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23. 내 속을 새롭게 하여 주십시오
설교자 김기석
본문 시 51:7-12
설교일시 2022-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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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속을 새롭게 하여 주십시오
시 51:7-12
(2022/06/05, 성령강림주일)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해주십시오. 내가 깨끗하게 될 것입니다. 나를 씻어 주십시오. 내가 눈보다 더 희게 될 것입니다. 기쁨과 즐거움의 소리를 들려주십시오. 주님께서 꺾으신 뼈들도, 기뻐하며 춤출 것입니다. 주님의 눈을 내 죄에서 돌리시고, 내 모든 죄악을 없애 주십시오. 아, 하나님, 내 속에 깨끗한 마음을 창조하여 주시고 내 속을 견고한 심령으로 새롭게 하여 주십시오. 주님 앞에서 나를 쫓아내지 마시며, 주님의 성령을 나에게서 거두어 가지 말아 주십시오. 주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의 기쁨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내가 지탱할 수 있도록 내게 자발적인 마음을 주십시오.]

• 바벨탑 사건을 넘어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우리는 바야흐로 교회력으로 성령강림절기에 접어들었습니다. 내일이 망종芒種입니다. 까끄라기 작물들의 씨를 뿌리는 때라지만 우리 기후에서는 밭보리를 수확하고 모내기를 해야 할 때입니다. 우리 중 농부는 많지 않지만 생명과 평화의 씨를 뿌려야 한다는 점에서는 농부와 비슷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부터 시작되는 성령강림절기는 대림절에 이르기까지 지속됩니다. 씨를 뿌리고 수확을 하는 농부들의 시간과 얼추 일치합니다. 우리 신앙생활도 그런 파종의 수고와 성장의 보람과 결실의 기쁨을 모두 맛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은 무기력에 사로잡혔던 제자들을 일으켜 세웠습니다. 그들은 성령 강림과 더불어 일어선 사람, 직립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위로는 하늘의 뜻을 받들고, 이래로는 그리스도의 몸이 되어 세상을 섬기는 사람 말입니다. 프랑스의 조각가 알베르토 자코메티(Alberto Giacometti, 1901-1966)는 늘 서있는 사람을 형상화하곤 했습니다. 그는 직립의 사람들을 조각한 까닭을 이렇게 밝혔습니다. “수평의 인간은 잠이요, 의지상실이요, 인간다움의 포기요, 굴복이요, 백치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아무리 빈약한 체구를 가졌더라도 서 있을 수 있는 한은 희망을 가질 수 있다. 이것이 수직성에 관한 나의 철학이고 미학이다.”

박해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골방에 숨어 지내던 제자들은 성령으로 인해 생기 충만하게 되었고, 마침내 그들은 두려움을 떨치고 광장으로 달려 나가 ‘그 이름’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로마 당국과 유대교 성전 체제에 의해 금기시 되던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그들은 힘차게 증언했습니다.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는 아름답고 장엄합니다. 유대인들은 무법자의 손을 빌어 그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죽음의 고통에서 풀어서 살리셨습니다. 그가 죽음의 세력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행 2:24). 베드로와 요한은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성전 아름다운 문 앞에 앉아 있던 날 때부터 걷지 못하던 걸인을 치유했습니다.

성령강림절에 일어난 한 사건을 우리는 놀라움으로 기억합니다. 사도들이 방언으로 말하자 순례 차 예루살렘에 와 있던 사람들은 신기하게도 모두 자기가 태어나 살던 지방의 말로 들었습니다. 이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옛날 바벨탑 사건을 기억해야 합니다. 창세기 11장은 처음에는 세상에 언어가 하나뿐이어서 모두가 같은 말을 썼다고 말합니다. 동쪽으로 이동하던 그들은 시날 땅 한 복판에 자리를 잡고는 말했습니다. “자, 도시를 세우고, 그 안에 탑을 쌓고서, 탑 꼭대기가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의 이름을 날리고, 온 땅 위에 흩어지지 않게 하자.”(창 11:4) 도시를 세우고 꼭대기가 하늘에 닿는 탑을 쌓은 동기는 두 가지였습니다. 이름을 날리자는 것과 흩어지지 않게 하자는 것이 그것입니다. 자연과의 투쟁을 통해 살아남으려는 인간의 자구책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 바벨탑 이야기에는 아주 심각한 문명 비판이 담겨 있습니다. 사람들은 탑을 쌓을 때 돌이 아닌 단단히 구워낸 벽돌을 사용했고, 흙 대신 역청을 사용했습니다. 벽돌은 도량형의 통일을 상징합니다. 역청은 틈 없는 연결을 가리킵니다. 벽돌과 역청은 하나의 목소리만이 허용될 뿐 다른 목소리는 허용하지 않는 제국주의를 달리 표현한 것이 아닐까요? 일사불란, 총화단결이라는 말은 전체주의 사회에서 우리가 흔히 듣던 표현들입니다. 벽돌과 역청의 세상은 평화로운 듯 보이지만 진짜 평화는 없습니다. 차이가 용납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신적인 존재가 되려는 인간의 오만함을 그냥 두고 보실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흩으시고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습니다.

언어의 혼잡은 어찌 보면 징계이지만 은총일 수도 있습니다. 저마다 자기 목소리를 가지고 살 수 있게 하셨으니 말입니다. 다름을 용납하는 것이 하나님의 세계의 특색입니다. 그 세계는 화이부동의 세계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여전히 존재합니다. 사람들이 서로를 이해하기 어렵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은 그 한계를 뛰어넘는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사도들은 자기들의 언어로 말했지만 각 지방에서 온 사람들은 자기들에게 익숙한 언어로 알아들었습니다. 상호 소통이 일어난 것입니다. 차이는 존재하되 영적으로 깊이 연결됨을 느끼게 만드는 것, 바로 그것이 성령이 하시는 일입니다. 지금 같은 불통의 세상에 성령께서 임하시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성령강림절 사건은 새로운 삶의 출발점입니다. 그 출발점에 선 우리는 시편 51편을 우리 여정의 안내자로 삼으면 좋겠습니다.

• 정직한 자기 인식
시편 51편은 시편 가운데서 대표적인 참회시입니다. 시의 표제는 이 시의 상황을 ‘다윗이 밧세바와 정을 통한 뒤, 예언자 나단이 그를 찾아왔을 때 뉘우치고 지은 시’라고 되어 있습니다. 시편에 나오는 표제는 시를 읽는 독자들로 하여금 시의 세계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구체적 상황을 떠올리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시를 꼭 다윗의 부끄러운 기억에 결부시켜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윗과 똑같은 경험은 아니지만 우리도 살다보면 차마 남에게 말하기 어려운 부끄러운 일을 저지를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어두운 그림자가 되어 우리를 암암리에 지배합니다. 시편을 읽는다는 것은 시편을 통해 자기의 그림자를 자각하고, 그것을 하나님의 은총 앞에 내려놓는 것입니다.

시인은 먼저 하나님께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청합니다. “하나님,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으로 내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주님의 크신 긍휼을 베푸시어 내 반역죄를 없애 주십시오. 내 죄악을 말끔히 씻어 주시고, 내 죄를 깨끗이 없애 주십시오”(시 51:1-2). 한결같은 사랑을 뜻하는 헤세드는 언약에 근거한 사랑을 말합니다. 긍휼을 뜻하는 라훔은 자궁을 뜻하는 말로 자식을 사랑하는 어머니의 사랑을 가리킵니다. 시인은 자기를 지배하고 있는 악의 충동과 가능성을 깊이 자각하고 있습니다. 반역죄라고 번역된 '페쉐'pešaʿ는 의도적인 모반을 뜻하고, 죄악이라 번역된 '아온ʿāôn'은 길을 잘못 든 것을 말합니다. 죄라고 번역된 '하타아ḥaṭṭā'āṯ는 화살이 과녁을 빗나갔다는 뜻입니다. 세 가지 단어가 거듭 사용된 것은 죄를 세밀하게 구분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다양한 표현을 통해 하나님과의 언약에 충실하지 못했던 자기의 죄의 심각성을 드러내기 위한 것입니다. ‘없애 주십시오’, ‘말끔히 씻어 주십시오’, ‘깨끗이 없애 주십시오’라는 구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죄를 이길 힘이 자기에게 없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동생에 대한 미칠 듯한 질투에 사로잡혀 얼굴빛이 변한 가인에게 경고하신 말씀을 기억합니다. “네가 올바른 일을 하였다면, 어찌하여 얼굴빛이 달라지느냐? 네가 올바르지 못한 일을 하였으니, 죄가 너의 문에 도사리고 앉아서, 너를 지배하려고 한다. 너는 그 죄를 잘 다스려야 한다”(창 4:7). 시인은 죄를 다스리고 싶지만 그럴 수 있는 내적인 힘이 자기에게 없음을 시인합니다. 그는 그 죄의 뿌리 깊음을 나타내기 위해 어머니가 자기를 죄악 중에 잉태했다고 말합니다. 어머니의 죄를 고발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마치 자기 장기나 피부인양 떨쳐버리기 어려운 죄악을 드러내기 위한 표현일 뿐입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이 ‘찢겨진 심령’, ‘찢겨지고 짓밟힌 마음’(17)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어둠 혹은 그림자를 보며 아파하는 이들을 멸시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흙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아십니다. 가끔 터무니없는 욕망에 사로잡혀 말도 안 되는 일을 저지르기도 하고, 또 그것 때문에 아파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찢긴 마음은 부끄럽지만 하나님은 그 부끄러움과 쓰라림을 통로로 삼아 우리 속에 진실한 마음을 빚어주고, 주님의 지혜를 심어주십니다. 그 사실을 알기에 시인은 고백합니다. “기쁨과 즐거움의 소리를 들려주십시오. 주님께서 꺾으신 뼈들도, 기뻐하며 춤출 것입니다”(시 51:8). 주님께서 꺾으신 뼈들도 기뻐하며 춤출 것이라는 표현이 강력합니다. 실패나 시련, 부끄러움이 오히려 우리를 새로운 존재로 빚어낸다면 우리는 춤이라도 추어야 할 것입니다.

• 새로운 창조
시인은 이제 더 이상 부끄러운 옛 삶을 지속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굳건한 의지만으로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그는 자기 의지의 무력함을 처절하게 경험한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그는 하나님께 청합니다. “아, 하나님, 내 속에 깨끗한 마음을 창조하여 주시고 내 속을 견고한 심령으로 새롭게 하여 주십시오”(시 51:10). ‘깨끗한 마음’, ‘견고한 심령’은 하나님의 은총을 통하여 받는 마음입니다. 깨끗한 마음이란 어떤 것일까요? 자아에 사로잡히지 않은 마음, 사욕에 물들지 않은 마음이 아닐까요? 공자님은 시경 전체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삿된 생각을 품지 않는 것이라 했습니다(子曰, “詩三百 一言以蔽之 曰 ‘思無邪’”) 그게 깨끗한 마음입니다. ‘견고한 심령’은 바람 부는 대로 나부끼지 않는 마음, 바로 선 마음입니다. 물론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견고한 심령의 사람은 흔들리면서도 기어코 중심을 찾아가는 사람입니다.

우리 속에 깨끗한 마음과 견고한 심령을 창조하는 것이 바로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그것을 알기에 시인은 하나님께 청합니다. “주님 앞에서 나를 쫓아내지 마시며, 주님의 성령을 나에게서 거두어 가지 말아 주십시오”(시 51:11). ‘주님 앞’은 주님의 현존 혹은 주님의 얼굴을 가리킵니다. 주님 앞에서 나를 쫓아내지 말라는 말은 당신의 얼굴을 숨기지 말아달라는 청입니다. 하나님의 환한 얼굴을 보고 살 때 우리는 대낮의 사람이 됩니다. 우울과 무기력에 사로잡히지 않고 활기차게 살게 됩니다. 주님의 호흡 혹은 생기가 속에 가득 찰 때 우리는 땅의 인력 혹은 세속의 물결에 속절없이 휩쓸려 가지 않게 됩니다.

돈이 주인 노릇하는 세상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불안감을 심어주려 합니다. 두려움과 고립감이 심화될수록 우리는 확고하게 현실에 포박 당하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성령은 우리에게 다른 세계를 바라보도록 만듭니다. 남들과의 경쟁을 통해 쟁취해야 하는 것 말고, 마음만 먹으면 누릴 수 있는 것이 제법 많다는 사실을 느끼게 만듭니다. 우정, 사랑, 연대, 나눔, 섬김의 기쁨을 누리게 하십니다. 성령은 우리 속에 주님의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시켜 줍니다. 그리고 자발적으로 주님의 뜻을 따를 수 있는 힘을 부여합니다. 성령은 우리 속에 여백을 창조하여 다른 이들을 받아들이게 하고, 그들을 사랑스런 눈빛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줍니다. 바울 사도는 이 놀라운 진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은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셔서, 여러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것을 염원하게 하시고 실천하게 하시는 분입니다.”(빌 2:13)

놀라운 말입니다. 하나님의 영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것을 염원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실천할 힘을 우리 속에 불어넣으십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것이 무엇일까요? 뒤틀리고 구부러진 세대에 흠 없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사실에 대한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 경험의 확장
시인은 하나님께 몇 가지를 더 청합니다. 첫째는 반역하는 죄인들에게 주님의 길을 가르칠 수 있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스스로 하나님을 반역하는 죄를 저질렀기에 그는 죄인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슬픔과 상실의 아픔을 경험해 본 사람이 슬픔에 처한 이를 위로할 수 있는 것처럼, 시인은 자기 경험을 통해 방황하고 있는 이들을 주님께로 인도하고 싶어 합니다. 우리의 상처와 아픔의 경험이 하나님의 손에 들려지면 누군가를 치유하는 소중한 도구가 되기도 하는 법입니다.

둘째는 살인죄를 짓지 않게 지켜달라고 합니다. 이 노래가 다윗의 노래라는 전제하에 본다면 밧세바를 범한 죄를 숨기지 위해 충직한 장군 우리야를 사지에 내몰았던 일을 떠올리게 마련입니다. 나의 죄를 숨기기 위해 혹은 나의 이익을 위해 누군가를 도구로 삼거나 해치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푸틴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신정 국가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한 것이라고 선전합니다. 서방 세계의 가치관에 물든 우크라이나를 정화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명분 뒤에 숨은 추악한 욕망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전미총기협회(NRA)는 정의를 지키기 위해서 총기의 소유와 사용은 불가피하다고 말합니다. 그들로부터 막대한 후원금을 받는 정치인들도 같은 논리로 총기 규제에 반대합니다. 사람들은 자기 이익을 확보하기 위해 그럴듯한 명분을 만듭니다. 우리는 생명과 평화를 저해하는 어떤 논리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셋째는 “주님의 은혜로 시온을 잘 돌보아주시고, 예루살렘 성벽을 견고히 세워”달라는 청입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 선 단독자이지만 사회를 구성하는 최소 단위이기도 합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홀로 만족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한 공적인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약한 이들은 붙들어 주고, 악한 이들은 꾸짖어야 합니다. 정의가 승리하도록 힘을 보태야 하고, 불의에는 항거해야 합니다. 우리 사회가 약육강식의 논리가 지배하는 곳으로 전락하지 않게 해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아주 긴 성령강림절기 여정을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생기가 우리 속에서 잦아들지 않기를 빕니다. 성령이 주시는 능력으로 생명을 북돋고, 평화를 단호하게 선택하는 용기를 발휘할 수 있기를 빕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22년 06월 05일 12시 11분 49초