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43.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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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일시 2001/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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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벧전2:1-10
(2001/10/28)


개혁되어야 할 대상은 바로 나 자신

오늘은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 484주년 기념 주일입니다. 매년 이맘 때가 되면 마음이 무겁습니다. 부끄러운 우리의 자화상을 그리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종교개혁은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오늘 우리가 새롭게 수행해야 할 과제입니다. 오늘의 기독교가 개혁되어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개혁되어야 할 대상이 바로 '나' 자신이고, 우리 교회라는 사실은 흔쾌히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개혁되어야 할 대상들은 바깥에 있다고 생각하면서 우리는 스스로를 기만해 왔습니다. 그 때문에 올해 83세인 조찬선 목사의 목소리는 힘찬 사자후로 우리에게 들려옵니다.


1995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한국 인구의 50.7%가 종교인으로 나타났는데, 그 종교의 절대 수는 기독교·불교·천주교가 차지하고 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교회·사찰·성당의 수는 한국의 모든 학교 총수의 3배나 된다고 한다. 사랑과 자비, 희생과 봉사를 주장하는 위의 세 종교인이 민족 인구의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으면서도 민족의 도덕성이 점점 더 타락하고 더 심한 부정 부패가 민족의 진로를 방해한다면, 그 책임을 어디에 물어야 할 것인가? 그 책임이 세 종교에는 없는가? 성당의 우렁찬 종소리와 미사도, 교회에서 새벽마다 울부짖는 통곡의 기도도, 절간의 목탁 소리도 민족을 구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증거인가? 혹은 한국의 종교들은 각 개인의 축복과 구원만을 추구하는 이기 집단인가? 그렇다면 그런 종교는 우리 사회에 있으나마나 한 존재이다. 그런 종교는 도리어 없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기독교 죄악사』중에서)


'도리어 없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는 말이 참 통렬하게 다가옵니다. 종교개혁이란 무엇입니까? 아니, 이 말을 묻기 전에 '종교'라는 말부터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종교는 '으뜸가는 가르침'입니다. 즉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 꼭 알아야 할 가르침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요즘 교인들은 신앙을 그렇게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것이 으뜸가는 가르침이면 가장 공들여 배워야 하고, 또 가르쳐야 하는 데도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젊은 부모들을 보십시오. 아이들에게 영어 공부를 시키느라고 야단입니다. 아이가 뭔가를 요구할 때 영어로 말하지 않으면 대꾸도 안 하는 엄마도 있다고 하더군요. 영어 학습은 우리 시대의 새로운 종교가 되었습니다. '영어 외에는 구원받을 다른 이름이 없다'. 이것이 이 종교의 강령입니다. 이것은 그저 단적인 예에 지나지 않지만, 신앙생활을 한다는 사람들도 사실 주님의 가르침과 요구를 심각하게 자기 삶에 적용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종교개혁

그렇기에 종교개혁은 우리로 하여금 제 정신 차리고 살지 못하도록 하는 이 천박한 자본주의 문화를 문제삼고, 깊이와 높이를 잃어버린 채 시간에 떠밀려가는 우리의 삶을 전복하는 일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욕망을 부추기면서 참된 그리스도의 몸으로 서지 못하는 교회를 새롭게 해야 합니다. 물론 그 기준점은 예수님의 삶과 그분의 가르침입니다. 종교개혁이란 잃어버린 본질을 회복하자는 운동인 것입니다. 예수님도 어찌 보면 종교 개혁자이셨습니다. 스스로 거룩하다고 생각했던 이들의 입장에서는 참 골치 아픈 존재였습니다. 예수님은 아무도 감히 건드리지 못하는 성역을 건드렸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비판, 성전 체제에 대한 부정과 안식일에 대한 재해석이 그 예입니다.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마23:25, 27)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2:19)

"또 가라사대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막2:27-28)


예수님은 외적인 경건이 경건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이미 우상이 되어버린 성전은 무너져야 한다고 하십니다. 딱딱하게 굳어져 사람들을 얽어매고 있던 안식일의 본뜻이 회복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참 혁명적인 선언입니다. 예수님은 넓은 길을 버리고 좁은 길을 택하십니다. 주님이 오늘 이 땅에 오신다면 과연 수천 명이 들어가는 화려한 교회를 보시면서 뭐라고 하실까요? 피에르 신부는 성전의 아름다움은 그 건물의 화려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성전의 주변에 집이 없어서 고생하는 사람과 배가 고파서 우는 사람이 없는 데 있다고 했습니다. 저는 이 말에 공감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마음과 일치한다고 생각합니다. 믿음과 구원이라는 폐쇄 회로에 갇힌 채 세상의 소금으로 세상의 빛으로 드러나지 못하는 우리들은 과연 세계 변혁의 주체입니까, 객체입니까?


버릴 것, 취할 것

이렇게 말하고 보니까 너무 우울해지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게 현실인 걸요. 지금부터라도 잘 해야지요. 언젠가도 말했습니다만 어느 농부 할아버지가 한 말씀이 늘 제 귀에 뱅뱅 돌고 있습니다. "참 삶이란 부단히 버리는 것과 든든하게 붙잡는 것의 통일이다." 근사한 말이지요? 그래요, 잘 버려야 해요. 베드로는 성도들이 악의, 기만, 위선, 시기, 비방하는 말을 버려야 한다고 말하네요. 이런 것들은 과도한 욕심이나 나를 근사하게 치장해서 보여주려는 유치한 마음에서 나오는 것들입니다. 이런 것들은 우리 영혼의 성장을 가로막습니다. 자꾸 버려야 해요. 그러기 위해서는 다른 이에 대해 품고 있는 나쁜 생각, 나를 근사하게 보이고 싶은 마음, 근거도 없이 남을 비방하는 것, 우리 속에 있는 이런 것들을 똑바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빛이 어둠을 이길 수 없는 것처럼 그런 생각들이 우리를 종처럼 부려먹을 수 없습니다. 그때 우리의 표정은 밝아지고, 가벼워지고, 자유로워질 것입니다.

그런데 버려야 할 것은 그런 것만이 아닙니다. 자기가 얻은 것조차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들, 나의 권리라고 생각했던 것들을 다른 이들을 위해 자발적으로 포기할 때 우리 마음은 조금씩 자라기 시작합니다. 성경을 아무리 많이 알아도, 아무리 기도를 열심히 해도 포기의 정신이 우리 속에 들어오지 않는다면 우리는 여전히 미성숙한 사람입니다. 우리 믿음이 자라는지 안 자라는지를 알 수 있는 척도가 뭔지 아세요. 조금씩이나마 세상에 대한 욕망과 집착이 줄어든다는 겁니다.

그런데 포기한다는 것은 말이 쉽지 참 어려운 겁니다. 억지로 하면 탈이 나도록 되어 있습니다. 체면 때문에 자기 권리를 포기하고 속앓이를 하는 이들이 많아요. 포기도 내가 의지적으로 하려고 하면 어려워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해요. 하나님을 사랑하면 낮은 차원의 것들은 저절로 떨어져 나갑니다. 몸에 상처가 나면 딱지가 생기잖아요? 상처가 아물 무렵이면 간지러우니까 자꾸 손이 거기로 가서 딱지를 무리하게 떼어내다가 또 피를 보고 말지요. 경험해 보셨지요? 상처가 아물기 위해서는 속에서 새 살이 돋아나와서 헌 데를 메울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이처럼 우리 속에서 새로운 생명, 곧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자라나면 세상적인 것은 저절로 맛을 잃게 되는 겁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자랄까요? 베드로는 순수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고 권합니다. 아기들이 엄마 젖을 먹고 쑥쑥 자라는 것처럼 성도들은 순간순간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를 먹어야 성장할 수 있습니다. 허전한 마음을 돈으로 채우려고 하지 마세요. 그것은 채울 수 없어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우리 영혼이 자랄 수가 없어요. 사모하는 이들만 은혜를 받습니다. 지금 이곳에 있으면서도 마음은 벌써 해야 할 일, 만나야 할 사람들에게로 달려가고 있는 한 우리는 은혜를 경험할 수 없어요. 은혜의 시간은 바로 지금이에요. 목마른 사람에겐 한 모금의 물이 천금보다도 귀합니다. 문제의식이 없으면 답도 없습니다. 바울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롬5:20)고 한 것은 바로 이것을 두고 한 말입니다.


산 돌

우리가 기억하는 신앙의 위인들은 완벽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도 우리처럼 허물많고 약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와 그들의 차이를 굳이 이야기한다면 그들은 자기들의 생이 문제라는 사실을 알았고, 그것 때문에 아파했고, 하나님께 답을 구했지만, 우리는 그것을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모하는 이들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더 이상 세상에 매이지 않습니다. 자유로워지는 거지요. 자유로워진 사람들은 '산 돌'로 지은 집같이 굳건한 삶을 살게 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산 돌'(living stone)이라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보고 '반석'이라고 하셨는데, 베드로는 이제 거기에 '살았다'는 말을 덧붙여 예수님께 돌려드리고 있습니다. 돌은 돌인데 살아있는 돌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은총 안에 있는 사람들의 생입니다.

세상을 새롭게 했던 사람들은 한결같이 '산 돌'이신 예수님과 만나 '산 돌'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신령한 집, 곧 하나님의 나라의 초석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자리에 초대받고 있습니다. 내가 변하면 세상도 변합니다. 루터가 하나님의 은총에 접해 변화되었을 때 그는 변혁의 횃불이 되었습니다. 그 불이 타올라 어두웠던 중세를 밝혔습니다. 이게 우리의 확신입니다. 우리는 빛의 씨알이 되라고 부름받았습니다. 베드로는 우리의 소명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9)


큰 꿈, 작은 꿈

저는 우리의 꿈이 너무 왜소해진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거룩한 집을 이루는 '산 돌'이 되기를 원하시는데, 우리는 즐거움을 사기 위해 시간을 소비합니다. 극장마다 젊은이들이 가득합니다. 극장이 오늘날 젊은이들의 신전이 되고 있고, 스타들이 그들의 제사장 노릇을 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그들은 2시간 안에 완결되는, 별다른 고민없이 볼 수 있는 이야기에 매료됩니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나면 그뿐, 존재는 새로워지지 않습니다. 새로운 존재가 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신앙은 알약이 아니어서 한번에 꿀떡 삼킬 수 없습니다. 신앙은 길면서도 고된 길입니다.

교회는 오늘의 젊은이들에게 큰 꿈을 심어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부자가 되고 출세하는 꿈 말고, 남과의 경쟁에서 이기는 꿈 말고, 남을 섬기고 남을 복되게 하는 꿈 말입니다. 예수적 삶을 꿈꾸는 이들이 없는 한 교회의 미래는 없습니다. 종교개혁주일을 보내면서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를 돌아봅니다. '예수 없는 교회', '예수의 혼이 빠진 교회 행사', '산 돌이신 예수의 터 위에 서있지 않은 교회'는 없어지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세상에 희망의 그루터기로 부름받았습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이 놀라운 부름에 기꺼운 마음으로 응답하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등 록 날 짜 1970년 01월 01일 09시 33분 21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