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42. 손 님
설교자
본문 눅14:12-14
설교일시 2001/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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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님
눅14:12-14
(2001/10/21)

얼마 전 밀입국을 시도하다가 질식사한 중국인 동포들이 여수 소리도 앞바다에서 수장된 일이 있었습니다. 이 사건을 두고 어느 신문은 '水葬된 코리안 드림'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배의 이물 쪽에 있는 좁다란 '그물 창고'에 겹겹이 포개진 채 숨어 있다가 질식사한 그들의 절망과 공포를 생각하면 산다는 게 뭔가 하는 생각에 하늘을 올려다보게 됩니다. 그들은 가족들에게 꼭 돈을 벌어서 돌아오겠다고 다짐했겠지요. 가족들은 젊디젊은 그들을 보내면서 얼마나 불안했겠어요? 그런 그들이 그렇게 허망하게 죽은 겁니다. 물론 실정법을 어기고 밀입국하려 한 것은 잘못입니다. 그렇다해도 그들의 주검을 처리하는 방식은 너무 잔혹했습니다. 그들은 바다에 버려졌어요. 어쩌다가 사람이 이 지경이 되었나 싶습니다. 수장된 것은 코리안 드림이 아니라, 인간성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참 사나와졌습니다. 외국인 노동자들이 만든 한국어 교재의 첫 마디가 "때리지 마세요"라는 이야기는 무엇을 뜻합니까? 물질적으로는 풍요롭지만 정신적으로는 황폐해진 우리의 모습이 아닐는지요.


자반 고등어

저의 부모님은 제가 중학교 3학년 때 시골에서 서울로 이주하셨습니다. 자취 생활을 하는 아들이 못내 보기에 딱하셨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살 대책이 없었습니다. 평생 땅을 일구며 사시던 분들이시니 서울이라는 낯선 땅에서 하실 일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살아야 하니까 어머니는 머리에 김, 멸치 등 마른 건어물을 담은 함지를 머리에 이고 산동네를 찾아다니며 장사를 하셨습니다. 저는 그것이 부끄러웠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조금도 그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그해 가을 궂은 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날 집에 들어갔더니 저녁 밥상에 자반(佐飯) 고등어가 올라와 있었습니다. 이게 웬일인가 싶으면서도 모처럼의 성찬을 즐겼습니다. 그런데 다음날도 역시 자반 고등어가 상에 올랐습니다. 그때서야 웬일인가 여쭈었지요. 어머니는 쑥스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말씀하시더군요. 비가 와서 일찍 장사를 작파하고 집에 돌아오는데, 우리가 세들어 사는 집 추녀 밑에서 웬 아주머니가 울고 계시더랍니다. 아주머니 곁에는 고등어가 담긴 함지가 놓여 있구요. 왜 우냐고 물었더니, 자초지종을 이야기 하더래요. 집에 먹을거리가 똑 떨어진 것을 보고 나왔는데, 비가 오는 바람에 고등어를 하나도 팔지 못했고, 배곯는 자식들을 위해 곡식을 살 수 없는 처지를 생각하니까 서러워서 운다고 하더랍니다. 어머니는 가슴이 뭉클해져서 아주머니를 일단 집으로 모신 후 밥을 차려서 같이 잡쉈습니다. 그리고 집에 있는 돈을 다 털어서 자반 고등어 한 함지를 사드린 겁니다. 저는 그 일을 잊지 못합니다. 어려운 사람들을 보면서 마음이 인색해지려 할 때면 이 기억이 어김없이 떠오릅니다.

이것은 저의 개인적인 경험입니다만 그 시절에는 다는 아니라 해도 그런 인정이 조금은 남아있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어려운 사람들의 설 땅이 되어주려고 평생 마음 쓰며 사셨던 부모님을 모시고 살았다는 사실을 감사함으로 기억합니다. 하지만 내 자식들은 나를 어떻게 기억할까 생각하면 부끄러워질 때가 많습니다.


말씀의 선물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어느 바리새인의 집에 초대를 받아 가셨을 때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주님은 어느 곳에 계시든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는 사회적 관습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점잖은 손님 노릇을 하지도 않으십니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5:17). 이 말씀이 예수님의 삶을 잘 요약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집에서 고창병 든 사람을 고쳐주십니다. 그 날이 안식일이었음을 생각해보면 예수님의 행동은 다분히 도발적인 것이었습니다. 또 식탁의 상좌를 차지하려고 눈치를 보는 사람들을 보시고 한 말씀하십니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눅14:11). 그들은 무안했을 거예요. 예수님의 행동이나 말은 당신을 초대한 사람을 무색케 했습니다. 누가 이런 손님을 좋아하겠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한 술 더 뜹니다. 예수님은 초대받은 사람으로서 그 집주인에게 뭔가 귀중한 선물을 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그 선물이 뭔지 아세요? 듣기 싫어도 그가 꼭 들어야 할 말씀이었어요. 선물 가운데 말씀의 선물처럼 소중한 것이 없어요.

예수님은 밥상을 앞에 두고 있으니까 식탁 친교에 어떤 사람을 초대해야 할까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보통 좋아하는 사람들을 초대합니다. 사실 마음이 내키지 않는 사람하고 밥을 함께 먹는 일은 고역입니다. 비싼 음식을 먹어도 체하지 않으면 다행이지요. 우리가 식탁에 초대하는 사람들을 생각해보세요. 어떤 사람들입니까? 대개는 고마운 사람들, 가까운 사람들, 한 번 대접해 두는 게 여러 모로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되는 사람들일 겁니다. 요즘 어느 정치인이 비리 혐의를 받고 있는 어떤 사람과 식사를 함께 했다고 해서 떠들썩한데, 그런 식사를 순수한 교제로 보기에는 좀 곤란한 데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생활 경험과는 동떨어진 정말 엉뚱한 말씀을 하십니다. 그런 이들 말고 차라리 가난한 사람들, 몸이 불편한 이들, 다리를 저는 사람들, 앞 못 보는 사람들을 청하랍니다. 그 이유가 뭔지 아시지요? 그들은 우리에게 되갚아 줄 능력이 없기 때문이래요. 이것은 우리의 생각과는 달라도 한참 다른 이야기입니다.


상생의 길, 십자가의 길

영어로 "give and take"라는 말이 있습니다. 주고 받는다는 말입니다. 들어가는 것이 있어야 나오는 것도 있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어떤 면에서는 건강한 인간관계를 위해 필요한 것이기도 합니다. 늘 주기만 하려는 사람도 문제이고, 늘 받기만 하는 사람도 문제입니다. 주면서 준다는 사실을 즐기는 사람도 환자고, 받는 데만 익숙해서 도무지 줄 것이 없는 사람도 환자입니다. 그런데 "give and take"라는 게 잘못 적용되면 심각한 문제를 낳습니다. 문학판에서도 이런 반성의 목소리가 높습니다. 작품으로 보면 함량 미달인데 그래도 우리 쪽 사람이니까 칭찬해주고, 작품이 아무리 좋아도 우리 쪽 사람이 아니니까 못 본척 하는 풍조를 고치지 않고는 문학이 발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진리를 드러내기 위한 상호 비판과 토론을 싫어합니다. 일단 상대방이 나와 견해를 달리하면 가슴이 벌렁거리면서 마음을 닫습니다. 그리고 적대감정을 갖습니다. 이러니 발전이 없습니다. 학벌, 족벌, 파벌을 따지는 동안 진리는 숨을 죽입니다. 사람 사이에 마땅히 있어야 할 신뢰심은 토대로부터 흔들립니다. 이들이 좋아하는 속담이 뭔지 아세요? "누이 좋고 매부 좋고"입니다. 좋은 게 좋다는 겁니다.

상생(相生)이라는 말이 유행한 때가 있었습니다. 서로를 살린다는 말이니 좋지요. 하지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내가 남을 살리기 위해서는 먼저 내가 죽지 않으면 안 됩니다. 상생이란 상호 희생을 전제로 한 것이지, 서로 손해보지 않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상생의 길이란 십자가의 길입니다. 자기를 부정하는 길입니다. 자기를 부정하는 사람만 남을 살릴 수 있습니다. 남을 복되게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길로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되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을 우리 인생의 손님으로 모시라는 것입니다. 옷차림이 허름하다고 해서 무시하지 말아야 해요. 사회적 약자라고 해서 한 자락 접고 대하지 말아야 해요. 우리 옛 사람들은 나그네를 뜻하는 '손'이라는 말에다 '님' 자를 붙였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호의에 대해 되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들을 내 인생의 손님으로 모시게 될 때 우리는 시편에 나오는 말씀을 깊이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주께서는, 내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내 머리에 기름 부으시어 나를 귀한 손님으로 맞아 주시니, 내 잔이 넘칩니다(시23:5)


되갚을 것이 없는 이들의 축복

제가 좋아하는 후배 목사가 어느 날 속초에 사는 한 어른을 찾아뵈었습니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 어른이 종이 한 장을 들고 거실로 나오셨어요. 작고 낡은 그 종이는 상장이었습니다. 상장에는 서툴게 쓴 글씨가 적혀 있었는데, 상의 종류와 내용이 아주 뜻밖이더랍니다. 상장에 적힌 상의 이름은 "보호상"이고,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위 사람은 61세나 되었는데도 어린이를 잘 돌봤으므로 이 상을 수여함"

위에는 할아버지의 함자가 또박또박 적혀있고, 맨 아래에는 날짜와 함께 상을 주는 이의 이름이 있었습니다. 외손녀의 이름이었습니다. 사연히 궁금해 물었겠지요. 그 어른의 외손녀는 지금 초등학교 1학년인데 상을 많이 탔다면서 할아버지에게 자랑을 했습니다. 할아버지는 손녀을 칭찬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짐짓 "할아버지는 아무 상도 못 탔는 데" 하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손녀가 슬그머니 방으로 들어가더니 잠시 후 그 종이를 들고 나와 할아버지의 손에 쥐어 주더랍니다. 할아버지는 가슴이 뭉클 했을 겁니다. 그러니 그것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가 찾아간 목사에게 보여주지요. 할아버지는 이전에도 여러 번 상을 받아본 적이 있었지만 손녀에게 받은 상이 가장 소중하다고 말하더래요. 여러분, 남을 행복하게 하는 데 돈이 드는 게 아닌 줄 아시겠지요?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감사의 마음, 그것 하나면 됩니다.

손녀는 할아버지께 드릴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감사의 마음을 종이 한 장에 담아 전한 겁니다. 그런데 그게 할아버지의 생을 환하게 만든 줄 손녀가 알았을까요? 여러분, 우리에게 되갚을 능력이 없는 이들을 우리의 손님으로 맞아들일 때, 그래서 그가 되갚아 줄 것이 없어서 안타까와 할 때 하나님은 그의 마음을 받으셔서 우리에게 복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나그네와 과부와 고아의 보호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담의 선물

헨리 누엔 신부는 미국의 예일대학과 하바드대학에서 영성 신학을 가르치던 위대한 영성가였습니다. 그러던 그가 어느 날 그 모든 영광스러운 일들을 뒤로 하고 캐나다에 있는 데이부레이크(daybreak)이라는 곳에 들어갔습니다. 그곳은 한 순간도 남의 도움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중증 장애인들을 돌보는 시설이었습니다. 누엔 신부는 그곳에 머무는 10년 동안 아담이라는 사람을 돌보아 주었습니다. 말도 못하고, 어떤 방법으로든 자기의 의사조차 표현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친구들은 왜 생을 허비하느냐면서 그에게 학계로 돌아올 것을 종용했지만 신부님은 그곳에 머물렀습니다. 너무 큰 희생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의 고백은 다릅니다. 그곳에서 아담을 돌보는 시간이야말로 하나님과 가장 깊이 만나는 시간이었다는 것입니다. 아담의 몸을 씻기고, 옷을 갈아 입히고, 음식을 먹이고, 운동을 시키고, 그의 곁에 머무는 시간이야말로 그에게는 가장 깊은 기도의 시간이었던 겁니다. 아담은 유형적으로는 아무 것도 그에게 되갚아줄 수 없었습니다. 고맙다는 말조차 할 수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아담의 선물은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아담의 곁에 머문 사람들은 하나님의 현존을 깊이 체험했으니 말입니다. 누엔 신부는 그 경험을 성서의 본문에 빗대어 설명합니다. 마가복음6장56절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옷자락에라도 손을 대려 했고 "손을 대는 자는 다 성함을 얻었다"고 보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담의 몸을 만진 사람들은 누구나 정신의 불구를 극복하고, 참 인간으로 회복되었다고 누엔 신부는 고백합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되갚을 것이 없는 사람들이야말로 하나님의 복의 담지자라는 사실이 말입니다. 우리가 마음을 비우고, 정말 그런 이들에게 마음을 열 때 우리는 주님의 치유하심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손님으로 맞아들이는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되갚아 줄 것이 없는 이들을 여러분의 손님으로 삼으십시오. 그들 곁에 머물고, 그들을 위해 나의 것을 나눌 때 우리는 예수님이 곁에 계심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오늘 내가 대면하는 모든 이들을 손님으로 맞아들여 생을 축제로 바꾸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등 록 날 짜 1970년 01월 01일 09시 33분 21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