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38. 원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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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일시 200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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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복(原福)
창1:26-31
(2001/9/23)


며칠 전에 저는 우리 교회 출신의 한 교인으로부터 편지를 받았습니다. 그는 대전에 있는 어떤 교회에서 청년들을 지도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한 청년의 질문이 난감해서 제게 조언을 구하는 편지를 한 것입니다. 그 질문은 대개 이런 것이었습니다.

1. 하나님은 왜 사람을 창조하셨는가?
2. 하나님은 천사와 마귀도 창조하셨는가?
3. 하나님은 지금도 인류 하나 하나를 창조하시는가?
4. 인간은 오로지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고 하는 데 그렇다면 인간에게 자유의지는 없는가?

이 질문이 지도 교사를 골탕먹이기 위한 질문이 아니라면 질문자는 지금 심각한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세상은 뒤숭숭하고, 사람들은 날이 갈수록 흉포해지고 있습니다. '이게 대체 뭐냐? 하나님이 계시다면 인간 세상이 이럴 수 있나? 그리고 나는 대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거지?' 이건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어쩌면 우리 모두가 궁금해하는 문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성심껏 이 물음에 답해 보고 싶습니다.


나는 하나의 희미한 물음표

먼저 나를 '왜' 창조하셨는가 하는 문제는 객관적인 해답을 제시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그럴싸하게 설명도 그 학생을 만족시킬 수 없을 것입니다. 고개를 끄덕일 수는 있겠지요? 하지만 마음 깊은 곳까지 후련해지지는 않을 겁니다. 왜냐하면 이 질문은 실존적인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실존적인 질문에는 객관적인 정답이 없습니다. 누군가가 '너 왜 사니?' 하는 물음에 '돈 많이 벌려고' 하고 대답한다면 돈버는 것이 그에게는 가장 소중한 일입니다. '즐기려구' 하고 대답하는 경우도 마찬가지구요. 우리는 이런 대답을 하는 사람을 딱하게 여길 수는 있지만 그의 대답을 틀렸다고만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와 상황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실존적인 질문에 대한 답은 누가 제시할 수 없습니다. 자기 스스로가 찾아야 합니다. 그것은 결단을 요구합니다. 어쩌면 인생이란 그 '왜'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인지도 모릅니다. 김승희 시인의 시가 생각납니다.


나는 하나의 희미한 물음표,
어느 하늘, 덧없는 공책 위에,
신이 쓰다버린 모호한 문장처럼
영원히 결론에 이르지
못하는 나는 하나의 병든 물음표,
……
나는 하나의 초라한 물음표,
신의 나라에는, 물음표 가진 문장이
필요없다 하여서,
나는 하나의
더디 지워지는……울음표……
―김승희, [신의 연습장 위에] 중에서


시인은 자신이 마치 '신이 쓰다 버린 모호한 문장' 같다고 말합니다. 모호하기 때문에 그는 항상 하나님 앞에 물음표로 섭니다. 사실 인생이 그렇게 분명하지를 않잖아요? 선과 악이 뒤섞여있고, 참과 거짓이 자리바꿈하고 있지 않아요? 그런데 시인은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물음표 가진 문장이 필요없다고 들었기에 울음표로 하늘 앞에 서있습니다. 그 심정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

어느 분에게 물어봤습니다. "하나님이 왜 우리를 만드셨을까요?"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심드렁하게 대답하더군요. "심심해서요." 그 말을 듣고 웃었습니다. 하지만 전혀 틀린 말만도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인간을 당신의 형상을 따라 만드셨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을 하나님의 어떤 특질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는 말에는, 사람이 하나님과 의사 소통할 수 있는 존재라는 뜻도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거기에 응답합니다. 하나님의 부름에 응답하여,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 마주 선 존재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은 그에게 두 가지를 명하십니다. 하나는 모든 피조물을 잘 다스리라는 것입니다(왕적 존재). 이때의 다스림은 내 마음대로 함부로 해도 좋다는 말이 아닙니다. 고대 세계에서 왕은 '조정자'로 이해되었습니다. 즉 세상에 있는 온갖 것들이 조화를 이루며 살도록 돌보는 책임이 사람에게 주어졌다는 말입니다. 너무 강한 것은 조금 누르고, 약한 것은 북돋워주면서 자기 몫의 생명을 충분히 누리며 살도록 돕는 책임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인간이 절대 강자로 군림함으로써 다른 피조물들의 살 권리를 훼손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이제 '조정자'로서의 역할을 잊어버리고, '지배자'로 군림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생물 종들이 지구상에서 영원히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하나님의 계속적인 창조

하나님의 두 번째 명령은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계속적인 창조와 관련된 것입니다. 이것은 명령이라기보다는 축복 선언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비옥한 땅이 아름다운 소출을 많이 내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에게 세대를 이어갈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자녀를 낳아 세대를 이어가는 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자연적인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앞에서 질문을 던졌던 학생은 하나님은 지금도 사람 하나 하나를 창조하시냐고 물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부모라는 매개를 통해 우리를 세상에 보내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고는 아무도 이 세상에 올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것은 이미 축복입니다.

물론 세상에는 태어날 때부터 부모로부터 버림을 받는 아이들도 있습니다. 천덕꾸러기로 살아가는 아이들도 있습니다.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는 이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명심하십시오. 그들이 이 세상에 온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아무도 그들의 생명을 함부로 다룰 수 없습니다. 그들도 역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런 이들을 대할 때 생각을 달리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9장에서 제자들은 날 때부터 앞 못보는 이를 보고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이 사람이 이렇게 된 것은 자기의 죄 때문입니까? 조상들의 죄 때문입니까?" 예수님은 이 질문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합니다. 누구의 죄 때문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를 통해 하나님이 하시려는 일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그가 온전한 인격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만난 그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에 대한 증언자로 우리 가운데 우뚝 서있습니다.


아름다운 세상에 들려온 파열음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 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지으시고는 그들이 먹을 것을 지정해 주셨습니다. 땅에서 나는 모든 채소와 열매가 그것입니다. 육식은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아직은 세상이 죄로 인해 흉포해지기 전이었던 것입니다. 이사야는 맹수들과 연약한 짐승들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세상을 꿈꾸었습니다(11:6-9). 세상에 죄와 폭력이 들어오면서 사람의 식생활도 바뀌었습니다. 육식 문화로 말입니다. 어느 분은 사람의 입을 가리켜 무덤이라 했습니다. 수많은 생명이 그 속으로 들어갔으니 옳은 말이긴 합니다. 생명은 생명을 먹고 살 수밖에 없습니다. 문제는 나를 위해 죽어간 그 생명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 마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생을 대하는 태도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소박한 밥상 앞에서 경건하게 두 손을 모으는 사람은 거룩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려면 밥상에서부터 새로운 삶을 시작해야 합니다. 밥 한 톨조차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생각하면 우리는 함부로 음식을 낭비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신 후 남은 음식을 다 거두라고 하신 것은 우리가 먹는 모든 음식이 하늘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먹을거리까지 지정해 주시고 하나님은 당신의 뜻대로 이루어진 세상을 둘러보십니다. 성서 기자는 하나님의 마음을 이렇게 헤아려 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1:31) 히브리어로 "좋았다"는 말은 '선함'을 뜻하기도 하고 '아름다움'을 뜻하기도 합니다. 저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던 그 세계를 "있어야 할 것이 다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상태"라고 생각해 봅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사람만은 자기의 본분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있어야 할 자리를 벗어났다는 말입니다. 문제는 인간의 자유였습니다. 생각하고 결단하고 응답하도록 주신 자유를 가지고 그는 하나님을 거역하는 길을 택했습니다.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에 한계가 있음을 알 때 자유는 복입니다. 하지만 그 한계를 무시할 때 자유는 화를 자초합니다. 사람은 대개 하나님께서 사랑의 선물로 주신 자유를 가지고 비루한 욕정의 노예가 될 때가 많습니다. 쾌락을 위하여, 권력을 위하여, 돈을 위하여 사람들은 고귀한 인간성을 팔아버릴 때가 많습니다. 뱀은 지금도 자유롭게 태어난 우리를 하나님을 거역하는 자리로 유혹하고 있습니다.

뱀이 인류를 유혹하면서 한 말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다"(You shall be as God). 지금도 사람은 뱀의 유혹에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자기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고, 무한한 권력을 휘두르려 합니다. 미국이 테러에 대한 전쟁을 선언하고, 그 작전명을 "무한한 정의"(Infinite Justice)로 정했답니다. 이것은 교만한 발상입니다. 하나님이 아닌 누가 감히 무한한 정의를 말할 수 있단 말입니까. 나의 정의가 다른 이에게는 불의가 될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자기의 분수를 지키지 않는 것, 즉 '휴브리스'(hubris)를 가리켜 가장 큰 죄라고 합니다.


빛과 어둠 사이에서

하나님은 세상에 악을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악마도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현실적으로 우리는 날마다 심각한 악에 직면한 채 살아갑니다. 우리는 왜 세상이 이렇게 됐냐고 따지고 싶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질문을 돌려주십니다. 세상이 왜 이 지경이 되었느냐구요. 세상의 악과 악마를 만든 것은 사람입니다. 악마는 우리 속에 있는 교만과 미움과 죄가 형태화된 것입니다. 악마를 키우고 있는 것은 우리들입니다. 어거스틴은 세상에 있는 악의 현실 때문에 번민했습니다. 선하신 하나님이 악을 만드시지는 않았을 테니까요. 오랜 방황 끝에 어거스틴이 이른 결론은 이것입니다. "악이란 선의 결핍이다." 무슨 말입니까? 어두운 방에 불을 켜면 금세 밝아집니다. 어둠이 빛을 이길 수는 없습니다. 아침이 되면 어둠은 사라집니다. 새벽닭 울음소리에 도깨비는 물러가도록 되어 있습니다. 결국 세상의 문제는 빛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빛은 사랑이고 이해이고 포용입니다. 다시 한 번 우리는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새삼스럽게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를 창조하시고, 복을 주어 살게 하신 하나님의 원복(原福)을 원죄(原罪)로 바꾸는, 이 도착된 교환이 우리 인류의 비극입니다. 이제부터라도 어둠이 아니라 빛을 선택해야 합니다. 주님은 지금 우리를 본래의 자리로 부르고 계십니다.

등 록 날 짜 1970년 01월 01일 09시 33분 21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