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45. 구원의 잔을 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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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시116:1-14
설교일시 2001/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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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잔을 들고
시116:1-14
(2001/11/11)


복사판이 아니라 원판

세상에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실망한 채 살아가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기 삶에 대해서 완전히 만족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있다면 狂人이거나 聖人이겠지요. 인생은 행복하기도 하고, 불행하기도 합니다. 만약 불행을 느끼지 못한다면 우리는 행복도 느낄 수 없을 겁니다. 그림자 없는 몸이 없는 것처럼, 불행이 없는 삶이란 불가능합니다. 문제는 그 불행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볼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들에 대해, 혹은 자기들의 삶의 조건에 대해 실망감을 나타내곤 합니다. 키가 작아서 속상하고, 배우지 못해서 한스럽고, 건강이 여의치를 못해서 안타깝고, 원만하지 못한 성격 때문에 고립되고, 외모에 자신이 없어서 열등감을 느끼고…….

그러다보니 사람들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직면하기보다는 '만약의 집'에 머물기를 좋아합니다. '만약 내가 키가 크다면', '만약 내가 부잣집에 태어났다면', '만약 내 피부가 지금보다 희다면', '만약 내가 미국에 태어났다면'……. 한 두 번 그런 생각하는 거야 문제될 게 없지요. 하지만 그게 병이 된다면 심각해집니다. 그 병의 초기 증상은 불만족과 원망이고, 더 심해지면 남에 대한 시기심과 자기 비하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이런 병을 이길 수 있는 길은 내게 없는 것 때문에 탄식하기 보다는 내게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자세히 살피는 데 있습니다. 저는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의 기도문을 좋아합니다.


"하나님, 내가 변화시킬 수 없는 일은 받아들일 수 있는 평정을 주시고
변화시킬 수 있는 일은 변화시킬 수 있는 용기를 주시고
이 둘 사이의 차이를 알아차릴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
God, grant me the serenity to accept the things I cannot change,
courage to change the things I can
and wisdom to know the difference.


변화시킬 수 없다면 받아들여야지요. 이게 내 몫의 생이구나 하구요. 바울도 로마서에서 말했습니다.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9:20-21).


남과 같지 못한 것을 원망할 것이 아니라, 내가 나답게 살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해야 합니다. 아브라함 요수아 헤셀의 말은 우리의 정수리를 치는(頂門一鍼) 가르침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 사건으로서의 나의 실존은 복사판이 아니라 원판이다." 누군가를 추종하며 살기에는 우리 삶이 너무도 소중합니다. '나는 원판이다', '나는 세상에 있는 어떤 사람과도 동일하지 않다.' 이렇게 외치고 보면 잘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차오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살아가면서 조금씩 조금씩 다른 사람들의 삶에 동화되어 갑니다. 물론 그것도 필요합니다. 너무 중뿔나게 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지나치게 동화되어가다가 자기의 고유한 모습을 잃어버리면 안 됩니다. 모난 돌이 정을 맞는다는 말처럼 우리의 개성을 억압하는 말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다른 이들처럼 생각하고 행동해야 편하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래서 남의 눈을 통해 세상을 보고, 남의 가슴으로 느끼고, 남의 언어로 말을 합니다. 복제인간 클론은 이렇게 태어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원판으로 사는 불편함 대신 복사판으로 살아가는 편안함을 즐깁니다. 이것이 바로 타락입니다.


홀로 그리고 더불어

때때로 우리 삶에 고독이 필요한 것은 고독 속에서만 나 자신을 깊이 바라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독과 침묵은 사람이 하나님과 만나는 소중한 시간입니다. 예수님은 분주한 일정 가운데서도 항상 고요한 곳을 찾아가셨습니다. 우리는 기도하지 못하는 이유를 '너무 바빠서'라고 말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열심히 기도하는 이유도 '너무 바빠서'임을 잊지 마십시오. 기도하지 않고는, 하나님 앞에서 보내는 시간이 없이는 자기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진실이 있습니다. 고독 속에서 하나님과 만난 사람은 자기가 홀로 살 수 없는 존재임을 절감합니다. 다른 이들과 더불어 살 수밖에 없고, 다른 이들 덕분에 살아간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그것을 깊이 인식하는 사람은 받은 것을 누군가에게 되돌려주고 싶어합니다. 그것이 사랑이고 감사입니다. 사람이 사람다워지는 것은 받은 것을 되돌려줄 때입니다.

우리가 누리고 살아가는 것 가운데 나로부터 나온 것이 무엇입니까? 다 누군가의 덕분에 내게 온 것 아닌가요? 생명조차도 그러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라면 우리는 이 자리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붙안고 계십니다. 이것을 깊이 깨닫는다면 우리 삶은 달라집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우리는 시인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는 한 구절을 만납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시116:12)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물어야 할 참된 물음입니다. 이 물음을 제대로 던지며 살면 우리 삶이 새로워집니다. 사람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히 여기고 보답할 줄 안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이 언제 자라지요? 누군가를 도와주려고 불편을 감수할 때입니다. 신비가들이 세상에 있는 어려운 사람들은 우리의 스승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들을 돕기 위해 몸을 낮출 때 우리는 성장하는 것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믿음이란 이런 것입니다. 신앙은 밑도 끝도 없는 욕망을 채우기 위한 방편이 아닙니다.


무엇을 감사할까?

그렇다면 히브리의 시인은 무엇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나요? 첫 번째로 그가 꼽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 자기의 사정을 들어주셨다는 것입니다. 살다보면 마음에 쌓인 무거움을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싶은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마음이 답답할 때면 여러분은 누구를 찾습니까? 대개 친구들과 만나 이야기를 할 겁니다. 프랑스 사람들은 포도주나 맥주를 찾아간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우리 사정을 자기 일인 듯 공감하면서 들어주는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할 수 없어서 앞에 앉아 있기는 하지만, 흘낏흘낏 시계를 보거나, 하품을 하는 친구를 보면 마음이 더 어두워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르십니다. 우리가 당신께 나아와 있는 그대로의 내 마음을 드러내는 것을 대견하게 여기십니다. 언젠가도 말씀드렸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는 나의 짐을 상대에게 맡기려는 순간 틀어지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과의 관계는 다릅니다. 우리의 짐을 주님 앞에 맡기려고 하는 순간 관계가 형성됩니다.

시인은 지금 사망의 줄이 자기를 두르고 음부의 고통이 닥쳐와 어찌할 바를 모를 때 여호와께 기도했더니 하나님이 그를 구원하셨다고 고백합니다. 이런 근원적인 은총을 경험했기에 그는 말합니다.


"주께서 내 영혼을 사망에서, 내 눈을 눈물에서, 내 발을 넘어짐에서 건지셨나이다."(8)


시인은 너무나 큰 시련을 겪었습니다. 그래서 세상이 두렵습니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을 믿을 수 없다는 사실처럼 큰 비극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래서 탄식합니다. "내 인생이 왜 이렇게 고통스러우냐?"(10) 하지만 그는 문득 마음이 밝아집니다. 환난과 고통으로부터 건져주신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자각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초월입니다. 마음의 감옥에서 벗어나는 것이지요. 하나님을 가리켜 어느 신학자는 존재의 기반이라 했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이 그분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 마음이 속절없이 흔들릴 때에도 주님은 우리의 반석이 되십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모신 이들의 든든함을 고린도후서에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4:8-9)


고통의 용광로 속에서 오히려 사도는 자기 속에 예수의 생명이 자라나는 것을 감사히 여기고 있습니다. 體露金風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잎진 나무에 부는 바람이 오히려 나무의 존재를 더욱 옹골차게 드러낸다는 뜻이겠습니다. 바울은 온갖 시련을 겪으면서, 그 시련이 오히려 자신을 그리스도에게 더욱 확고하게 비끌어맨 사실을 기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의 시인의 경험과 유사합니다.


무엇으로 보답할꼬

고통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고통 속에서도 그것을 이길 힘을 주시는 하나님, 아니 고통 때문에 더욱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를 맛볼 수 있음을 기뻐하면서 시인은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정말 멋진 질문입니다. 그는 일단 두 가지를 결단합니다. 첫째는 구원의 잔을 높이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겠다는 것이고, 둘째는 자기가 한 서원을 주님께 갚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손에 무슨 잔을 들고 계십니까? 절망의 잔입니까? 쓰디쓴 고통의 잔입니까? 쾌락의 잔입니까? 그 잔을 치우세요. 그리고 구원의 잔을 드세요. 주님은 이미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구원의 잔을 들고 하나님의 이름 앞에 영광을 돌리십시오. 나를 나 되게 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마음껏 찬양하십시오. 누가 뭐라 해도 나는 복사판이 아니라 원판이라 생각하면서 주님이 우리 각자에게 稟賦하신 삶을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날마다 '주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까'를 생각하면서 사십시오. 그 속에 무엇으로도 가릴 수 없는 생의 기쁨이 있습니다.

등 록 날 짜 1970년 01월 01일 09시 33분 21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