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41. 날마다 새로움을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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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엡3:14-19
설교일시 2001/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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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새로움을 향해
엡3:14-19
(2001/10/14)


요즘 저는 속별 심방을 다니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을 통해 은혜를 나눕니다. 그런데 제가 제일 소중하게 생각하는 시간은 기도 시간입니다. 한 가정 한 가정, 가족들 한 분 한 분을 기억하며 정성스럽게 기도합니다. 그런데 기도 내용은 대개 비슷합니다. 그 가정이 겪고 있는 어려움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해결되기를 구하고, 가족들의 건강과 행복 그리고 자녀들이 바른 인격으로 성장하게 해달라는 내용입니다. 사실 문제가 없는 가정은 없습니다. 아니, 문제라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걱정거리가 없는 가정이 없다고 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다보니 목사의 기도는 문제 해결을 위한 간구에 치우치기 쉽습니다. 저는 오늘의 본문에 나오는 바울 사도의 기도를 보면서 나의 기도가 지향해야 할 바를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의 교인들이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이 되기를 위하여 하나님께 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나머지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 공급해주신다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먼저 구해야 할 것과 나중에 구해도 되는 것을 뒤바꿔놓고 기도합니다. 이제 저의 기도가 달라져야 하겠습니다.

바울 사도께서 에베소 교인들을 위해 기도하는 모습을 마음속에 그려보십시오. 바울은 지금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너무나 고통스러웠을 겁니다. 그러나 그는 교우들을 기억하며 무릎을 꿇고 기도합니다. 두 손은 아마 가슴 앞에 모았을 거예요. 어쩌면 하늘을 향해 들어 올렸는지도 모르겠네요. 어쨌든 그는 마음을 다해 기도합니다. 그 속에는 간절함이 있습니다. 교우들을 대면하여 가르칠 수 없기에 하나님의 은총과 도우심에 그들을 맡기는 것입니다.


내적 인간으로 굳게 세워주소서

바울 사도는 먼저 성도들이 인격의 중심이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팽이는 빠르게 회전하면서도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의 중심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삶의 중심을 찾은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어떠한 시련이 닥쳐와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바울 사도는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생명의 중심과 연결되었습니다. 그렇기에 이루 말할 수 없는 박해와 모욕을 겪으면서도 그의 중심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내적으로 굳게 선 사람은 뜻밖에도 부드럽고 유연하다는 사실입니다. 자기 자신이나 남에 대해서 공격적인 사람들은 아직 생명의 중심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들은 강한 듯 보이지만 사실은 약합니다. 진정한 강함은 부드러움에서 나옵니다. 노자는 부드러움은 생명에 가깝고 굳음은 죽음에 가깝다고 했습니다. 이게 어찌 몸에만 해당하는 이야기이겠습니까. 우리의 정신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태극권(太極拳) 아시지요? 대만이나 홍콩 사람들이 아침마다 공원에 모여서 슬금슬금 몸을 움직이는 운동 말입니다. 그 태극권을 소개하는 문구가 그럴 듯 하더군요.


백학의 춤처럼 우아한 자태
유유히 흐르는 물처럼 끊임없는 동작
모남이 없는 구름처럼 자연스런 변화
고요한 마음, 집중된 정신


태극권은 지극히 부드럽지만 그 부드러움에서 힘이 나옵니다. 인격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의 마음속에 변화를 일으키는 힘은 강함에서 나오기보다는 부드러움에서 나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세찬 바람이 아니라 햇볕이 나그네의 옷을 벗깁니다. 사람을 구원하는 것은 율법이 아니라 복음입니다. 복음은 우리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하나님께 받아들여졌다는 것입니다. 자격이 없는 데도 주어진 구원의 은총은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새로운 존재가 되는 거죠.

그렇다면 내적 인간으로 굳게 서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성령의 감화입니다. 성령의 바람이 우리 속에 불어와야 우리는 내적으로 굳센 사람이 됩니다. 성령은 힘입니다. 성령은 무기력한 이들을 일으켜 세웁니다. 성령은 딱딱하게 굳어진 마음을 부드럽게 어루만져 새롭게 빚어냅니다.


그리스도가 마음속에 거하게 하소서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의 마음 깊은 곳에 그리스도께서 거하시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어느 영어 성경은 '거하신다'는 말을 'feel at home'이라고 옮겨놓았습니다. 이것은 '마음이 편하다'는 뜻의 관용어이지만 그 바탕을 살펴보면 '집에 온 것처럼 느낀다'는 뜻입니다. 저는 이 말씀에 찔림을 받습니다. 과연 예수님께서 내 속에 오셔서 마음 편히 지내시는가 생각해보면 죄송스러운 마음뿐입니다. 내 속에 먼지 구름처럼 일고 있는 분노, 욕심, 시기, 분쟁, 영적인 게으름, 무정함, 음란함 때문에 주님은 가시 방석에 앉은 것처럼 불편하실 것 같아요. 주님은 어쩌면 슬그머니 우리 영혼의 집을 떠나시지 않을까 염려가 됩니다.

주님을 모시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 마음의 방을 날마다 닦아야 합니다. 함석헌 선생님의 시「님이 오신다」가 생각납니다. 시의 화자는 님이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깜짝 놀라 일어납니다. 맑고도 거룩하신 님을 더러운 집에 모실 수가 없어서, 쓸고 닦고 고치고, 묵은 때를 벗겨냅니다. 물을 뿌려 먼지도 가라앉힙니다. 하지만 아무리 닦아내도 여전히 더러운 것이 보입니다. 천정에는 거미줄이 보이고 방바닥은 더럽습니다. 그런데 님이 오셨다는 소리가 들립니다. 얼굴도 손도 아직 엉망인데 말입니다. 어쩔 줄 몰라 당황하는 그에게 님은 오히려 위로의 말씀을 건네십니다.


이 애 이 애 걱정 마라,
나도 같이 쓸어주마,
나 위해 쓸자는 그 방
내가 쓸어 너를 주고,
닦다가 닳아질 네 맘 내 닦아주마.


시인은 마침내 노래합니다. 쓸자 닦자 하던 것은 마음뿐이고, 님이 손수 쓰시고는 나보고도 함께 앉자 하시니 내가 자랑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보다 은혜에 대해 더 잘 표현한 말을 알지 못합니다. 주님은 당신을 모시려고 애쓰는 마음을 대견스레 여기십니다. 그리고 오히려 당신이 우리 속을 깨끗하게 해주시고는 우리에게도 쉬라 하십니다. 주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면 스스로 밝히지 못하던 마음이 저절로 밝아집니다. 애써도 깨끗해지지 않던 마음이 저절로 맑아집니다. 바울은 그 사실을 알기에 그리스도께서 교우들의 마음속에 거하시기를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에 뿌리박고 사랑을 기초로 해서 살게 하소서

사도는 이제 성도들이 사랑에 뿌리박고 사랑을 기초로 해서 살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세계의 중심은 사랑입니다. 이 말이 낯설게 들리십니까? 남자가 여자에게 끌리고, 여자가 남자에게 끌리고, 온갖 만물들이 서로를 끌어당기고 있습니다. 모든 것들을 끌어당기고 있는 것은 사랑입니다. 미움은 밀어내고 거리를 만듭니다. 하지만 사랑은 잡아당기고 거리를 좁혀 일치를 이루게 합니다. 그 사랑의 힘 안에서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목숨을 바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이라 부릅니다. 세상의 진정한 모든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합니다.

저는 사랑을 '자기 밖으로 나가는 힘'이라고 말하곤 합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면 그를 위해 어떠한 희생도 마다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연애하는 젊은이들을 보십시오. 찬바람이 불어와 애인이 추워하면 남자들은 자기 옷을 벗어 연인에게 입혀줍니다. 그는 안 추운가요? 그럴 리가 없어요. 그는 연인을 위해 추위를 감수하는 겁니다. 그래서 스스로 비참해지나요? 아닙니다. 오히려 뿌듯해 합니다. 이런 비이기적인 사랑이 우리 삶의 기초가 될 때 우리는 영적으로 진보합니다. 자기 초월이 일어납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섭니다.

기초가 부실한 건물은 무너지기 쉽습니다. 기초가 부족한 학문도 금방 바닥이 드러나고 맙니다. 사랑에 뿌리를 내리지 않은 관계는 깨지기 쉽습니다. 사랑에 깊이 뿌리를 내린 사람은 인생의 가뭄이 닥쳐와도 열매를 맺습니다. 우리가 왜 이 세상에 왔는지 아세요? 사랑을 배우러 온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깊이를 조금이나마 맛보며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요즘 저는 매일 길을 걷거나 차를 타고 있을 때 이렇게 반복해서 기도합니다.


"예수님, 사랑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게 하소서."


이렇게 기도하고 나면 내 얼굴 표정은 조금 부드러워지고, 긴장됐던 몸과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사랑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사랑의 마음으로 서로를 대한다면 인류는 그만큼 진보하는 것입니다. 물질의 진보만이 진보가 아닙니다. 영의 진보야말로 진정한 진보입니다. 여러분, 인류의 진보를 위해 걸으십시오. 사랑하십시오.

교우 여러분, 이제 저도 여러분을 위해 기도할 때 문제 해결을 위한 기도만이 아니라, 영적인 발전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여러분도 기도의 범위를 넓히십시오. 먼저 구해야 할 것을 구하고, 그 일에 최선을 다할 때 주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다른 것들도 공급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의 삶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깊이를 깨달아 생명의 충만함 속에서 늘 행복하기를 기원합니다.

등 록 날 짜 1970년 01월 01일 09시 33분 21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