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35. 주님의 손을 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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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막8:22-26
설교일시 200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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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손을 잡고
막8:22-26
(2001/9/2)


탄식하시는 주님

예수님도 가끔은 사람에게 실망하실 때가 있었나 봅니다. 마가복음 8장에는 예수님의 울울한 심정을 드러내는 장면이 몇 군데 나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와서 "하늘에서부터 오는 표적"을 구했을 때 예수님은 "마음속에 깊이 탄식하셨다"(8:11)고 합니다. 이 대목을 가톨릭 교회의 성경은 "당신 영으로 한숨을 쉬시며 말씀하셨다"고 옮기고 있습니다. 영은 인간 존재의 가장 깊은 차원을 말하는 것이니,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탄식이 일상적인 실망감을 나타내는 말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바이블은 같은 구절을 "심장으로부터 곧장 솟구쳐나오는 한숨을 내쉬셨다"(a sigh that came straight from the heart)고 옮기고 있습니다. 말로는 하늘에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고 있지만 그들의 마음이 얼마나 하나님으로부터 멀고, 진리로부터 먼 지를 꿰뚫어보셨기에 예수님은 탄식하고 계신 것입니다.

답답한 것은 바리새인들만이 아닙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호수 건너편 벳새다로 가던 배 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뜬금없이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8:15)고 하십니다. 진리를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그들의 굳은 마음과 '힘'을 진리로 숭상하는 삶의 태도를 경계하신 말씀인데, 제자들은 그 말을 오해합니다. '우리가 점심거리를 미처 챙기지 못한 것을 아시고, 책망하시는구나.' 참 속 터질 일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정확히 자기 그릇만큼만 이해하도록 되어 있나봐요. 지금 그들에게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먹을 것'입니다. 점심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가, 이 문제가 온통 그들을 사로잡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러니 그런 반응을 했겠지요. 예수님은 기가 막혀 하면서도 친절하게도 물고기 몇 마리와 보리떡 몇 덩이를 통해 일어난 기적을 상기시켜 주십니다. 그러면서 탄식하듯 말씀하십니다. '문제는 그게 아니야, 이 사람들아. 아이구, 아직도 모르겠니?' 그들의 가슴은 느낄 줄을 모르고, 그들의 눈은 표면적인 것 너머를 보지 못합니다.


주님의 손에 이끌려

오늘의 본문은 이런 일련의 사태들과 관련하여 이해해야 합니다. 벳새다에 도착하자 사람들이 눈먼 사람 하나를 데리고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물론 치유를 기대해서일 겁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바람과는 아랑곳없이 그를 데리고 마을 밖으로 나갑니다. 왜 그랬을까요? 마태복음11장 21절이 말하듯이 이미 많은 은총을 경험하고도 회개할 줄 모르는 완악한 마을이어서 일까요? 아니면 그의 치유를 위해서는 일상적인 삶의 자리를 벗어날 필요가 있었을까요?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이 사건을 이해해 보고 싶습니다. 그 사람은 다른 이들의 손에 이끌려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기대감도 있었겠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두려움이 도사리고 있었을 겁니다. 괜한 짓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그를 사로잡았을 거예요. 그에게 필요한 것은 마음의 안정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그의 손을 붙잡고 마을 밖으로 인도합니다. 손처럼 많은 말을 할 수 있는 것이 또 있을까요? 연인들이 마주잡은 두 손은 사랑의 소통행위이듯이, 예수님의 손잡음은 앞 못보는 이의 가슴 속에 있는 의구심을 쓸어내리는 해독제가 되었을 겁니다. 예수님의 손길에 이끌리면서 그는 자기 마음에 드리워있던 어둠의 장막이 벗겨지는 느낌을 받았을 거예요.

마을을 벗어나자 예수님은 그의 눈에 침을 뱉으시고, 그의 눈을 정성스럽게 어루만지십니다. 사랑이 가득 담긴 손길이었을 겁니다. 앞 못보며 살아왔던 과거의 모든 아픔을 어루만져 녹게 하는 손길이었을 겁니다. 주님은 따뜻한 음성으로 물으십니다. "무엇이 보이느냐?" 그러자 그는 눈을 떠 주변을 둘러봅니다. 그리고 감격에 찬 음성으로 말합니다. "사람들이 보입니다. 그런데 꼭 나무가 걸어 다니는 것처럼 보이는군요." 어찌 보면 예수님의 치유의 능력이 제대로 발휘되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병자에 대한 치유의 과정일 뿐만 아니라, 예수님 곁에 머물면서도 하늘과 만나지 못하고 영적인 눈이 열리지 않은 제자들의 상태에 대한 암시이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제자들은 아직 온전히 보지 못합니다. 하지만 소망은 있습니다. 주님이 그들을 포기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온전히 보지 못하는 그 사람의 눈에 주님이 다시금 안수하시자 그의 시력은 회복되었습니다. 그는 성해져서 모든 것을 환히 보게 된 것입니다. 그는 눈 뜬 사람이 되었습니다.


영의 눈을 떠라

여러분, 신앙이란 눈뜸의 체험입니다. 시력이 2.0인 사람은 먼 곳에 있는 작은 것도 잘 알아봅니다. 눈 좋은 사람을 보면 참 부럽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시력이라는 것은 대상의 속까지 들여다보지는 못합니다. 우리 몸 속을 들여다보려면 여러 가지 의료 장비를 이용해야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훌륭한 의료 장비라 해도 인간의 마음까지 들여다 볼 수는 없습니다. 우리 마음을 들여다보려면 '마음의 눈'(心眼)을 떠야 합니다. 우리 영혼을 들여다보려면 '영의 눈'(靈眼)을 떠야 합니다. 영안이 열리지 않으면 우리는 마땅히 보아야 할 것을 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늘을 나는 새를 보라고 하셨습니다. 들에 핀 꽃을 보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짓까부르며 하늘을 누비는 날개 달린 존재를 보라는 말이 아닙니다. 형형색색으로 피어있는 꽃의 아름다운 자태를 보라는 말도 아닙니다. 그 속에 담긴 하늘을 보라는 말입니다. 그들 속에 있는 하나님의 흔적을 보라는 말입니다.

영의 눈을 뜬 사람들의 삶을 잘 드러내주는 단어는 '경외'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놀라는 감각을 잃어버릴 때, 우러러보는 능력이 위축되었을 때 우리가 사는 세상은 장터일 뿐입니다. 먹고살기 위해 악다구니를 쓰는 사람들의 난장판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그야말로 납작해진 세상입니다. 하늘을 잃어버리고, 땅의 현실이라는 평면 속에서 삶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깊이가 없습니다. 생의 깊은 만족이 없습니다. 하늘과의 결속감정이 없는 삶은 불안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영의 눈을 떠야 합니다. 영의 눈을 뜬 사람들에게 세상은 어느 것도 당연하지 않습니다.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시8:3-4)


시인은 하늘을 보고, 달과 별들을 보면서 주님의 깊디깊은 사랑을 느낍니다. 이런 것을 가리켜 '아하 체험'(aha experience)이라 합니다. 영의 눈이 열리니 무심히 있는 밤하늘의 달과 별들조차 하나님의 사랑을 증언해주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바벨론 왕인 느부갓네살은 대제국의 지배자로서 자기의 위대함에 취해 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다스리는 분은 하나님이신 것을 깨닫도록 하기 위해 그의 정신을 혼미하게 하십니다. 그는 미치광이가 되어서 사람들에게 쫓겨나고, 들짐승처럼 삽니다.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기한이 찼을 때 그는 제 정신으로 돌아옵니다. 다니엘서는 그 대목을 인상깊게 전해줍니다.


그 기한이 차매 나 느부갓네살이 하늘을 우러러보았더니 내 총명이 다시 내게로 돌아온지라. 이에 내가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감사하며 영생하시는 자를 찬양하고 존경하였노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요 그 나라는 대대에 이르리로다(단4:34)


그의 총명이 돌아온 것은 "하늘을 우러러보았을 때"입니다. 참 절묘한 은유입니다. 이 말은 하늘에 대한 경외심을 되찾을 때 사람은 제 자리로 돌아오게 된다는 말이 아닙니까? 사람의 제 자리, 그것은 하나님께 대해 감사하는 자리요, 찬양하는 자리입니다.

벳새다의 그 불행했던 사나이도 이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리에 서게 되었습니다. 세상에 대한 원망은 하나님에 대한 감사로 바뀌었을 것입니다. 이전에 그의 십팔번이 "울려고 내가 왔던가" 아니면 "한 많은 이 세상 야속한 님아"였다면 이제 그의 노래는 "주님 사랑해요"로 바뀌었겠지요?


거룩한 삶의 기초

그런데 예수님은 그 행복한 사람에게 그 마을로 들어가지 말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십니다. '집', 그가 오랫동안 떠나왔던 곳입니다. 그가 희망의 노래를 불러야 할 곳은 바로 그곳이었던 것입니다. 열자(列子)라는 사람의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그는 명예욕을 쫓느라 스승의 근본적인 가르침을 잊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어느 날 세상의 뜬 명성에 아랑곳하지 않으면서도 깊은 진리 속에서 살아가는 스승 호자(壺子)와 만난 후 자기 삶의 부박함을 부끄러워합니다. 그는 배움의 첫 걸음도 내딛지 못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새로운 출발을 다짐합니다. 열자는 유명한 스승을 찾아 나서지 않았습니다. 그는 집으로 돌아가 3년 동안 집밖으로 나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못난 남편들처럼 자기는 글을 읽는다면서 아내 고생시킨 것이 아닙니다. 그는 아내를 위해 밥을 짓고, 돼지 먹이기를 사람 먹이듯 했다고 합니다. 무슨 짓인가 싶습니다. 하지만 그는 온갖 생명을 살리는 삶을 익힌 것입니다. 그렇게 소박함 속으로 돌아가 어지러움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자리에 나아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진리는 먼 곳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곳은 특별한 곳이 아닙니다.

주님과 만난 사람은 집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집은 우리의 일상입니다. 우리의 일상을 성스럽게 여기지 않는 진리는 진리일 수 없습니다. 가정이든, 직장이든, 교회든 우리의 삶이 이루어지는 곳에서 상처입은 생명을 보듬어 안고, 낙심한 심령을 북돋워주는 소박한 실천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이라는 것이 대체 무엇이겠습니까?

보아야 할 것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우리들입니다. 바리새인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조심하라는 말에 먹을 것 걱정이나 하는 우리들입니다. 주님의 손에 붙잡혀야 합니다. 주님과 함께 길을 걸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어루만지시는 주님의 손길을 깊이 느껴야 합니다. 하늘을 우러러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보게 될 것입니다. 총명이 돌아올 것입니다. 그때 우리의 일상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소박하지만 흔들리지 않는 생을 연습해야 합니다. 희망의 노래를 불러야 할 곳은 바로 우리의 비근(卑近)한 삶의 자리인 것입니다.

등 록 날 짜 1970년 01월 01일 09시 33분 21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