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37. 평화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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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마5:38-42
설교일시 200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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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길
마5:38-42
(2001/9/16)


위협받고 있는 평화

미국의 무역센터 건물과 팬타곤을 강타한 테러 행위는 평화로운 세상을 꿈꾸는 우리 모두의 소망에 찬물을 끼얹었습니다. 미국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는 세계 질서에 대해 반감을 품고 있는 이들이 많음을 우리는 압니다. 냉전 이후 초강대국으로 군림하게 된 미국의 고압적인 외교 자세가 세계인들의 분노를 일으키고 있음도 알고 있습니다. 언젠가 극단적인 성향의 사람들이 미국을 상대로 국지적인 테러를 감행하리라는 것도 예측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번 사건은 우리의 상상력을 훨씬 뛰어넘었습니다. 활기차게 아침을 맞이한 사람들이 각자의 업무를 시작하려던 바로 그때 그들은 영문도 모른 채 죽어갔습니다. 영국의 가디언지의 리포터 폴리 토인비(Polly Toynbee)는 영화 속에서만 보던 가상 현실이 이제 눈 앞의 현실이 되었다면서 "화염에 휩싸인 채 무너져내리는 쌍둥이 건물은 카드로 만든 것이 아니었고, 건물 밖으로 몸을 던진 사람들은 스턴트맨이 아니었고, 공포에 질려 터져나온 단말마의 비명은 연기가 아니었다. 누가 이 광경을 눈물 없이 볼 수 있겠는가? 미국은 결코 이전과 같은 나라일 수 없을 것이다"고 썼습니다(2001년 9월 12일자).

평화가 위협받고 있습니다. 미국은 보복을 다짐하고 있습니다. 폭력이 꼬리를 물 것입니다. 상처받은 미국의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서 핵무기의 사용도 고려하고 있다고 합니다. 테러리스트들은 물론이고, 그들을 비호하는 세력에 대해서도 예고없이 공격을 감행하겠다고 합니다. 광기가 이성을 누르는 사태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라멕의 노래가 진군가처럼 울려퍼지고 있습니다.


"아다와 씰라여 내 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창4:23)


많은 사람들이 미움과 적대감 속에서 죽어갈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그리고 싶지 않은 지옥도입니다. 무너진 건물의 잔해와 찢기운 시신 사이에서 사탄은 이를 드러내고 웃을 겁니다. 문득 예루살렘을 보시며 우시던 예수님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눅19:41-42)


또 바벨론의 침공으로 철저하게 파괴된 예루살렘을 보면서 예레미야가 불렀던 애가가 또렷하게 들려왔습니다.


"무릇 지나가는 자여 너희에게는 관계가 없는가. 내게 임한 근심 같은 근심이 있는가 볼찌어다. 여호와께서 진노하신 날에 나를 괴롭게 하신 것이로다."(애1:12)


사람의 죄가 온 누리에 가득 차고 그 마음에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한 것을 보시고 하나님은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셨다"(창6:6)는 구절도 아프게 상기됩니다.


비저항의 힘

이와 같은 때에 우리는 바람과 바다를 꾸짖어 풍랑을 잠잠케 하셨던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스스로 '길'이라 하신 예수님께 이 곤경을 벗어날 길이 있겠는지 여쭤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근본적인 메시지에 귀를 기울입니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옳은 말씀인 줄은 압니다. 그게 평화의 길이니까요. 하지만 너무 한가로운 말씀 같아 자꾸만 반발심이 생깁니다.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명백한 폭력 앞에서도 침묵하고, 한 술 더 떠서 그들을 선대하는 것이 정말 평화의 길이냐는 의문이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노예적인 굴종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명백한 불의와 폭력을 보면서도 약하기 때문에 저항하지 못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죄입니다. 이때의 침묵은 죄에 대한 묵인이며, 웃음 띤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는 것은 구차한 생존을 위한 굴종입니다. 그리고 악을 행하는 자들은 우리의 비저항을 통해 아무 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불의에 대해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만이 진정한 비저항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힘이 있지만 그 힘의 사용을 포기하거나 자제하는 것은 사랑의 행위입니다.

내 뺨을 때리는 자가 나보다 강하기 때문에 속으로 분을 삼키면서 다른 뺨을 돌려대거나, 부당하게 내 것을 빼앗아가려는 사람이 권세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내 몫을 내주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오직 내가 그보다 정신적으로 높은 자리에 서있을 때만 비폭력이나 비저항은 효과를 발휘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잡으러 온 사람들을 보고 흥분한 제자들이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베었을 때 제자들을 꾸짖으시면서 그의 귀를 어루만져 낫게 해주셨습니다(눅22:51). 십자가에서 조롱하는 무리들을 내려다보면서 그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십자가 밑에 서있던 백부장이 한 말을 기억하십니까?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눅23:47).


우리 속의 어둠

세상은 참 요란합니다. 이해와 이해가, 성격과 성격이, 인종과 인종이, 민족과 민족이, 신앙과 신앙이 서로 부딪는 데서 나는 소리입니다. 평화의 길은 정말 없는 것일까요? 평화의 길은 있습니다. 사회의 시스템을 바꾸고, 국제적인 규약을 새롭게 하는 것은 오히려 부차적인 문제입니다. 세계관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근원적인 폭력이 내 속에 있음을 직시하고, 그 어둠을 문제삼기 시작할 때 우리는 평화의 길에 들어서게 될 것입니다. 폭력이란 무엇입니까? 나의 의지나 생각을 물리적·정신적 강제를 통해 다른 이에게 주입하거나 관철시키려는 것입니다. 폭력이 기대고 있는 것은 '힘'입니다. 사람들은 '칼'을 손에 쥐어주면 무엇이든 찔러보고 싶어합니다. 완장을 둘러주면 무력한 사람에게 소리라도 한 번 지르려고 합니다. 그런 세상에서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이게 어찌보면 세상 사람들이 당연시하는 질서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질서를 전복시키려 하십니다. 힘있는 사람은 그 힘으로 다른 이를 섬기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힘' 대신 '사랑'을 우리 삶의 근본 원리로 삼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쉽지 않습니다. 힘이 주는 매력은 대단합니다. 사람들은 힘을 얻기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운동을 해서 근육이 잘 발달한 사람들은 어떻게든 그 근육을 다른 이에게 과시해 보여주고 싶어합니다. 공부를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을 나오려는 것도 그것이 곧 힘이기 때문입니다. 연줄을 놓치지 않으려고 각종 모임에 충성을 다하는 것도 그 속에 힘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힘의 논리에 따라 살아가는 것은 결국은 우리 속에 있는 어둠을 키우는 일이 되고 맙니다. 학원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왕따 현상'은 우리 사회가 얼마나 힘의 논리에 의해 지배되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가장 약한 사람을 골라 여럿이 그를 괴롭히는 데서 쾌감을 느낀다는 것은 그들이 영혼이 얼마나 심하게 뒤틀려있나를 보여줍니다.


평화 익히기

우리 속에 있는 폭력의 욕구에 굴복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두 가지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첫째, 음습한 욕망이나 부정적인 생각까지도 하나님의 은총 아래 내놓으십시오. 우리가 주님께 바쳐야 할 것은 자랑스러운 일만이 아닙니다. 부끄러운 생각이나 마음의 경향까지도 주님께 내놓아야 합니다. 흉과 허물을 나눌 수 있을 때 진정한 우정이 자라나는 것처럼, 우리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생각들을 하나님께 내놓아야 합니다. 누군가에 대한 미움, 분노, 멸시의 감정, 시기와 질투…. 우리는 때로 이런 것이 우리 속에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병원에 간 환자가 의사 선생님께 자기의 증상을 다 알려야 하듯이 주님께 우리의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드리는 데서 영혼의 치유는 시작됩니다. 나의 모습을 내가 적나라하게 볼 때 우리는 그 부정적인 감정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게 됩니다. 주님이 그런 힘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둘째, 다른 이들과 함께 사는 법을 익히기 위해서 손해보기를 연습하십시오. 세상 대부분의 싸움은 손해보지 않으려는 데서 비롯됩니다. 이해가 충돌하고, 자존심이 충돌합니다. 다른 이들의 행복을 위해서 나의 욕망을 덜어내는 연습은 아무리 해도 좋은 일입니다. 남들을 위해 늘 손해보라고는 하지 않겠습니다. 우선 덜 이기적이려고 애쓰십시오. 그게 출발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 욕망과 싸워야 합니다. 독점욕은 평화의 적입니다. 남의 살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 독선과 오만이 우리 속에 어둠을 키웁니다. 빈곤과 질병 속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몫까지도 가로채 누리고 있는 사람들을 미워하게 마련입니다. 저들의 원망과 한숨이 세상을 어둡게 만듭니다. '平和'는 '밥을 골고루 나누는 데서 비롯'됩니다. 얼마 전 우리 나라 일간 신문을 보면서 화가 났습니다. 한국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들은 한국군의 1/20밖에 안 되지만, 그들이 사용하는 전기량은 한국군의 75%에 달하고, 전기료는 절반 밖에 내지 않는다는 기사였습니다. 이 통계가 단적으로 미국식 생활방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팍스 아메리카나'는 허구일 뿐입니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해서 무차별한 테러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대응해야 하겠지만, 진정한 평화의 길을 가로막고 있는 미국식 삶의 방식은 청산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수많은 무고한 생명들이 흘린 피가 겨우 미국의 전쟁 영웅들을 만들어내는 것에 그쳐서야 되겠습니까? 전대미문의 이 재앙이 오히려 인류의 정신적 진보를 위한 디딤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속에 있는 어둠을 인정하고, 남들의 살 권리를 진심으로 존중할 때 우리는 예수께서 앞서 걸어가신 평화의 길을 걷게 될 것입니다. 길이란 처음부터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럿이 걸어감으로 생기는 것이라 들었습니다. 평화없는 세상에서 우리는 평화의 길을 택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먼저 평화의 사람이 될 때 우리 주변도 평화로와질 것입니다. 우리가 삶을 통해 밝히는 평화의 작은 촛불이 길 잃은 사람들의 희망이 된다면 얼마나 행복한 일입니까?

등 록 날 짜 1970년 01월 01일 09시 33분 21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