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37.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설교자 이범석
본문 눅 15:1-10
설교일시 2016/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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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눅 15:1~10
(2016/09/11/ 성령강림 후 제17주/교회연합주일)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의 말씀을 들으려고 그에게 가까이 몰려들었다.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투덜거리며 말하였다. "이 사람이 죄인들을 맞아들이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구나."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너희 가운데서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를 가지고 있는데, 그 가운데서 한 마리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찾아 다니지 않겠느냐? 찾으면, 기뻐하며 자기 어깨에 메고 집으로 돌아와서, 벗과 이웃 사람을 불러모으고,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 하고 말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을 두고 더 기뻐할 것이다."
"어떤 여자에게 드라크마 열 닢이 있는데, 그가 그 가운데서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온 집안을 쓸며, 그것을 찾을 때까지 샅샅이 뒤지지 않겠느냐? 그래서 찾으면, 벗과 이웃 사람을 불러모으고 말하기를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드라크마를 찾았습니다' 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을 두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기뻐할 것이다."]

* 예수님의 양 편에
주님의 기쁨이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에게 임하기를 소망합니다.
예수님 주변에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오늘도 한쪽에는 세리들과 죄인들이 몰려와 있었고, 다른 한쪽에는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이 서 있었습니다. 세리들과 죄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간절히 원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을 위로하시고 새 길로 인도하는 말씀을 들려 주셨습니다. 세상으로부터 천대받고 무시 받았던 설움이 내면 깊숙한 곳으로부터 씻겨 내려가는 걸 그들은 체험했을 겁니다.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음식을 나눠 드시기까지 하셨습니다.
한편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님께서 무슨 얘기를 하시나, 궁금했는지, 가까운 거리에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복된 말씀으로 그들의 마음이 따뜻해지기보다, 예수님의 식사 때문에 그들은 상처를 입었습니다. 그들은 투덜거립니다. 예수님이 죄인들을 맞아들이고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 무척 못마땅했던 모양입니다.

예수님 양 편에 있는 이들은 서로 나뉘어 있을 수밖에 없는 사이입니다. 소 닭 보듯 하는 관계랄까요.
신약 시대의 세리들은 온갖 정해진 세금들 이외에 자기 자신을 위한 수입까지 거둘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을 강도나 도둑이라고 여겼습니다. 게다가 그들은 이방인들(로마)을 섬기고 만났기 때문에, 종교적으로 부정한 사람들로 여겨졌습니다. 죄인들 중에도 가장 무시당하는 으뜸 죄인들이었습니다. 옷을 찢으며 회개하고 또 회개해도 모자랄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은 저들과 정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종교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흠이 없는 사람들이었지요. 행실로만 따진다면, 한 마디로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에 해당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 둘은 서로 전혀 다른 길 위에 서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다니는 길이 다르기에, 만날 수도, 만날 필요도 없는 사이인 셈입니다. 당연히 한 식탁에서 같이 식사를 나눠 먹는다는 건 상상할 수조차 없는 끔찍하고 모욕적인 일이었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베드로 사도는 백부장 고넬료의 초대를 받고, 그의 집에 갈지 말지 고민합니다. 유대인이 이방인 집에 들어갈 수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베드로는 환상 가운데, 율법이 부정하다고 규정한 동물을 잡아먹으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걸 듣습니다. 그는 이방인과 사이에 가로막혀있던 높은 담장이 점차 무너지는 걸 깨달으며 길을 나섭니다. 다녀온 이후에, 예루살렘 교회 회중의 일부는, 베드로가 이방인과 함께 음식을 먹은 점을 들어 나무랍니다.(행11:3) 그들은 베드로가 이방인에게 세례까지 베풀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묻기는커녕 관심조차 없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온통 베드로가 이방인과 얼마나 접촉했는가, 그래서 얼마나 불결해졌는가에 몰려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그 편견어린 시선을 깨기 위해, 미리 활동하셨던 성령님에 대해 증언해야 했습니다. 이렇듯 서로 다른 편에 갈라 서 있는 사람들이 함께 밥을 먹는다는 건 참 어려웠습니다.

* 오늘의 청자
예수님께서 한쪽에서 투덜거리고 있는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을 당신 가까이로 부르십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불편한 마음의 근원을 알아차리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늘의 비유 이야기를 당신의 말씀을 들으려고 몰려든 세리들과 죄인들이 아니라, 마음이 온통 짙은 어둠에 잠긴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을 향하여 들려주십니다.
사실 일전에도 예수님은 불평하는 바리새인들을 불러 얘기해주시곤 했습니다. 레위를 제자로 부르시고, 잔치에 앉아 식사하실 때에,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려 먹고 마신다고 불평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그들에게 당신께서 오신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사람에게는 필요하다.”(눅5:31)
누가복음에서 향유 옥합을 깨어 예수님께 바친 여인의 이야기의 배경은 바리새인의 집(눅7:36)입니다. 그곳에서도 예수님은 그들에게 비유의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이후에도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대화하시고, 그들과 함께 식사를 나누셨습니다.

오늘 그들에게 들려주신 예수님의 비유는 이렇습니다.
양 한 마리를 잃어버린 부자가 그것을 찾으러 나가서 끝까지 뒤져 찾아냈습니다. 그는 기뻐하며, 집에 돌아와, 벗과 이웃 사람들을 불러 함께 기쁨을 나눕니다. 한 드라크마를 잃어버린 가난한 여인이, 등불을 켜고, 온 집안을 빗자루로 쓸며 샅샅이 뒤져서, 그 잃은 드라크마를 찾아냈습니다. 그 여인도 마찬가지로 벗과 이웃 사람들을 불러 모아서, 함께 기뻐합니다.

* 잃은 자를 찾은 기쁨, 사랑을 받아들이는 기쁨
예수님의 비유에서, 잃어버린 한 마리 양과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는 분명히 세리들과 죄인들을 가리킵니다. 이들이 바로 주인의 기쁨입니다.
예수님은 두 번이나 반복해서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을 두고 기뻐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이 비유 이야기에서 ‘회개’라는 단어가 갑작스럽고 낯설게 느껴집니다. 농담입니다만, 양이나 드라크마에게 무슨 회개를 요청할 수 있겠습니까. 사실 세리들과 죄인들이 무슨 큰 죄를 저질렀다고 옷을 찢으며 회개했다는 장면은 없습니다. 그들이 끔찍한 범죄를 고백했거나, 일상의 게으름에서 돌이키거나, 일탈하는 삶에서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삶으로 방향 전환을 했다는 묘사도 없습니다. 그들이 개인적으로 눈에 보이는 어떠한 회개의 행위를 했는지는 이 단락의 관심이 아닌 듯싶습니다.
성경이 보여주고 있는 모습은 단지 한 가지뿐입니다. 잃은 것을 끝까지 찾고자 하는 주인에게, 또 불을 켜고 바닥을 쓸며 샅샅이 뒤지는 주인에게, 그들이 발견되었다는 것입니다. 1절의 표현처럼, 그들은 모두 예수님 가까이 몰려들었을 뿐입니다.
최소한 이 이야기에서만큼은 회개를 이렇게 정의해야겠습니다. 회개는, 자신들이 주님께 발견되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겁니다. 우리야말로 하나님이 찾으려고 애쓰셨던 바로 그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사실 이 비유에서, 잃은 양과 드라크마가 제 발로 집을 나가서 분실된 건 아닙니다. 잃어버린 자는 양떼 주인과 드라크마 주인입니다. 주인은 양과 드라크마를 잃은 아픔이 굉장히 컸습니다. 양과 드라크마를 잃게 된 어려운 여건과 상황, 환경이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인지 주인은 끝까지 찾아 나섭니다. 이 만남에서부터 회개와 구원의 새 역사는 시작합니다.

주인이신 예수님은 잃었던 존재들을 되찾았기에 기뻐하시며 함께 식사를 나누고 계셨습니다. 세리들과 죄인들 역시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받아 들여 주심에 대해 감사하며 식탁에 둘러있습니다. 이들 모두는 이 땅에 펼쳐진 주님의 아름다운 잔치 자리에 기뻐하며 함께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잃은 이들을 찾으시는 주님의 음성과 손길은 여전히 애가 탑니다. 아직 맞은편에 팔짱을 끼고 투덜거리고 있는 이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오늘의 비유의 직접적인 청자들, 그들이 식탁에 앉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주님께 더 이상 다가오지 않는 고집불통들입니다. 주님께서 그들이 다가올 수 없을 만큼 어려운 과제를 그들에게 내주신 것도 아닙니다. 더 엄격한 율법을 지키라고 요구하시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들에게 더 의로워지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그들을 기쁨의 동반자로 발견하셨다는 것을 그들이 받아들이기만 하면, 그들 역시 주님께 더 가까이 다가오고 싶었을 텐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주님은 단지 기쁨의 자리에서 그들이 같이 기뻐하기를 원하셨지만, 그들은 함께 하지 않았습니다. 같이 앉는 순간, 저 세리들과 죄인들처럼 낮고 천한 자리로 뚝 떨어질 것이라고 여겼을 겁니다. 마치 다시 마음 잡았다고 떠들어대는 전직 불량배와 어울리려는 자녀를 보는 부모의 심정이랄까요. 도저히 세리들과 같은 자리에 앉는 걸 인정할 수 없었을 겁니다. 저들은 자신들과 일체 무관해야만 하는 사람들이니까요.

*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주님은 투덜거리는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에게 이 비유 이야기를 들려주시면서 어떤 마음이셨을까요?
‘잃은 양을 찾아서 오늘 내가 무척 기쁘단다. 너희의 마음의 벽, 선입견과 편견을 털어버리고, 나의 곁에, 우리 서로 모두 함께 이 식탁에서 음식을 나누면 좋겠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불평하는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에게 주님께서 다가가신 게 한두 번이 아닙니다. 주님은 찾고, 경청해 주시고, 답변해 주시고, 식탁의 자리로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점점 더 뒤로 물러났습니다. 그들의 이유는 분명했습니다. 주님과 함께 앉아 있는 주님이 잃었다 찾은 양들이 신경에 거슬렸습니다. 이렇게 그들은 양뿐만 아니라 주님과도 점점 더 멀어졌습니다.

편견과 아집 속에 서로 오갈 수 없는 사이가 되어버린 사람들, 그 한가운데 주님께서 서 계십니다. 우리 주님께서 원하시는 건, 이편저편 모두가 무장해제하고 서로 사람과 사람으로 따뜻하게 만나는 것인데, 참 어렵습니다.
한없이 받아주시고 품어 안아주셨건만, 자기 선입견에 걸려 넘어지는 수많은 오늘의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을 보며, 주님은 또다시 말씀하십니다.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곳곳에 기쁨의 식탁을 마련하시고, 멀찍이 쳐다보고 있는 이들을 초대하십니다. 나랑 서로 섞일 수 없을 것 같은 너의 곁에 자리를 마련하시고, 부르십니다. 서로 모습이 달라도, 생각이 달라도, 교파가 달라도, 서로 이것저것이 다르고 또 달라도, 우리는 주님의 식탁에서 같이 음식을 나눌 수 있습니다. 같이 마음껏 웃고, 조금씩 마음이 따뜻해지고, 서로 위로가 되어주고, 아름다운 미래를 향한 꿈을 함께 꿀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잃었다 찾은 바로 그 양입니다. 동시에 기뻐하시는 주님과 함께 기뻐하며 식탁의 교제를 나누고 있는 주님의 벗과 이웃 사람들입니다. 더 나아가 이 기쁨의 잔치를 주님의 이름으로 세상 도처에서 벌이는 주님의 제자들입니다. 부디 우리 모두 주님의 기쁨이 되기를, 그리고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을 곁에 있는 이들과 마음껏 누리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16년 09월 11일 10시 46분 13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