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36. 북돋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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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롬15:1-7
설교일시 200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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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돋는 사람들
롬15:1-7
(2001/9/9)


쏘로우의 콩밭

오늘 본문을 묵상하는데 엉뚱하게도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월든}이라는 책이 떠올랐습니다. 1817년에 태어난 그는 하버드 대학을 졸업한 후 메사추세츠 주에 있는 한적한 월든 호숫가로 들어가 지급자족하는 삶을 살면서 아주 소중한 글을 많이 남긴 문필가입니다. 마하트마 간디의 비폭력 운동도 그에게서 받은 사상적 감화였다고 할 정도로 그는 위대한 사상가이기도 했습니다. {월든}에서 쏘로우는 자기가 가꾸었던 콩밭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콩두둑의 한쪽 끝에는 떡갈나무 관목의 숲이 있어서 그 그늘에서 쉴 수 있었다. 다른 끝에는 검은딸기밭이 있었는데, 김을 한 차례 매고 돌아올 때마다 푸른색의 딸기들은 한층 더 색깔이 진해져 있었다. 나의 매일의 일과는 풀들을 뽑아버리고 콩대 주위에 새 흙을 덮어주어 격려하며, 이 황색의 흙이 자신의 여름 생각을 쑥이나 개밀이나 피 같은 잡초가 아니라 콩잎으로 나타내도록 설득하며, 그리하여 대지가 '풀!' 하고 외치는 대신 '콩!' 하고 외치도록 만드는 일이었다.({월든}, 185쪽)


그는 일상적인 노동을 즐기고 있습니다. 콩밭을 일구다가 쉴 수 있는 그늘이 있어서 좋고, 김을 매고 돌아서면 벌써 색깔이 달라지는 딸기를 볼 수 있어서 좋은 것입니다. 쏘로우는 풀을 뽑고 콩대 주위에 흙을 북돋워주는 것을 콩대를 격려하는 것이라 말합니다. 그는 또 황색의 흙을 설득해 잡초가 아니라 콩잎을 내도록 합니다. 그래서 자라나는 '콩'은 흙의 자기 표현이요 긍정이 됩니다.


은혜로운 말 한마디

저는 흙을 설득하고 격려해 아름다운 소출을 내도록 돕는 쏘로우의 모습에서 아름다운 삶의 모델을 봅니다. 흙이 쓸려나가 뿌리가 드러난 식물에 흙을 덮어주고 다독거려 격려하듯이, 삶에 지치고 낙심한 이들을 보듬어안는 사람들의 모습이야말로 주님이 원하시는 삶이 아닐까요? 하지만 우리는 스스로 지쳐 있어서 다른 일을 돌볼 염(念)을 내지 못합니다. 항상 해야 할 많은 일에 치여 살아갑니다. 일을 마치고 나서 그늘에서 잠시 쉴라치면 또 다른 일감이 우리 옷자락을 잡아당깁니다. 그래서 우리의 일은 창조적 노동이 되지 못하고 마지못해 하는 노동, 곧 소외된 노동이 되고 맙니다. 그러니 우리 속에 남을 위한 여백이 없는 것은 불문가지입니다. 내 짐이 무거워 비틀거립니다. 그런데 신비한 것은 우리의 존재를 인정해주는 말 한 마디만 들으면 언제 그랬냐 싶게 마음의 시름을 털어내기도 합니다. 어느 자매의 고백입니다.


공연히 웃음이 나오고 만나는 이에게마다 장난을 걸고 싶은
기분 좋은 아침입니다.
오늘도 어제와 다를 것 없는 날인데도 이토록 기분이 좋은 건
동료들에게 들었던 격려의 말 때문입니다.
복잡한 일을 처리하느라 주위를 돌아볼 틈도 없이
한 달을 달려왔는데 남은 건 육신의 피곤함뿐이었습니다.
제가 해낸 일이 잘한 건지 남들에게도 필요한 일인지
자신이 없고 오직 일에만 매달려 끌려온 심정이었습니다.
잘했던데. 아주 근사해.
밤잠도 제대로 못 잤을 거야.
한마디 한마디 감사로움을 표하는 그들의 목소리에
한 달의 고생이 말씀히 씻겨갔습니다.


이 자매의 동료들은 말 한마디로 행복을 만들어냈습니다. 우리는 말 한마디로 천국을 만들기도 하고, 지옥을 만들기도 합니다. 말은 독약이 되어 사람을 해치기도 하고, 해독제가 되어 사람을 살리기도 합니다. 시편 기자는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19:14) 하고 기원했습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말들이 주님께 열납되도록 하는 것, 그것이 영성생활의 근본이 아닌가 싶습니다. 위의 자매는 따뜻한 한 마디 말에 한 달여의 고생과 시름을 잊었습니다. 이 글의 뒷부분에서 이 자매는 자기의 못남을 발견하고 부끄러워합니다. 자기는 다 잘하고 있는데 잘못되는 것은 다 남 탓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던 것입니다. 세상이 각박하다고 불평만 하면서 자기가 세상을 메마르게 하고 있다는 사실은 잊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자기 발견과 새로운 삶에 대한 눈뜸, 친절한 격려와 감사의 말 한 마디가 해낸 일입니다.

상대방을 찬찬히 바라보면서 그의 좋은 점과 유능한 점을 발견해내고 그것을 잘 표현해 주십시오.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패배주의적인 생각에 젖어 사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런 이들은 자기들이 받은 달란트를 땅에 묻어버리는 사람이 되기 쉽습니다. 칭찬하고 격려하는 것은 따라서 하나님의 일을 돕는 일이기도 합니다.


심려할 줄 아는 사람

우리는 한 영혼이 천하보다도 귀하다고 배웠습니다. 또 그렇게 고백해왔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앞에 있는 한 영혼을 마음을 다해 돌보지는 못했습니다. 나의 격려가 필요한 사람에게 다가서지 못했고, 낙심한 영혼을 북돋워주기 위해 그의 곁에 머물지 못했습니다. 바빠서일까요?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자면 그것이 나의 마땅한 책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그들을 우리 앞에 보내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들을 돌보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다가 학교문을 박차고 나온 아이들이 많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봅니다. 물론 그들은 모범생이 아닙니다.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틀 안에 좀처럼 들어오려 하지 않는 말썽꾸러기들입니다. 좋게 보면 개성적인 아이들입니다. 그렇지만 남다른 개성은 무질서해 보입니다. 그래서 질서를 대변하는 이들은 그들을 몰아냅니다. 하지만 그들을 끌어안으려고 노력하는 선생님들이 있습니다. 천하의 말썽꾸러기들을 모아서 그들에게 삶의 맛을 돌려주려고 노력하는 선생님들 말입니다. 학생들에게 자기 존중감을 되찾게 해주려고 땀 흘리고, 눈물 흘리고, 학생들과 함께 뒹구는 선생님들을 보면서 저는 깊이 감동했습니다. 그들은 틀림없는 예수님의 벗들이었습니다. 세상이 각박하다고는 하지만 우리 주변에는 이렇게 천사들이 많이 있습니다. 인간적인 존엄성을 잃어버린 채 무너져내리는 사람들의 버팀목이 되어주려고 애쓰는 사람들 말입니다. 그들은 참 거룩한 이들입니다. 아마존의 숲이 있어 우리가 숨을 쉬고 살듯이 이런 이들이 있어 이 세상은 그래도 유지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그들만 그래야 하고, 우리는 아니랍니까? 왜 우리는 관객이 되어 그들에게 박수만 치고 있나요? 우리도 이제 이 아름다운 일들에 동참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얼이 살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는 성도의 삶을 단순하게 요약하고 있습니다.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찌니라.(롬15:1-2)


약한 이의 힘이 되어주는 것, 이웃에게 기쁨을 안겨주는 것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당위'입니다. 우리가 성도라면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사람의 사람다움이란 다른 이를 위해 마음쓰는 데서 나타납니다(心慮). 지하철에서 남을 위해 좋은 자리를 남겨두고(다리를 벌리고 앉는다든지, 의자 위에 물건을 모시고 가는 일 따위도), 공공장소에서 목소리를 낮추고(휴대폰 예절), 직장에서 동료들의 불편을 해소해주기 위해 마음 쓰고, 내가 일상적으로 누릴 수 있는 권리를 자발적으로 포기하는 것…작지만 이런 일들이 우리 몸에 밸 때 우리는 좀 더 영성적으로 성숙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

우리가 그렇게 해야 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바울 사도는 간명하게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다"(15:3). 즉 그리스도는 사사로운 욕망에 굴복하지 않으셨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라고 어찌 편하고 싶지 않으셨겠어요. 하지만 예수님은 거듭거듭 하나님의 뜻 앞에 자기를 세우십니다. 머리를 곧게 드신 것(頭直)이지요. 예수님이 항상 당당하실 수 있었던 것은 사욕을 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다른 이를 배려하다가 스스로 굴욕감을 느낄 때도 있습니다. 나의 선의에 대해 반응이 없는 사람들을 보면 화가 나기도 합니다. 공격적으로 자기 욕망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보면 저게 아니지 하다가도, 어느 순간 짧은 인생 내가 너무 소극적으로 사는 게 아닌가 의구심을 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도 온갖 모욕을 다 참으셨습니다. 옷을 벗기우고, 갈대를 손에 들고,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침 뱉음을 당하고, 갈대로 머리를 맞기도 하셨습니다(마27:28-30). 하지만 예수님은 그것 때문에 굴욕감을 느끼지는 않으셨습니다. 당신의 손에 못질을 하는 군인들과 조롱하는 사람들을 용서해달라고 기도하신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인류의 미움과 적의를 온 몸으로 받았지만, 그것을 미움으로 되갚지 않고 사랑으로 바꾸어내셨습니다. 이게 십자가의 신비입니다.


진정한 주체가 되는 길

바울 사도는 로마에 있는 성도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뜻이 같게 하여 주기를, 그리고 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기를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 무엇인지를 가르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성도들이 서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나와는 생각도 다르고, 처해 있는 입장도 다른 이들이 있습니다. 살아온 여정이 다르니 다른 것은 어쩌면 당연합니다. 하지만 그 다름이 우리 사이를 갈라놓는다면 문제입니다. 레비나스라는 철학자는 다른 것을 다르게 놔두지 못하고 같은 것의 틀 속에 집어넣으려 하는 것은 폭력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서로를 진심으로 존중하고 받아들이려 할 때 우리는 더 큰 사람이 됩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내가 최고'라고 떠드는 못난 자아가 사라져야 합니다. 남에게 평화를 주는 사람은 예외없이 겸손하고 온유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자아'의 집착에서 해방되었기에 다른 이들과 잘 지낼 수 있고, 다른 이들을 진심으로 존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크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명심해야 합니다. 사람은 누군가를 섬기기 위해 자기를 낮출 때(subjection) 비로소 인간다운 주체(subject)가 됩니다.

지금까지의 우리 삶을 돌아보십시오. 우리는 다른 이들에게 살아갈 용기와 희망을 북돋는 사람으로 살아왔습니까? 아니면 그들에게서 그런 소중한 것들을 덜어내고 헐어내는 사람으로 살아왔습니까? 주님은 바울을 통해 이웃을 기쁘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선을 이루는 길이고 덕을 세우는 길이라고 말입니다. 누군가를 기쁘게 하기 위해 마음 쓸 때, 누군가의 버팀목이 되어 주려고 몸을 낮출 때 주님은 우리에게 더 큰 기쁨을 주시고, 더 큰 버팀목이 되어 우리를 세워 주실 것입니다. 형제와 자매의 필요에 응답할 태세를 갖추고 살 때 우리는 하늘의 신비에 눈뜨게 될 것입니다.

등 록 날 짜 1970년 01월 01일 09시 33분 21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