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45. 든든히 서서
설교자 김기석
본문 살후 2:13-17
설교일시 2021-11-07
오디오파일 s20211107.mp3 [43316 KBy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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든든히 서서
살후 2:13-17
(창조절 제10주, 추수감사주일)

[주님의 사랑을 받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여러분의 일로 언제나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성령으로 거룩하게 하시고, 진리를 믿게 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시려고, 처음부터 여러분을 택하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복음으로 여러분을 부르시고, 여러분에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든든히 서서, 우리의 말이나 편지로 배운 전통을 굳게 지키십시오. 우리를 사랑하시고 은혜로 영원한 위로와 선한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여러분의 마음을 격려하시고, 모든 선한 일과 말에 굳세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 교우들의 감사
주님의 은혜와 평강이 교우 여러분 모두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인 동시에 입동(立冬)입니다. 바람이 불면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집니다. 채 떨어지지 않은 잎은 오갈들어 낙하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화려함을 자랑하던 화단이 조금 쓸쓸합니다. 옛사람들은 먼 길을 떠나며 작별인사를 하는 고니 소리를 들으며 겨울나기 준비를 서둘렀습니다. 추수감사주일을 앞두고 저는 교우들께 지난 한해를 돌이켜 보는 시간을 마련하고, 할 수 있거든 그 기억의 조각들을 제게 나눠달라 부탁드렸습니다. 응답해주신 분들께 감사합니다. 또 그런 소통 방식에 익숙하지 않아 마음으로만 응답해주신 분들께도 감사합니다. 정직하게 말하자면 어디 감사할 일만 있겠습니까? 여전히 벼랑 끝에 선 듯 위태로운 시간을 보내는 분들도 계시고, 캄캄한 어둠에 갇힌 듯 답답한 세월을 견디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런 분들에게 감사의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하는 것은 상처를 덧내는 일일 수도 있음을 잘 압니다. 주님의 사랑이 그분들을 이불처럼 덮어주시기를 기원합니다.

한 주간 교우들의 정겨운 소식을 기다리면서 저 또한 깊은 감회에 잠겼습니다. 굽은 나무가 선산을 지킨다는 옛말처럼 아주 오래 전부터 이 교회를 위해 사랑의 섬김을 다해 오신 분들이 계셔 든든했습니다. 아름다운 신앙 공동체를 함께 이루고 싶은 열망을 품고 우리 교회에 오신 이들 덕분에 우리는 나태함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팬데믹 상황이 만든 또 다른 풍경입니다만, 먼 지방에서, 해외에서 우리 교회 예배에 동참하고 또 기꺼이 한 가족이 되어 주신 분들에게도 감사합니다. 그분들을 통해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연결이라는 사실을 조금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선포된 말씀을 듣고 살아갈 힘을 얻었다든지, 삶의 지향을 바로 할 수 있었다고 응답해주신 분들께도 감사합니다. 말씀이 일으키는 변화의 사건을 삶으로 입증하는 분들이 계셔서 힘을 얻습니다. 오랜 기간 친밀하게 만날 수 없었기에 각자가 처한 상황을 자세히 알 수 없어 안타까웠는데, 이번 주에 교우들이 보내주신 메시지를 보며 함께 감사의 기도를 올렸습니다. 몇 가지만 요약해 보겠습니다. 함께 그 마음을 짚어보시면 좋겠습니다.

‘누군가를 위해 봉사할 수 있는 기회 주심 감사’
‘소중한 생명 잉태하는 기쁨 주심 감사’
‘위험한 삶의 현장에서 지켜주심 감사’
‘힘든 상황이지만 말씀 의지하여 굳게 서게 하심 감사’
‘용납하기 어렵던 이를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하심 감사’
‘팬데믹 상황을 통해 우리가 누리는 일상의 삶이 은총임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하심 감사’,
‘어려움 속에서도 늘 곁을 지켜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 깨닫게 하신 것 감사’
‘여러 해 동안 몰두하던 일의 결실이 보여 감사’
‘시달림의 시간이 지난 후 더 이상 안달복달하지 않게 하심 감사‘
‘조그만 텃밭을 가꾸고 수확하는 기쁨 주심 감사’
‘사춘기 딸들과 대화하며 갈등에서 벗어난 것 감사’
‘처음 해 본 요리에 성공한 것 감사’
‘새로운 직장에 잘 적응하면서, 인생의 한 조각 한 조각을 소중히 여기게 된 것 감사’
‘당연한 줄 알았던 일상이 기적임을 깨닫고 감사’

살펴보면 대체로 사소하고 일상적인 현실 속에서 발견한 감사의 내용들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도드라지게 나오진 않지만, 주님의 은혜가 이런 모든 고백의 배후를 형성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존재의 밑바탕’(Ground of being)이십니다. 바울 사도도 같은 고백을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살고, 움직이고, 존재하고 있습니다”(행 17:28b). 우리는 하나님의 세계에 초대받은 손님이고 그분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물론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사는 이들이 많습니다. 주님의 은혜의 신비를 맛본 이들의 마음은 시편의 한 구절에 오롯이 담겨 있습니다. “내가 이렇게 빚어진 것이 오묘하고 주님께서 하신 일이 놀라워, 이 모든 일로 내가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내 영혼은 이 사실을 너무도 잘 압니다.“(시 139:14)

• 성경에 나오는 감사의 고백
교우들의 감사 고백을 보면서 성경 기자들이 들려주는 감사 이야기가 궁금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를 표현하는 성경 구절들을 읽는 동안 가슴이 뭉클해졌습니다. 어느 것 하나 우리 삶의 경험과 유리된 것이 없었습니다. 특히 삶의 위기에 처했을 때 받은 도움에 대한 감사가 많았습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은 인간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시는 분이시고, 취약한 이들을 보호하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런 감사를 드렸습니다.

‘부르짖을 때 응답하여 주심 감사‘
‘포악한 자들로부터 구하여 주신 것 감사‘
‘죽음의 세력에 우리 생명이 삼켜지지 않게 지켜 주신 것 감사‘
‘슬픔의 상복을 벗기시고 기쁨의 나들이 옷으로 갈아 입히심 감사‘
‘힘과 방패가 되어 주심 감사‘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수없이 많은 갈림길 앞에 섭니다. 어느 길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우리 인생이 달라집니다. 모든 길을 걸을 수 없기에 우리는 하나의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모호하고 불확실한 삶을 살아갈 때 하나님은 또한 우리에게 마땅히 가야 할 길을 일러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이들은 모호함 속에서도 길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런 감사기도를 하나님께 올렸습니다.

‘슬기로운 권면 통해 곤경에서 벗어나게 하심 감사’
‘주님의 의로운 판단과 규례를 배우게 하심 감사’
‘지혜와 분별력 주심 감사‘
‘믿음의 동료를 주신 것 감사‘

무엇보다 우리가 감사해야 할 것이 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통치에 동참시켜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꿈을 가슴에 품은 사람입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 땅의 인력에 이끌릴 때도 있지만, 우리는 위에서 부르신 부르심의 상을 바라보며 나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 소망이 있어 우리 삶은 든든합니다. 신약성서에서 우리는 이런 소망과 든든함을 주신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고백을 도처에서 발견합니다.

‘죄에서 해방되어 의의 종이 되게 하심 감사‘
‘그리스도의 개선 행렬에 동참하게 하심 감사‘
‘택하여 주시고, 의롭게 여겨 직분 주심에 감사‘
‘흔들리지 않는 나라에 속하게 하신 것 감사‘
‘하나님의 영원한 통치에 동참하게 하심 감사‘

• 깨끗한 삶을 향하여
생각해보면 인생은 고마움입니다. 일상의 짐에 짓눌려 땅만 바라보고 살 때는 기쁨도 안식도 누릴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가끔 우리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마음을 들어 올리면, 내적 자유가 우리 속에 유입되곤 합니다. 내게 없는 것 즉 결핍에만 마음을 두고 살면 행복은 언제나 유보되고, 현실은 불평으로 채색되게 마련입니다. 전도서 기자는 오늘을 한껏 사는 것이 지혜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사람이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시니, 덧없는 인생살이에 크게 마음 쓸 일이 없다“(전 5:20). 마음이 무겁고 삶이 힘겹다고 느낄 때마다 제가 떠올리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행복을 바라신다는 근본적 사실을 받아들일 때 오늘을 견딜 힘이 생깁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 사도는 성도들을 생각하면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하는 일마다 잘 되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인생의 모든 그림자가 사라졌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았다는 사실에서 비롯됩니다. 택하심은 객관적으로 입증할 수 있는 사실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이들의 고백입니다. 초대를 받은 사람은 많지만 응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들려주신 혼인잔치의 비유가 바로 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핑계를 대면서 그 초대에 응하지 않았습니다. ‘밭을 샀기 때문에 나가봐야 한다‘, ‘겨릿 소 다섯 쌍을 샀기 때문에 시험을 해보아야 한다‘, ‘장가를 가서 아내를 맞이했으니 갈 수 없다‘(눅 14:16-20) 자기의 루틴을 깨기 싫어하는 이들은 주님의 초대에 응하기 어렵습니다. 신앙은 모험입니다. 자기의 모든 것을 걸고 새로운 인생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길에 접어든 사람들은 압니다. 내가 주님을 선택하기 전에 주님이 먼저 나를 선택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부르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모태에서 짓기도 전에 너를 선택하고, 네가 태어나기도 전에 너를 거룩하게 구별해서, 뭇 민족에게 보낼 예언자로 세웠다“(렘 1:5).

택하심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이요 은혜입니다. 우리는 다만 그 부르심에 응답했을 뿐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택하여 주신 까닭은 무엇일까요? “성령으로 거룩하게 하시고, 진리를 믿게 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거룩해진다는 것은 육체의 정욕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하나님의 마음에 접속된 삶을 살게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깊이 접속된 사람은 더 이상 자기 욕망대로 살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을 복되게 하는 것을 기뻐합니다. 거룩함이란 그런 것입니다. 거룩한 삶은 인욕으로 말미암아 더럽혀지지 않은 깨끗한 삶입니다. 깨끗함이야말로 구원받은 사람의 징표입니다. 깨끗한 사람만 구원받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구원을 경험한 이의 삶은 깨끗함으로 나타난다는 말입니다. 이 순서를 뒤집으면 안 됩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듯 자기 욕심을 따라 살던 사람들이 변화되어 하나님의 뜻 안에서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을 보고 기뻐합니다. 기쁨은 늘 감사를 동반합니다. “항상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살전 5:16-18a)는 권고는 셋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입니다. 감사하는 사람이라야 기뻐할 수 있고, 기도하는 사람이라야 감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 복의 매개자
오늘 본문에서 사도는 다른 이들을 하나님께 초대하고 연결하는 일에 쓰임을 받았다는 사실에 깊이 감사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이 흘러가는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낯선 땅을 향해 길 떠나는 아브람에게 ‘복의 매개자‘가 되라고 이르셨습니다. 가끔 제게 기독교인들은 어떻게 이웃 사랑을 실천해야 하느냐고 묻는 분들이 계십니다. 얼이 빠질 정도로 분주한 현실 속에 살고 있는데, 취약해진 이웃을 돌보고 사랑해야 한다는 말이 너무 무겁게 느껴지기에 하는 질문일 겁니다. 가능한 한 고통을 겪고 있는 이들에게 다가가 말을 건네고,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돕고, 어려움을 만들어내는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연대해야 합니다. 당장 그럴 여력이 없다면 그런 일을 하고 있는 이들을 물질적으로 혹은 기도로 후원해야 합니다. 할 수 있는 한 가지 일만이라도 시작해야 합니다.

그러나 저는 가장 기본적인 이웃 사랑은 나로 인하여 누군가가 아름다워지도록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사람 속에는 선의 가능성과 악의 가능성이 공존합니다.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사람들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것을 끌어내는 마중물입니다. 특별한 일을 하지 않더라도 나의 있음 그 자체가 다른 이들 속에 있는 선의 가능성을 이끌어낸다면 나는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의 말이 진리 안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심정을 대변합니다. “누가 약해지면, 나도 약해지지 않겠습니까? 누가 넘어지면, 나도 애타지 않겠습니까?“(고후 11:29) 초는 자기 몸을 태워 빛을 발하지만 인간은 이웃을 향한 애태움을 통해 빛을 발합니다. 그 빛이 바로 사랑입니다. 그 빛과 사랑을 경험한 사람은 자기 생의 무거움과 맞서 싸울 힘을 얻습니다.

사도 바울은 성도들이 믿음 가운데 든든히 서서 사도들을 통해 전해진 말씀이나 편지를 통해 배운 전통을 굳게 잡을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합니다. 은혜 안에서 성도들이 격려를 받고, 모든 선한 일과 말에 굳세게 되는 것이야말로 그의 기쁨이요 보람입니다. 온 세상을 다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가까이 있는 한 사람만이라도 진리 안에서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품에 안으십시오. 그 아름다운 실천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통치에 동참합니다. 맑음 앞에 설 때 사람들은 맑아집니다. 우리와 마주 선 이들이 우리를 통해 자신의 맑음을 찾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우리를 이 선한 일에 불러주신 주님께 감사합니다. “평화의 하나님께서 친히, 여러분을 완전히 거룩하게 해 주시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 여러분의 영과 혼과 몸을 흠이 없이 완전하게 지켜 주시기를 빕니다.“(살전 5:23) 아멘.

등 록 날 짜 2021년 11월 07일 10시 30분 48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