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53. 어두운 후에 빛이 오며
설교자 김기석
본문 시 36:5-10
설교일시 2020-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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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후에 빛이 오며
시 36:5-10
(2020/12/31, 송구영신예배)

[주님,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은 하늘에 가득 차 있고, 주님의 미쁘심은 궁창에 사무쳐 있습니다. 주님의 의로우심은 우람한 산줄기와 같고, 주님의 공평하심은 깊고 깊은 심연과도 같습니다. 주님, 주님은 사람과 짐승을 똑같이 돌보십니다. 하나님,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이 어찌 그리 값집니까? 사람들이 주님의 날개 그늘 아래로 피하여 숨습니다. 주님의 집에 있는 기름진 것으로 그들이 배불리 먹고, 주님이 그들에게 주님의 시내에서 단물을 마시게 합니다. 생명의 샘이 주님께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빛을 받아 환히 열린 미래를 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주님께서 친히 한결같은 사랑을 베풀어 주십시오. 마음이 정직한 사람에게는, 주님의 의를 변함없이 베풀어 주십시오.]

∙돌아봄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한 걸음씩 비틀거리며 걸었지만 마침내 우리 한 해의 마지막 날에 당도했습니다. 급한 마음에 쫓겨 질주하듯 살았던 사람도, 급할 게 뭐냐는 투로 느긋하게 걸었던 사람도 모두 시간의 주인이신 하나님 앞에 서 있습니다. 우리들 각자의 삶은 다 달랐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누어주신 삶의 분량이 저마다 달랐기 때문입니다. 빈 손이 부끄러워 얼굴을 들지 못하는 이들도 있고, 나름대로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며 잠시 숨을 고르는 이들도 있습니다.

돌아보면 참 힘겨운 한 해였습니다. 매해 시간 여행이 쉬웠다고 느낀 때는 없었지만 올해는 모두가 다 낯선 시간을 견디느라 애썼습니다. 잠시 머물다 떠날 줄 알았던 불편한 손님이 아예 우리 집에 아예 눌러 앉은 것 같은 답답한 나날이었습니다. 외줄을 타듯 위태로운 시간을 견뎌야 했습니다. 서울은 좀 덜 했지만 여름철 홍수와 산사태로 최악의 피해를 입은 분들도 계십니다. 도처에서 발생한 산불을 비롯한 대형 화재로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사람들도 많습니다. 민생을 살피고 사람들을 희망의 땅으로 이끌어야 하는 정치인들은 당리당략에 따라 처신할 뿐, 밑바닥에서 신음하는 사람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역사를 초월의 방향으로 이끌어야 하는 종교는 특히 개신교회는 오히려 사람들의 지탄거리로 전락했습니다. 초라한 성적표를 받아 든 것처럼 쓸쓸한 저녁입니다.

이런 스산한 마음 때문일 겁니다. ‘광야, 광야에 서 있네’라는 노래 가사가 자꾸만 떠오릅니다. 힘겨웠지만 여전히 걸을 수 있다는 사실이 고맙습니다. 근근이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보이지 않는 손으로 우리를 붙들어주신 하나님의 은총 덕분이었습니다. 값비싼 대가를 치르긴 했지만 깨달음도 있었습니다. 우리가 당연한 것으로 여기던 일상이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 말입니다. 우리는 가끔 관계에 충실하지 않은 이들에게 농담처럼 “있을 때 잘 해”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의 소중함을 알아차리는 것은 늘 그의 부재가 가져온 고통을 겪고 난 후입니다. ‘부재‘가 오히려 ‘현존‘ 하는 것의 소중함을 일깨워준다는 사실이 우리 삶의 역설이라면 역설일 것입니다. 함께 모여 예배 드리고, 사귀고, 일하고, 수다 떨던 시간이 그렇게 그리울 수가 없습니다. 비대면 상황 속에서 외롭게 세상을 떠난 분들과 그 가족들에게 하나님의 위로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그러나 위기 속에서도 우리의 신앙 여정에 동행이 되신 분들도 계십니다. 고맙습니다. 환영합니다. 머지않은 장래에 함께 만나 깊이 사귈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고대합니다.

∙부정적 기억과 결별하자
묵은 해를 정리해야 하는 이 시간 우리를 사로잡는 죄책감과 자책, 후회와 쓰라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요? 이미 흘러가버린 시간은 후회한다고 하여 돌아올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흘러간 시간은 이미 지나가버렸기에 우리와 무관한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 시간은 우리 기억 속에 새겨져 삶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2020년은 이미 우리 삶의 책에 기록된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 시간을 온전히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우리의 시간을 하나님께 맡길 때 하나님은 우리 속에서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십니다. 후회, 자책, 쓰라림, 근심을 다 하나님의 손에 맡기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의 과거를 바꾸시지는 않지만, 과거의 의미를 바꾸어주심으로 우리를 해방하십니다. 부끄러운 기억을 한사코 잊으려 하면 할수록 그 기억은 더 큰 힘으로 우리를 사로잡습니다. 그러나 그 부끄러움을 하나님 앞에 내놓으면 하나님의 치유가 시작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남루한 시간, 부끄러운 기억을 변화시켜 빛으로 바꾸십니다. 우리 마음이 치유될 때 비로소 이웃에 대한 이해와 관용과 사랑이 깃듭니다. 우리는 망가뜨리지만 하나님은 고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미처 헤아릴 수 없는 방식으로 우리 삶을 이끌고 계십니다.

어둠이 깊어가는 이 시간 가만히 우리 삶을 돌아봅니다. 날마다 우리 삶 한복판에서 일어나는 기적들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욕망의 벌판을 질주했던 것은 아닌지요? 아브라함 요수아 헤셸은 우리 일상이 기적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음식을 앞에 놓고 기도를 함으로써 우리의 놀람을 표현하도록 훈련받았다. 물 한 잔을 마실 때마다 우리는 영원한 창조의 신비를 기억하며 기도한다. ‘말씀으로 모든 것을 있게 하신…당신을 기리나이다.‘ 일상의 사소한 일들이 모두 기적을 나타낸다. 빵이나 열매를 먹고 꽃의 향기나 한 잔의 포도주를 즐기고 계절마다 처음 맺히는 과일을 맛보고 무지개나 큰 바다를 바라보고 꽃을 피우는 나무들을 살펴보고 토라의 스승을 만나고 좋은 소식 나쁜 소식을 듣고─이 모든 일을 하면서 우리는 그분의 이름을 부르도록 가르침 받았다. 생리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는 것에 대하여도 우리는 말한다. ‘모든 육신을 고치시고 놀라운 일을 이루시는…당신을 기리나이다.‘“(아브라함 요수아 헤셸 선집5, <사람을 찾는 하나님>, 이현주 옮김, 종로서적, 1988, p.52)

일상이 기적입니다. 우리가 숨을 쉬고 있다는 것도 기적이고,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도 기적입니다.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끝내 포기하지 않고 삶을 이어가는 것도 기적입니다. 우리는 이런 기적 속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이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섭리와 숨결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시야를 넓히자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 시야를 가리고, 당면한 문제에만 골몰하게 만듭니다. 몇 해 전 세상을 떠난 어느 목사님에게 ‘가시거리’에 대한 인상적인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히말라야에 가보니 청명한 날이면 수 백 킬로미터 밖까지 훤하게 보이더라는 것입니다. 그 가없는 맑음 앞에 서는 순간 그는 우리 삶을 돌아보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고 합니다.

“히말라야를 바라보며 내가 안타까워하면서 우리 땅을 자꾸 생각하게 되는 것은, 도대체 그대와 나 사이에 그 무엇이 잔뜩 끼어 있기에 이렇게 가시거리가 제로(zero)에 가까운 세상이 되어버렸느냐는 것이다.“(수첩에 적어둔 ‘민들레교회‘ 주보글‘)

우리 시선을 가로막는 것들은 무엇일까요? 이해득실에 대한 계산, 정치적 입장, 속한 진영, 종교적 확신 등이 그런 것 아닐까요? 눈앞에서 벌어지는 시급한 일들에 정신을 쏟다보면 우리 시야는 좁아지게 마련입니다. 우리의 사랑이 겨우 그런 것들 앞에서 멈추어야 되겠습니까? 누군가를 미워하고 혐오하고 배제하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께 등을 돌리는 것임을 왜 모르는 것일까요? 하나님을 믿는 이들은 자꾸만 더 큰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자기 삶을 살펴야 합니다. 하나님은 후손에 대한 약속을 듣고도 기연가 미연가 하는 아브라함에게 “하늘을 쳐다보아라. 네가 셀 수 있거든, 저 별들을 세어 보아라.“(창15: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사야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힌 이들을 격려하기 위해 밤 하늘의 별을 바라보라고 말했습니다.

“너희는 고개를 들어서, 저 위를 바라보아라. 누가 이 모든 별을 창조하였느냐? 바로 그분께서 천체를 수효를 세어 불러내신다. 그는 능력이 많으시고 힘이 세셔서, 하나하나, 이름을 불러 나오게 하시니, 하나도 빠지는 일이 없다.“(사40:26)

하나님의 광대하심 앞에 자꾸 서야 현실에 일희일비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시편 36편의 시인도 눈빛이 의기양양하고, 남 속일 궁리나 하고, 범죄의 길을 고집하는 악인들 때문에 몹시 지쳤던 것 같습니다. 세상에는 정말 그런 이들이 참 많습니다. 그들로 인해 세상이 어두워 보이는 게 사실입니다. 절망의 어둠이 시인을 사로잡을 즈음 그는 문득 고개를 듭니다. 마치 밤이 지나 아침이 오는 것처럼 그는 새로운 질서, 더 큰 질서의 세계에 눈을 뜹니다. 그래서 우리가 한번 들으면 잊을 수 없는 고백을 합니다.

“주님,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은 하늘에 가득 차 있고, 주님의 미쁘심은 궁창에 사무쳐 있습니다. 주님의 의로우심은 우람한 산줄기와 같고, 주님의 공평하심은 깊고 깊은 심연과도 같습니다. 주님, 주님은 사람과 짐승을 똑같이 돌보십니다.“(시36:5-6)

하늘, 궁창, 우람한 산줄기, 깊고 깊은 심연 말고는 하나님의 성품인 한결같은 사랑, 미쁘심, 의로우심, 공평하심을 표현할 다른 말이 생각나지 않았던 것일까요? 이 장대한 표현 앞에 서는 순간 우리 가슴에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것 같지 않습니까? 당장 우리 눈에 보이지 않을지 몰라도 세상을 다스리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선의 궁극적 승리를 믿습니다. 거대한 빙하가 바람의 방향을 거슬러 오르는 것은 해류가 반대방향을 향하고 있기 때문이라지요? 하나님의 섭리가 그러합니다.

∙환히 열린 미래
시인은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당신의 날개 그늘 아래로 피하는 이들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을 믿기에 그는 두려움 없이 다가오는 시간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때로는 예기치 않은 일들이 큰 파도처럼 다가와 우리를 쓰러뜨릴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다시 일어나 옷을 툭툭 털고 다시 길을 떠나면 됩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저력底力이 있는 사람입니다. 모두가 이제는 더 못 버틸 거라고 생각할 때 다시 일어섭니다. 죽음의 그늘 골짜기로 다니는 이들 곁에 계시면서 막대기와 지팡이로 보살피시는 주님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곤고한 시간을 견뎌야 했던 또 다른 시인도 “주님의 진노는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영원하니, 밤새도록 눈물을 흘려도, 새벽이 오면 기쁨이 넘친다.“(시30:5)고 고백했습니다. 이런 확신이 우리를 살게 합니다.

“생명의 샘이 주님께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빛을 받아 환히 열린 미래를 봅니다.“(시36:9)

모든 것이 다 잘 될 것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모든 고통이 더 이상 우리를 괴롭히지 못할 거라는 말도 아닙니다. 실패의 쓰라림을 겪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여전히 우리 삶은 무겁고, 길은 어두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명랑하게 그 현실 속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홀로가 아님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실패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실패를 모릅니다. 그 사랑 안에서 걸으십시오. 마지막으로 요 며칠 제가 거듭거듭 드리고 있는 칼 라너의 기도문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주님, 이 고집 세고 게으른 종을 섬김의 자리에서 내치지 말아 주소서. 내 마음의 주인은 당신입니다. 나 홀로 내 영원한 운명과 마주하는 그 심연 속에서도 당신이 나를 다스리십니다. 당신의 은혜는 영원한 전능의 은혜입니다. 지혜로우시고 자비로우신 사랑의 하나님, 나를 당신 앞에서 멀리 내쫓지 말아 주십시오. 내 평생 주님을 섬기는 자리를 지키게 해주십시오. 당신이 원하시는 것을 내게 요구하십시오. 당신이 원하시는 것만 내게 주십시오. 내가 당신을 섬기다 지쳐 버려도, 나를 향한 당신의 인내는 지치지 않으십니다. 당신이 오셔서 나를 도우시며, 늘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모든 희망을 거슬러 희망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나의 모든 실패 가운데도 내 안에서 당신의 승리를 믿을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칼 라너, <칼 라너의 기도>, 손성현 옮김, 복 있는 사람, p.25-26)

늘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힘을 주시는 하나님, 모든 희망을 거슬러 희망할 수 있는 힘을 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할 때 우리 삶은 든든해집니다. 새해에는 주님의 은총 가운데 살면서 생명과 평화 그리고 기쁨의 열매를 많이 수확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20년 12월 31일 21시 15분 15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