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34. 나팔소리를 듣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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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느4:15-23
설교일시 200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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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팔소리를 듣거든
느4:15-23
(2001/8/26)


절망을 넘어서는 법

이스라엘인들이 바벨론의 포로생활로부터 해방된 것은 나라가 망한지 근 50년의 세월이 흐른 때였습니다. 바벨론을 무너뜨리고 페르시아 제국을 세운 고레스 임금은 제국의 안녕을 위해 모든 신들에게 기도를 드리도록 하기 위해 각 민족들의 신앙을 장려하는 정책을 썼습니다. 그는 주전 538년 예루살렘에 성전을 재건하도록 하기 위해 유대인들의 귀향을 허락했습니다. 이것이 제1차 귀향입니다. 그로부터 80년이 지난 주전 458년 경에 아닥사스다 1세는 제사장이자 학사인 에스라를 보내 예배 생활의 질서를 바로잡도록 합니다. 많은 이들이 에스라와 동행했습니다. 이것이 제2차 귀향입니다. 그러부터 약 13년이 지난 후 아닥사스다 1세의 허락을 맏은 느헤미야가 사람들을 데리고 돌아와 예루살렘의 성벽을 재건했습니다. 이것이 제3차 귀향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그 제3차 귀향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조상들의 땅, 자유의 새 땅으로 간다는 설렘이 귀향민들의 발걸음을 재촉했을 겁니다. 하지만 설렘 못지 않게 두려움도 있었을 거예요. '그 땅'은 그들에게 낯선 땅입니다. 부모들의 탄식 속에서만 떠오를 뿐 한번도 살아본 적이 없는 곳이니 말입니다. 그러니 낯선 것이 주는 두려움도 있었겠지요.

하지만 그들이 예루살렘에 도착했을 때 상황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나빴습니다. 거룩한 도성이라는 예루살렘은 성벽이 무너진 채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사람들의 왕래로 시끌벅적해야 할 성문 옆 도로는 풀이 우거져 짐승조차 다닐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돌아온 곳은 희망의 땅이 아니었습니다. 설렘도 두려움도 아닌 새로운 감정이 그들을 사로잡았습니다. 기가 막힘, 그리고 막막함이 그것이었습니다. 우리도 살면서 이런 지경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눈을 감고 외면하든지, 딱 돌아서서 어딘가로 도망가버리고 싶은 현실 말입니다. 하지만 어떡합니까? 살아야지요. 절망스런 마음을 수습하는 비결은 현실을 기정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바꿀 수 없는 일이라면 그것을 나의 현실로 받아들이고 거기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희망의 불지피기

혼자 감당하기에 어려운 일을 만나면 사람들은 대개 맥이 탁 풀려서 무엇부터 해야할지 몰라 암담해 합니다. 온갖 잡동사니가 가득찬 방에 들어가면 먼저 발 디딜 자리부터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손에 닿는 것부터 놓여야 할 자리에 정리하기 시작해야 합니다. 누구보다도 느헤미야는 용기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의 상황은 암담했지만 그는 내색하지 않고, 사람들을 불러모읍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여 다시 수치를 받지 말자"(2:17)고 권고합니다. 그 가능성에 대해 반신반의하는 지도자들에게 느헤미야는 하나님이 그를 어떻게 도우셨는지를 증언합니다. 그리고 페르시아의 아닥사스다 1세도 예루살렘 중건에 대해 호의적이라는 사실을 밝힙니다. 한 사람의 진정이 담긴 고백은 역사를 변화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는 요한의 증언은 말이 곧 사건임을 뜻하는 것입니다. 느헤미야의 증언은 사람들의 가슴 속에 가득차있던 두려움의 재를 걷어냈고, "우리는 할 수 있다"는 희망의 불을 지폈습니다.

마침내 이스라엘 백성들은 폐허 속에 희망의 기초를 놓기 시작했습니다. 대제사장의 가족들이 먼저 이 일에 나섰습니다. 많은 이들이 그 뒤를 따랐습니다. 누구의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발적인 헌신으로 성벽 공사에 나선 것입니다. 그것은 단순한 성벽 공사가 아니었습니다. 절망의 나락속에 누워있던 자기 자신들의 존재를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땅에서 넘어지면 그 넘어진 땅을 딛고 일어서야 한다고 합니다. 그들은 절망의 땅을 희망의 땅으로 바꾸기 위해 땀흘리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방해가 있다 해도

하지만 좋은 일이 있으면 나쁜 일이 있게 마련입니다. 양지가 있으면 음지가 있고, 실체가 있으면 그림자가 있는 격입니다. 그래서 옛 사람들은 好事多魔라 했습니다. 사마리아 지역의 지방 행정관인 산발랏은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기 위한 공사가 한참이라는 소문을 듣고 몹시 못마땅해 합니다. 그는 예루살렘이 언제까지라도 자신의 통제하에 놓여있기를 바랐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스라엘인들이 도저히 해낼 수 없는 일을 시작했다고 비웃습니다. 그들의 피폐한 경제적인 상황으로 볼 때 그 거창한 역사를 이룬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였기 때문입니다. 도비야라는 사람은 한 술 더 뜹니다. "저들이 건축하는 성벽은 여우가 올라가도 곧 무너지리라"(4:3). 이 말은 조롱인 동시에 위협입니다. 꼭 동네 깡패가 종주먹대면서 선량하고 무고한 시민을 을러대는 격입니다.

하지만 밀물과 싸워서는 이길 수 없는 법입니다. 예루살렘을 회복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일이라면 어떤 방해가 있어도 그 일은 성취되고 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산발랏과 도비야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기도하면서 일을 계속했어요. 마침내 성벽이 전부 연결되고, 성벽의 높이도 거의 절반 가량 진척되었습니다. 저는 그 광경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영차 영차 어깨를 겯고 한 덩어리가 된 것으로 그려봅니다. 혼자 힘으로는 할 수 없지만, 함께 모여서 그 일을 이루어냈다는 뿌듯함이 그들의 기쁨을 더 크게 했을 겁니다. '우리는 하나'라는 강력한 유대감이 그들 사이에 형성되었겠지요?

하지만 희망이 커져갈수록 그것을 고깝게 바라보는 이들의 의구심도 커지게 마련이지요. 이스라엘 주변에 있는 여러 부족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의 회복을 바라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을 칠 기회만 노리고 있습니다. 위기였습니다. 그들은 파숫군을 두어 밤낮으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게 했습니다. 하지만 외적인 위협은 노동과 빈곤에 시달린 사람들의 마음 속에 두려움을 심어놓았습니다. 누군가의 말대로 가야 할 길은 먼 데 해는 뉘엿뉘엿 지고, 먹을 건 없고, 다리는 아픈 셈입니다. 사람들이 술렁이기 시작합니다. 불만의 소리가 터져나오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희망이 그런 것처럼 절망도 전염력이 강하다는 것을 압니다.


가야 할 길이라면

느헤미야는 위기상황임을 직감했습니다. 절망감이 이성적 통제의 둑을 넘으면 걷잡을 수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래서 백성들을 모아 놓고 다시 한번 희망의 불을 지피려 합니다. 먼저 이 일은 지극히 크시고 두려우신 주님의 일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킵니다. 그리고 이 일은 다른 누구를 위한 일이 아니라 바로 우리 가족들을 위한 일임을 잊지 말라고 외칩니다. 피할 수 없는 싸움이면 감당하자는 것입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저는 과거에 세계 헤비급 챔피언이었던 복싱선수 무하마드 알리의 말을 인상깊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는 조지 포먼과 같은 강자들과 많이 싸웠습니다. 어느 날 기자가 물었습니다.

"시합하기 전에 두렵지 않습니까?"
"두렵습니다."
뜻밖의 대답이었습니다. 그런데 무하마드 알리는 계속해서 말했습니다.
"시합을 앞둔 전날 저녁이면 너무나 긴장이 되어서 나는 잠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내가 경기를 하게 될 체육관을 찾아갑니다. 아무도 없는 사각의 링에 올라 나는 텅 빈 관중석을 바라봅니다. 눈을 감으면 관중들의 함성이 들려옵니다. 나는 잠시 쉐도우 복싱으로 몸을 풉니다. 그리고 링 바닥에 드러누워 천장을 바라봅니다. 어쩌면 내일 나는 이렇게 누워 천장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런데 결코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그 두려운 현실을 상상속에서나마 대면하고 나면 의외로 마음이 평온해집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다짐합니다. '이기자. 사각의 링에서 피할 곳은 없다.'"

가야 할 길이라면 울면서라도 가야 합니다. 한번 두려움으로부터 달아나기 시작하면 두려움은 언제까지라도 따라와 우리를 노예로 삼고 맙니다. 도망가고 싶은 때야말로 마주 서야 할 때입니다. 느헤미야의 말에 고무된 백성들은 한 손으로는 일을 하고, 다른 손에는 무기를 잡았습니다. 느헤미야는 나팔 부는 사람을 데리고 다니면서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나팔 소리를 듣거든 그리고 모여서 우리에게로 나아오라.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싸우시리라"(4:20). 이 말은 좀 앞 뒤가 안맞는 것 같습니다. '나팔 소리를 듣거든 달려와서 함께 싸우자', 그러면 말이 되겠는데 말입니다. 하지만 이 말 속에 깊은 뜻이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적들과의 싸움을 하나님의 싸움이라고 단언합니다. 우리가 형제를 지키기 위한 싸움에 나섰을 때 그것은 곧 하나님의 싸움이라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또 건축 공사를 책임맡은 사람들에게 예루살렘 성 안에 머물도록 지시했습니다. 느헤미야와 그의 측근들도 예루살렘에 머물면서 밤에도 옷을 벗지 않고, 어디에 가든지 무기를 손에서 놓지 않았습니다. 이런 지도자들의 헌신이 있었기에 안팎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채 두 달도 되지 않아 예루살렘 성벽을 중건하는 기적같은 일을 이루어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일이 하도 기적같은지라, 느헤미야는 6장 16절에서 "이 일은 하나님이 이루신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무너진 기초를 다시 쌓을 때

저는 느헤미야에 의한 예루살렘 성벽 중건을 바라보면서 우리의 현실을 돌아봅니다. 선지자 예레미야의 탄식대로 우리의 현실은 '물을 담지 못하는 터진 웅덩이'(렘2:13)와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OECD에 가입하고, 선진국의 문턱에 이르렀다고들 말하지만, 우리는 스스로를 긍정하지 못합니다. 너무나 많은 젊은 일꾼들이 이 나라를 떠나고 있습니다. 먹고 사는 문제는 그런대로 해결했다고 하지만, 근본적인 문제에 있어서 우리는 천민적인 속성을 노정하고 있습니다.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이루기 위해 지켜야 할 원칙이 존중되지 않아요. 기본이 무너졌어요. 우리 시대의 행동준칙은 '나 좋을대로'가 아닐까 싶어요. 이걸 '남 좋을대로'로 바꾸어야 성숙한 사회가 되는데 말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어느 자리에 있든 원칙을 지키고, 남을 배려하는 삶을 선택해야 합니다. 높은 자리에 있어도 특권적인 대우받는 것을 스스로 거부하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불편을 감수하겠다는 각오를 새롭게 해야 합니다. 내가 일상적으로 누릴 수 있는 특권을 포기하는 데서부터 새로운 역사가 시작됩니다.

이제는 무너진 기초를 다시 쌓아야 할 때입니다. 교회가 이 일에 앞장서야 해요. 우리라도 기초를 지키는 사람들이 되어야 해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밖으로부터의 위협과 유혹에 대처하기 위해 손에 무기를 들었던 것처럼, 우리도 욕망을 부추기고 위반을 사주하는 이 음란한 세대로부터 우리를 지키기 위해 눈을 부릅떠야 합니다. 달콤한 음성으로 속삭이는 유혹자들에게 분명한 어조로 '아니'라고 말해주어야 합니다. 슬그머니 우리 속에 들어와 주인 노릇을 하려는 이기심과 죄에 대해서 퇴거를 명해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한편 무너진 영혼의 성벽을 튼실하게 쌓아올려야 합니다. 진리의 벽돌로 우리 인생의 집을 지어나가야 합니다. 거짓과 편법을 멀리하면서 우직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세상은 우리를 보고 미련하다거나, 융통성이 없다고 말할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 길을 걷지 않고는 우리 영혼의 집이 든든하게 설 수 없습니다.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나팔소리가 들리면 언제든 달려와 줄 형제와 자매들이 있습니다. 우리 속에 희망이 가물거릴 때면 희망의 불씨를 나눠줄 벗들이 여기 있습니다. 우리는 현실의 어둠을 보고 투덜거리라고 부름받은 것이 아니라, 세상의 어둠을 밝히기 위해 작은 등불 하나를 밝혀들라고 부름받았습니다.

기본이 지켜지는 세상을 우리가 과연 이룰 수 있을까, 계산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의 뜻안에 확고히 서있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싸워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편이시라면 우리는 이미 이겼습니다. 질 수 없습니다. 막막하면 기도하십시오. 그래도 답답하거든 내 자식이 살아갈 마당을 깨끗이 한다고 생각하십시오. 오늘부터 시작되는 청파 아레오바고는 이 시대를 변혁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비상소집입니다. 응답하십시오. 우리들 가운데 있는 산발랏과 도비야를 몰아내십시오. 우리가 어깨를 겯고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면 하나님은 우리를 안고 가실 것입니다.

등 록 날 짜 1970년 01월 01일 09시 33분 21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