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1. 우리가 바라보는 것
설교자 김기석
본문 고후 4:16-18
설교일시 2021-01-03
오디오파일 s20210103.mp3 [39960 KBytes]
목록

우리가 바라보는 것
고후4:16-18
(2021/01/03, 성탄 후 제2주, 신년주일)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집니다. 지금 우리가 겪는 일시적인 가벼운 고난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영원하고 크나큰 영광을 우리에게 이루어 줍니다. 우리는 보이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봅니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낙제는 없다
혼돈과 공허와 흑암 속에 있던 이들을 사랑으로 품으시고 빛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모든 이들과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새해를 맞이할 때마다 ‘가슴 벅찬’이라는 상투적인 표현을 쓰곤 하지만 올해는 차마 그 어구를 사용하지 못하겠습니다. 여전한 위기의식이 우리를 확고히 감싸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아슬아슬한 균형을 유지하며 여기까지 왔고, 다시 출발선에 섰습니다. 새롭게 뭔가를 다짐할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고마운지요. 오늘 찬양대가 드린 찬양과 영상은 40명의 대원들이 각자 집에서 부른 곡을 편집한 것입니다. ‘함께 지어져가는 우리‘를 몸소 실천해 본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1996년에 노벨 문학상을 받은 폴란드 시인 비스와바 쉼보르스카(1923~ )의 시 ‘두 번은 없다’는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기적임을 일깨워줍니다.

“두 번은 없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런 연습없이 태어나서
아무런 훈련 없이 죽는다.”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도 똑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아기의 눈에는 세상 모든 것이 신비이듯 지금 우리 앞에 당도한 시간은 우리에게 ‘태초’나 마찬가지입니다. 놀람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시인도 그래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반복되는 하루는 단 한 번도 없다.
두 번의 똑같은 밤도 없고,
두 번의 한결같은 입맞춤도 없고,
두 번의 동일한 눈빛도 없다.“

시인은 세상이란 학교에서 아무리 바보같은 학생이라도 낙제는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쓸데없는 불안으로 생을 낭비하지 말자며, “미소 짓고, 어깨동무하며/우리 함께 일치점을 찾아보자./비록 우리가 두 개의 투명한 물방울처럼/서로 다를지라도…….”(비스와바 쉼보르스카, <끝과 시작>, 최성은 옮김, 문학과지성사, p.34-35)라고 노래합니다. 얼굴이 웃으면 마음도 따라 웃는다지요? 곁에 선 사람을 밀어내야 할 사람으로 보지 말고 어깨를 겯고 함께 걸어야 할 벗으로 삼을 줄 알아야 생이 든든해집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교회의 지체로 부르신 것은 바로 그런 삶을 연습하라는 뜻이 아닐까요? 새해 첫 주일을 맞아 저는 바울 사도의 삶을 이끌었던 영적 원리를 되짚어보며 우리의 길잡이로 삼아보려 합니다.

∙질그릇에 간직한 보물
바울에게 있어 부활하신 주님과의 만남은 어떤 의미일까요? 박해하는 자에서 박해받는 자로의 변화 속에 그 답이 있을 것 같습니다. 이런 극적인 방향 전환은 다마스커스 체험이 그에게 얼마나 압도적이었는지를 말해줍니다. 종교체험을 흔히 ‘breakthrough‘라는 말로 설명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돌파라는 뜻이지만 뭔가에 의해 꿰뚫린 체험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이것은 익숙하고 평온하던 삶에 균열이 일어나고, 더 이상 나 좋을 대로 살 수 없게 되는 체험입니다. 그것은 의지적 노력으로 이룬 성과가 아니라 내게 무제약적으로 발생하는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박해하는 자에서 박해받는 자로의 전환을 바울은 손실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무상의 기쁨으로 생각합니다. 자아에서 해방된 삶의 자유를 맛보았기 때문일 겁니다. 그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힘입어 전도자의 직분을 얻었다고 고백합니다. 부름을 받은 그 순간부터 그는 부끄러운 일과 간교한 일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진리를 환히 드러냈습니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의 빛이 그에게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실존의 어둔 밤이 지나가고 그는 빛 앞에 선 사람이 되었습니다. 뜻도 모른 채 맹목적인 열정에 쫓기듯 살던 옛 삶은 지나갔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이의 기쁨이 그를 확고하게 사로잡았던 것입니다.

대림절 마지막 주 설교를 통해 저는 산고를 겪으나 아이를 낳지 못하는 이들의 무능에 대해 말한 적이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그리스도를 모르고 산 이들의 운명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접속되는 순간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바울은 시련과 박해조차도 자기 속에 있는 기쁨을 빼앗아 갈 수 없다고 말합니다.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이후 그의 삶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꿈꾸는 나른하고 느긋하고 호젓한 행복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시련의 연속이었습니다. 오죽하면 ‘나는 날마다 예수의 죽음을 몸으로 경험한다‘고 말했겠습니까? 하지만 시련은 그를 예수와 분리시키기는커녕 더 깊이 결합시켰고, 마침내 예수의 생명이 그의 몸 안에 확고하게 자리잡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자기 속에 깃든 그 예수의 생명을 바울은 질그릇 속에 간직한 보물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말합니다. 환난, 곤고, 박해, 굶주림, 헐벗음, 위협, 칼로도 빼앗아 갈 수 없는 보물을 마음에 간직한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성도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모든 일에서 우리를 사랑하여 주신 그분을 힘입어서, 이기고도 남습니다.”(롬8:37)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있다면 이 당당함, 이 확신입니다. 유쾌하고 가볍고 쉬운 삶을 꿈꾸지만 현실은 불쾌하고 무겁고 어려울 겁니다. 설사 그렇다 해도 우리는 기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기쁨은 나의 바람이 다 충족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 서서 하나님의 꿈을 꾸는 자로 살고 있다는 자각에서 얻어주는 것입니다. 이 기쁨을 빼앗기지 않는 한 우리는 가난한 사람이 아닙니다.

∙불굴의 용기
바울은 시련 속에서도 기뻐하고, 감사하고, 찬미하며 살았습니다. 불굴의 삶입니다. 불굴의 삶 혹은 믿음이란 어떠한 경우에도 인생의 경주를 포기하지 않는 삶입니다. 푯대이신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나가노라면 수없이 많은 난관에 봉착하게 마련입니다. 산이 가로막을 때도 있고, 거센 물살이 우리를 방해할 수도 있고, 악한 이들이 우리를 해치려 하기도 합니다. 어려움을 자꾸 겪다 보면 우리는 의기소침해지곤 합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목표를 수정하고 싶은 유혹에 시달리기도 합니다. 산을 오르다가 힘들다고 그냥 계곡에 발을 담그고 노는 격입니다. 등산은 그래도 됩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은 그러면 안 됩니다. 세상과 타협을 할 때마다 우리가 스스로 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도 나는 최선을 다했어.‘ ‘이만하면 나로써도 할 만큼 한 거야‘. 슬픈 자기 위안입니다.

바울 사도의 말이 죽비가 되어 우리의 나른한 어깨를 내리칩니다.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낙심한다는 것은 시달림을 받아 기운이 쇠해지는 것입니다. 낙심한 이들은 더 이상 새로운 시도를 하지 않습니다. 세상에 떠도는 말들에 온통 마음을 빼앗겨 자기 영혼의 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낙심한 이들은 자기가 겪고 있는 일이 가장 무겁고 힘겹다고 지레 짐작합니다. 자기의 무능을 탓하기도 하지만, 누군가를 원망하기도 합니다. 바울 사도가 낙심하지 않을 수 있는 까닭은 남들이 알지 못하는 새로운 힘이 늘 공급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비밀은 이것입니다.

“주 예수를 살리신 분이 예수와 함께 우리도 살리시고, 여러분과 함께 세워주시리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고후4:14)

하나님께서 불어넣으시는 숨이 그를 일으켜 세우곤 했습니다. 우리 역시 그러한 은총의 신비 안에 있습니다. 시편 시인도 같은 진실을 노래했습니다. “주님께서 주님의 영을 불어넣으시면, 그들이 다시 창조됩니다. 주님께서는 땅의 모습을 다시 새롭게 하십니다”(시104:30). 하나님의 창조는 지금도 지속되고 있습니다. 낡은 것들은 무너지고 새로운 질서가 태어납니다. 하나님의 숨을 쉬는 이들은 흘러가는 세월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집니다.“(고후4:16)

세월과 더불어 육체적 활력은 줄어들고 열정 또한 이전만 못할 수도 있습니다. 유한한 생명의 어쩔 수 없는 한계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난다 하여 영혼까지 늙어버리면 안 됩니다. 속사람이 날마다 새로워지는 것이 하나님 나라에 속한 이들의 모습이 아닐까요? 외적 성장은 멈추지만 성숙해질 수는 있지 않겠습니까? 나이가 들면서 냉소적이고 거칠고 이기적이던 옛 모습과 결별하고, 따뜻하고 친절하고 겸손하게 변해가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영혼의 소리에 늘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입니다.

반면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땡감처럼 사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좀처럼 단맛을 품지 못합니다. 날이 갈수록 고집스러워지고, 자기중심적이고, 사소한 일에도 화를 냅니다. 아름답게 나이가 들어가는 징표는 너그러움 혹은 여백이 많아지는 것입니다. 여백이 많은 사람은 일종의 안식일과 같아서 그를 만나고 나면 숨이 제대로 쉬어집니다. 겉사람을 꾸미는 장식들은 늘어나지만 속사람의 성장이 멈춰버린 사람들을 보는 것은 고통입니다. 우리들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 깨어나야 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무엇을 보며 사는가?
바울 사도는 믿음으로 사는 이들의 삶을 이렇게 요약합니다. “우리는 보이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봅니다”(고후4:18a). 바라보는 것이 곧 우리 삶의 내용이 됩니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바라보며 살고 있습니까? 신문, 유튜브, 카톡, 페북, 광고, 유명인에 대한 가십, 스포츠 스타들의 성적과 연봉에 정신을 온통 팔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우리는 유심히 바라보는 대상들로부터 알게 모르게 영향을 받습니다. 대개 우리 시선을 끄는 것들은 깜빡이는 불빛처럼 끝없이 변화하는 것들인 경우가 많습니다. 새로운 정보가 생산되고, 유통되고, 소비되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점점 짧아지고 있습니다. 정보는 축적되기보다 재빨리 스러집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따라잡기에 바빠서 깊은 사색이나 성찰의 시간을 마련하지 못합니다. 시간의 향기가 깃들 틈이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 삶이 부박한 것은 그 때문입니다. 어떤 일을 이드거니 해내는 이들의 모습은 아름답기까지 합니다.

물론 세상 현실을 외면하며 살 수는 없습니다. 좋든 싫든 우리는 속하여 있는 사회로부터 어느 정도 영향을 받기 때문입니다. 함께 사는 세상을 정의와 공의의 토대 위에 세우는 일을 위해 우리는 목소리를 높여야 할 때도 있고, 저항의 깃발을 들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한 순간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보이지 않는 세상’의 부름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토대 위에 인생의 집을 짓습니다. 그 토대는 하나님의 꿈 혹은 약속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다른 세계를 보는 사람입니다. 그는 세상을 가득 채우고 있는 하나님의 영을 느낍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이 하나님이 머무시는 곳임을 알아차립니다. 그에게 삶은 신비입니다. 그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영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며 삽니다. 그리고 아직 도래하지 않은 세계를 이루기 위해 수고하기를 마다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부박한 시대에 예언자로 부름 받았습니다. 예언자는 보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하나님의 정념을 느끼는 사람입니다. 나오미 라비라는 유대교 랍비는 예언자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예언자는 세상의 변화 가능성을 볼 수 있지만, 그것을 그냥 내버려 둘 수만은 없는 사람이다. 그 꿈을 위해 위험을 감내하며 용감하게 맞설 준비를 하고, 꿈으로 인해 입은 고통과 상처마저도 달갑게 감수하고자 하는 이들이다.“(나오미 레비, <아인슈타인과 랍비>, 최순님 옮김, 한국기독교연구소, p.346)

두 번은 없는 삶, 미소를 짓고, 어깨동무하며 서로에게 스며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기쁨과 감사, 찬양과 불굴의 용기로 시간을 채워 가십시오. 감사하고 기뻐하는 마음이야말로 우리 마음이 우울에 침윤되지 않도록 하는 치료제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보며 그것을 가시화하며 사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역사의 꿈을 이루어가시려 하십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감싸고 있으니 주저하지 말고 힘차게 걸어가십시오. 아멘.

등 록 날 짜 2021년 01월 03일 10시 10분 29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