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39. 뿌리 살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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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요15:4-8
설교일시 200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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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 살피기
요15:4-8
(2001/9/30)


꼴찌두 괜찮여

추석을 앞두고 세상이 갑자기 밝아진 것 같아요. 거리를 걷는 사람들의 표정도 다소 밝아진 듯합니다. 예전에는 선물 꾸러미를 들고 가는 사람들을 보면 왠지 촌스러워 보였는데, 이제는 그게 참 좋아 보여요. 신광학교에서 축제를 하는지 아이들의 함성이 담을 넘어 들려오는 데 그게 싫지가 않더군요. 누구에게 그 이야기를 했더니 나이가 든 증거래요. 담장 밖에서 학교 안을 기웃거리다가 옛날 운동회 때 생각이 났어요. 저는 달리기를 잘 못했습니다. 출발 선상에만 서면 가슴이 왜 그리 두근거렸는지 모르겠어요. 그래도 8명이 뛰면 4등은 했어요. 3등을 해서 상 받는 아이들 줄에 서보는 게 내 소원이었지만 그 소원을 이룬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아마 저하고 비슷한 경험을 하신 분들이 많으실 거예요. 하지만 어때요. 달리기 못한다고 못사는 것은 아니잖아요?

동화 작가인 강정규님의 작품을 보다가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는 운동회 날 달리기만 하면 늘 꼴찌였대요. 1학년부터 5학년까지는. 그런데 6학년 때 이변이 일어났어요. 열심히 앞만 보고 달리는 데 관중석에서 할머니의 음성이 들리더래요.
"일등이다. 우리 잉규(仁圭)가 일등여!"
놀라서 둘러보니 그는 분명히 맨 앞에서 뛰고 있더랍니다. 그래서 더욱 이를 옹물고, 상을 찌푸리고, 두 주먹을 쥐고 뛰었어요. 그런데 들어와서 보니까 자기 뒤를 바싹 뒤쫓고 있던 아이들이 여덟 명이더래요. 그 다음 조였던 것이지요. 그날 그렇게 일등(?)을 하고 부슬부슬 내리는 비를 맞으며 집으로 가는 데 할머니가 위로삼아 말씀하시더래요.
"천천히 가그라, 꼴찌두 괜찮여. 서둘다 자빠지면 너만 다쳐. 암만 늦게 가두 네 몫은 있능겨. 앞서 간 애들이 다 골라 간 것 같어두, 남은 네 몫이 의외루 실속있을 수 있능겨, 잉규야."


순례절기의 속뜻

어쩌면 작가는 삶이 고달플 때마다 할머니의 그 말씀을 떠올리면서 마음을 가다듬었나 봅니다. 그러니까 할머니의 말씀을 그렇게 생생하게 기억하겠지요? 현실은 우리를 정신없이 밀어붙입니다. 하나의 과업을 채 마치기도 전에 또 다른 일감이 우리를 기다립니다. 그런데 그렇게 숨차게 달려간 대가로 우리가 얻는 것이라는 게 별 거 아니에요. 다소의 경제적 여유? 잘난 사람이라는 평판? 남보다 앞서 간다는 자부심? 그런데 그것을 얻기 위해 우리가 포기한 것들은 무엇이지요? 마음의 여유, 이웃들과의 다정하고 한가로운 대화, 자연과의 교감, 하나님과의 깊은 만남? 그렇다면 득보다 실이 더 많은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가끔 우리는 멈추어 서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의 삶을 찬찬히 돌아보아야 합니다. 옛사람들은 그런 장치들을 마련해 놓고 살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의 삼대 절기를 지켰습니다. 다 농사 절기와 관련된 축제이지만, 유대인들은 그것을 자기들의 역사적 경험과 연결시켰습니다. 유월절은 본래 봄이 되어 새로운 목초지를 찾아 떠나던 유목민들이 양을 잡아 신에게 바치던 관습이었는데 그것이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과 연결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유월절이 되면 자기들을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은총을 기억하며 그 명절을 지켰습니다. 오순절(칠칠절, 맥추절)은 밀 추수를 마친 후에 지키는 명절인데, 유대인들은 그들이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은 사건과 연결시켜 그 절기를 지켰습니다. 자기들은 하나님과 계약을 맺은 거룩한 백성이라는 사실을 상기하는 것이지요. 초막절(수장절)은 가을걷이를 끝낸 후에 지키는 명절인데, 유대인들은 자기 조상들이 광야에서 초막생활을 하던 것을 기억하기 위해 한 주간 동안 초막에서 생활을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런 삶의 축제들을 통해 자기의 뿌리를 돌아보고, 자기 삶의 정체성을 재확인하곤 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순례의 절기가 두 번 있습니다. 설날과 추석입니다. 이 때가 되면 귀성행렬이 줄을 잇습니다. 설날은 신년 축제이니까 그렇다치더라도 추석은 그야말로 우리의 뿌리를 돌아보는 중요한 명절입니다. 풍요로움을 누리도록 해주신 하늘에 감사하고, 흩어져 살던 혈연들이 모두 모여 자기들의 뿌리를 재확인하는 명절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성묘를 하면서 자기들을 낳아주신 조상들의 은덕을 기리고 자기의 삶을 돌아봅니다. 추석을 가리켜 '산 자와 죽은 자'의 공동체를 새삼 확인하고 재현하는 날이라고 하는데 참 옳은 말씀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추석은 우리가 좀 더 성숙한 존재로 거듭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이런 좋은 날, 가족들끼리 모여 화투를 치거나, 정치 이야기로 핏대를 올리는 일만은 그만 두었으면 좋겠습니다. 귀성의 명절이 우리에게 주어진 까닭은 한 마디로 우리 삶의 뿌리를 살피라는 부름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뿌리와 가지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이들의 삶을 포도나무에 빗대어 설명하고 계십니다. 당신이 포도나무라면 우리들은 가지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포도나무 없는 가지는 있을 수 없지요? 가지 없는 포도나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포도나무와 가지는 둘이면서 하나이고, 하나이면서 둘입니다. 포도나무와 가지는 이렇게 서로에게 속해 있습니다. 이게 바로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하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교만해서는 안 됩니다. 가지보다는 역시 뿌리가 먼저입니다. 뿌리의 활동이 없다면 가지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뿌리가 만일 '나는 왜 남들의 눈에 뜨이지도 않는 이 습한 땅 속에서 죽어라 하고 일해야 하나' 탄식하면서 일을 멈춘다면 가지는 마를 수밖에 없습니다. 심장이 쉼 없는 일에 싫증이 나서 일을 중단한다면 제 아무리 잘나 보이는 사람도 함께 쉬는 수밖에 없습니다. 보이는 것보다는 보이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한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들은 가지와 열매의 아름다움에 찬사를 보냅니다. 하지만 그들이 아름다울 수 있게 해주는 뿌리의 역할에 대해서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부모님은 우리의 뿌리이십니다. 그분들은 자식들을 위해 많은 것을 희생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부모님보다 더 근원적인 뿌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이십니다. 부모님이 수염뿌리와 같다면 하나님은 원뿌리와 같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근원적으로 지탱하는 힘이십니다. 우리가 범사에 감사해야 하는 까닭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풍파가 제 아무리 우리를 괴롭힌다 해도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세상 사람들이 흠모할만한 자리에 있다 해도, 모두의 부러움을 살만한 생의 결실을 거두었다 해도 그것을 허락하신 분에 대한 감사를 잊고 있다면 우리는 불쌍한 사람입니다. 가지를 지탱하는 것이 뿌리임을 잊고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에 의지하여

주님이 내 안에 계심을 알고 내가 주님 안에 있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말씀'에 대한 순종입니다. 7절에서 주님은 5절의 말씀을 보충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주님의 말씀을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가리켜 제자라고 합니다. 말씀을 모시고 산다는 말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한다는 말입니다. 그분이 하라시는 일은 손해처럼 보여도 말씀에 의지하여 행하는 것이 제자입니다. 밤새도록 빈 그물질에 시달렸던 베드로 일행이 깊은 곳에 그물을 던지라는 말씀을 들었을 때 한 말을 기억하십니까?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등 록 날 짜 1970년 01월 01일 09시 33분 21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