인생의 짐이 가벼워진다는 사실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갈림길 앞에 서 있습니다. 단호하게 예수가 앞서 걸으신 길, 다른 이를 복되게 하는 길을 선택할 때, 우리 삶의 비애는 줄어들 것입니다. 땅에 살면서도 하늘에 마음을 둔 채 사는 이들을 통해 세상은 좀 더 평화로운 곳으로 변할 겁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16년 08월 28일 11시 33분 17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