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44. 귀 향
설교자
본문 요엘2:12-17
설교일시 200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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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 향
욜2:12-17
(2001/11/4)


찬바람이 불면서 낙엽이 포도 위를 뒹굴고 있습니다. 예민한 분들은 왠지 모를 비감함에 눈물을 흘리기도 합니다. 낙엽을 보면서 사람들은 저마다의 생각에 잠깁니다.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을 아쉽게 돌아보는 이도 있을 것이고, 감원의 태풍 속에서 떠나간 옛 동료들을 그리워하는 이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낙엽을 통해 '한 소식'을 듣는 이도 있는 모양입니다.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垂直)의 파문을 내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 한용운님의 '알 수 없어요'의 첫 대목입니다.

낙엽이 이처럼 다양한 정서적 감흥을 일으키는 까닭이 무엇일까요? 어쩌면 그것은 낙엽이 생명의 실상을 가뿐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 아닌지 모르겠어요. 봄에 여린 새 잎으로 태어나, 여름의 호시절을 누리고, 가을이면 시들어 결국 흙으로 돌아가고 마는 나뭇잎의 한살이가 우리 속에 감추어진 거문고, 곧 心琴을 울리는 것인가요?


죽음에 이르는 존재

나무는 잎을 떨굼으로써 겨울나기를 준비하고, 새 봄을 기약합니다. 낙엽은 우리에게 모든 것은 왔던 곳으로 돌아간다는 것과, 생명은 자기를 비움으로 성장하는 것임을 말없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마틴 하이데거라는 철학자는 인간을 가리켜 '죽음에 이르는 존재'라고 했습니다. 참 시시한 말입니다. 사람이 때가 되면 죽는다는 것을 누군들 모르겠어요. 하지만 그의 인식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인간이 죽음에 이르는 존재라는 말은, 인간이 자기의 죽음을 의식하는 존재라는 말입니다.

자기의 죽음을 내다보면서 유한한 시간을 의미있게 살아가기 위해 결단할 때 사람은 비로소 사람답다는 말입니다. 죽음의 확실성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는 사람은 때가 되면 자기가 소중히 여기고 애착하고 있던 것들을 다 버려두고 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압니다. 제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며칠 전 제게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억만금이 있으면 뭐하냐? 그저 바깥 공기를 한번만이라도 맘껏 쐴 수 있다면 좋으련만. 꽃이 피는 것을 볼 수 있으면 더 좋고." 죽음을 본 사람은 세상에서 우리 마음을 빼앗아 갔던 것들에 대해 초연해져요. 놓임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그는 자기 본연의 자리로 돌아오는 거예요.

그런데 죽음에 임박해서야 그런 것을 깨달으면 뭐하겠어요. 죽음에 이르는 존재인 인간은 항상 자기가 돌아가야 하는 존재임을 생각하면서 오늘을 살아야 해요. 잘 돌아가는 사람이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도연명의 歸去來辭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자 돌아가자. 고향 전원이 황폐해지려 하는데 어찌 돌아가지 않겠는가?"
(歸去來兮 田園將蕪胡不歸)


너무 늦기 전에

우리 마음은 황폐해지지 않았나요? 하나님이 주신 청정한 본래의 생명이 너무 때묻지 않았나요? 돌아가야 합니다. 너무 늦기 전에요. 문제는 내가 지금 얼마나 황폐화되었는가를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앞만 보고 달리기에 급급하다 보니 우리는 떠나온 곳을 돌아보지 않습니다. 이제는 돌아가야 할 때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본향이신 하나님께로. 망설이지 마십시오. 결단해야 할 시간은 바로 지금입니다. 70년대에 유행했던 노래가 기억나네요.

사랑한다고 말할 걸 그랬지
님이 아니면 못 산다 할 것을
사랑한다고 말할 걸 그랬지
망설이다가 가버린 사람

망설이면 늦습니다. 사랑의 노래인 아가서 5장에는 엇갈린 사랑의 아픔이 절절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여인은 잠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 마음만은 깨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이를 그리워하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사랑하는 이가 이르러 문을 두드립니다.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 문 열어다오' 하고 부탁합니다. 얼마나 그리던 목소리입니까? 그런데도 여인은 망설입니다. '옷을 벗고 있으니 어찌 다시 입겠고, 발을 씻었으니 어찌 다시 더럽히랴.' 잠시 망설이다가 마음을 바꾸고 문을 열었는데 그만 사랑하는 이는 가버리고 말았습니다. 여인은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그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 자기 혼이 나갔던 모양이라며 탄식합니다. 여인은 거리로 달려나가 사람들에게 자기 낭군을 보았는지를 묻습니다. 아무도 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여인은 그래도 사람들에게 당부합니다. "너희가 나의 사랑하는 자를 만나거든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다고 전해주시오."

기가 막히지요? 결단의 시간은 님의 목소리를 듣는 바로 지금이어야 합니다.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히3:13)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6:2)


哀痛에서 愛通으로

하나님은 요엘 선지자를 통해 백성들을 부르십니다. 자기가 저지른 죄의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으면서도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방황하는 백성들에게 이제라도 금식하며 울며 애통하며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누가 울며 돌아갈 수 있습니까? 자기를 돌아보는 사람입니다. 자기 반성이 없는 사람에게는 새로운 삶도 또한 없습니다. 거울에 얼굴을 비추어보듯 하나님의 마음에 자기 영혼을 비추어 보아야 합니다. 그 창에 비친 욕심스럽고, 거칠고, 냉소적이고, 위선적이고, 나약하고, 굳어지고, 거짓 투성이인 그 사람이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나 자신임을 인정할 때 우리는 울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기의 참상을 본 사람들은 슬퍼하고(哀) 아파합니다(痛).

그런데 우리는 복음의 말씀을 듣습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5:4). 애통하는 자만이 위로를 받습니다. 히브리의 시인은 하나님의 은총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시51:17).

우리의 죄가 주홍빛보다 더 붉을지라도 주님은 눈보다 더 희게 하실 수 있습니다. 필요한 것은 진정 어린 눈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哀痛, 곧 슬픔과 아픔을 사랑(愛)과 일치(通)로 바꿔주십니다. 하나님은 당신께 돌아오는 우리를 대견하게 여기셔서 복까지 내려주십니다. 집을 떠났던 탕자가 집에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종들을 시켜 가장 좋은 옷을 내어다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깁니다(눅15:22). 이게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긍휼을 구해야 할 때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너무 멀리까지 와 있습니다. 욕망과 이기심의 심연에 너무 오래 머물렀습니다. 그러다보니 개인도 사회도 국가도 세계도 인간성의 불모지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굶주려 죽어가는 이들, 전쟁의 광기에 사로잡힌 사람들, 인간다운 삶은 고사하고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죽음의 위협 앞에서 떨고 있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인류는 찢기워 있습니다. 주님은 지금도 여전히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척박한 역사 위를 걸어가고 계십니다. 지금은 귀향의 나팔 소리를 들어야 할 때입니다. 아니, 우리가 뜻을 정하고 나팔 소리를 길게 울려야 합니다. 그리고 함께 모여야 합니다. 함께 모여 울면서 우리의 참상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긍휼을 구해야 합니다. 요엘은 첫날밤을 맞은 신랑과 신부도 예외는 아니라고 합니다.

그런데 왜 돌아가는 것을 주저할까요? 돌아가는 것은 말 그대로 돌아가는 길, 곧 더딘 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바쁠수록 돌아가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너무 경제 중심주의에 사로잡힌 채 일직선으로 달려왔습니다. 이게 지금 우리의 병통입니다. 이제 숨을 고르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가장 빠른 길입니다. 발 아래 차이는 낙엽은 우리에게 잘 돌아갈 줄 알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이 가을에 귀향의 나팔 소리를 듣고 하나님께로 힘써 돌이키기를 바랍니다.

등 록 날 짜 1970년 01월 01일 09시 33분 21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